30화.
“이거, 이거 켜 봐. 마력 아이템 사용할 줄 알지?”
“……왕녀님?”
헤일리의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안 돼요. 고장 난 것 아닐까요? 마법사에게 물어봐야겠어요.”
“마법구를 켜 봐. 어둡잖아.”
“……아, 안 되는데요. 저는 마법을 직접 쓸 정도로 마력을 잘 운용할 수는 없지만…… 마력 아이템을 쓸 때의 그 따뜻하게 모이는 기운이 없어요.”
아셰는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밖으로 나가 봐. 응접실에 걸린 방음 마법을 확인해 봐야겠어.”
그녀가 문을 쾅 닫았다. 응접실엔 본래부터 방음 마법이 걸려 있어, 그녀가 다니엘과 대화를 하거나 이단과 이야기하는 것들이 밖에 전혀 들리지 않았다.
“헤일리, 들려?”
“네, 왕녀님.”
그녀는 기운이 빠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헤일리가 울상이 되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왕녀님, 어쩌죠? 뭔가 이상해요. 스타람 섬도 아니고, 마력이 이렇게 하나도 없을 리가요.”
“밖으로 나가서, 왕궁을 한 바퀴 돌고 와.”
아셰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말했다.
“우리 궁만 이러는지, 다른 곳도 다 이러는지. 산하기관부터 시작해서 아메니티 전경까지 모두 확인하고 와.”
“네!”
그녀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니가 과일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제니가 불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궁으로 들어오며 혼비백산한 얼굴로 말했다.
“주방에 오븐이 하나도 작동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급히 딱 하나 있는 아궁이로 전하의 저녁 식사만 준비할 수 있었다고 해요. 마력 아이템들이 하나도 기능을 못한대요.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일단은 과일을 가져오긴 했어요. 지금 요리는 못 하는 상태예요.”
“촛불을 찾아봐. 일단 어두우니까. 어딘가에 있을 거야.”
제니를 비롯한 시녀들이 촛불을 몇 개 찾았으나, 불을 붙일 수 없어 제니가 다시 불씨를 얻으러 주방에 가야만 했다. 아셰는 참담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셰의 궁은 외진 곳에 있었지만, 그래도 궁 전체에 혼란의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가 스타람 섬도 아니고.’
헤일리의 말을 떠올리며 그녀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주 어린 시절 이후 처음 나오는 버릇이었다. 손톱을 물어뜯을 때마다 샤틴이 거세게 그녀의 손등을 때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토록 불안한 것이 처음이었다. 아무리 마력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한순간에 없어질 리는 없었다. 마치 제국의 황제가 한순간에 마력을 앗아 간 것처럼…….
그녀는 미친 듯이 기억을 더듬었다. 이단이 저 침대에 누워, 나른한 목소리로 해 주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 그녀가 실마리를 찾을 곳은 기억 속의 그 대화뿐이었다.
‘그럼 우리도…… 황제의 눈에 거슬리면, 스타람 섬처럼 마력을 뺏길 수도 있을까?’
‘이제는 황제도 그런 건 불가능해. 뭐, 며칠간이라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해 볼 수는 있겠지만 쉽지는 않을걸. 게다가 말했잖아. 아메니티의 마력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왕궁에서 분수처럼 흩뿌리고 있어. 왕궁을 직접 건드리지 않는 이상 힘들걸.’
그녀가 대화를 복기하고 있는데, 왕궁을 관찰하라고 보냈던 헤일리가 헉헉대며 돌아왔다. 그녀가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어쩌지 못하며 속사포처럼 말했다.
“왕녀님, 아메니티 전체에 마력이 사라졌대요!”
“……뭐?”
“지금 아메니티의 마법 등은 하나도 켜지지 않아요. 궁을 둘러싼 마법구들도 마찬가지고요, 마법구뿐만이 아니라 지금 마력 자체가 아예 없어요. 마력 아이템은 기능을 하지 못하고, 그래서 아메니티 전체가 혼란의 도가니래요!”
그녀는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아메니티의 전제 마력이 왕궁에 의존하고 있다고 봐도 되지.’
수도인 아메니티에 마력이 전혀 없다면, 왕궁의 마력 흐름을 중지시킨 것이고, 그 흐름을 중지시키려면 왕궁을 직접 건드려야 한다고 했다. 황제는 제국에 있고, 왕궁과는 어마어마한 거리 차가 있다.
‘아메탄 왕궁의 마력 설계를 보는 것만 해도 굉장히 바빠.’
그는 자신을 호위하러 올 반란군들을 기다리며 그저 한 달 동안 이곳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 반란군들은 황자를 제국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아닌, 아메탄으로부터의 추격에서 보호하려고 온 것이 아닐까. 그는 한 달 동안 왕궁에 머무르며 이브나 왕비가 촘촘하게 세워 놓은 마법의 흐름을 해체했으며, 마치 옛날에 스타람 섬의 마력을 빼앗았듯 아메니티의 마력을 모조리 없애고 도망쳤다.
“어떡해……. 그럼 우리 이제, 성냥이나 부싯깃을 들고 다녀야 해?”
시녀들이 불안한 어조로 속삭였다. 방음 마법이 사라진 궁에선 그녀들의 소곤거림까지 모두 들렸다.
“요리는 어떻게 해? 아궁이가 있는 집이 얼마나 된다고.”
“이제 어두워지면 길도 못 다니겠다. 마법구가 없잖아.”
“아까 보니 왕궁 전체가 캄캄했어…….”
“아침엔 어떻게 제시간에 깨지? 진짜 닭이라도 키워야 하나?”
“차라리 시골이 살기 편하겠어. 적어도 자급자족이라도 할 수 있잖아.”
아메탄의 수도 아메니티는 가장 번영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산하기관 연구원들이 개발해 낸 여러 가지 마법 아이템들로 삶의 질은 높았고 자본은 끊임없이 흘러 들어왔으며 밤에도 아름답게 빛났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마력에 의존적인 문명이었다. 시녀 몇몇도 이렇게 동요하는데, 지금 아메니티의 혼란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돌아올 거야.”
그녀의 차분한 말에 시녀들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원히 마력을 없애는 건 제국의 황제라도 불가능해.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거야.”
“정말요, 왕녀님? 정말이에요?”
“어. 예전에 누군가에게서 배운 것 같아.”
당장이라도 저 책장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남자를 상상하며 그녀가 눈을 감았다. 그 남자가 쳤던 강력한 방음 마법도 하룻밤이 지나니 사라졌다. 그러나…… 그 남자가 한 달 동안 연구해서 빼앗은 마력은 얼마가 지나야 돌아올까.
“주방에 다시 가긴 글렀으니, 과일이나 나누어 먹자.”
다니엘은 바빴는지 일이 터지고 나서 이틀 후에야 아셰를 보러 왔다. 밤을 샜는지 그의 눈 밑은 퀭했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아셰는 궁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혼란을 직접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다행이라고까지 느껴졌다.
“그 배은망덕한 자식을 제대로 추격조차 하지 못했어.”
다니엘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이단이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긴, 그가 사라지고 난 이후 이 사태가 벌어졌으니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마력이 사라졌으니 명령 전달 체계도 엉망진창이고, 국경도 대혼란이었다는군. 이제야 그가 반란군에 합류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어.”
아셰는 뭐라고 할 말이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3일 뒤에 떠난다고 했고, 국경에서 제출할 서류도 요청하기에 이런 일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지. 보기 좋게 이용당했군.”
“……화났구나, 다니엘.”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제국에 송환이 아니라 그대로 내가 직접 죽이고 싶을 만큼.”
그는 다니엘에게 거짓말을 했을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떠나는 날짜를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만일 그녀가 다니엘에게 그대로 말했다면 그의 계획에 굉장한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모든 계획을 알려 줄 만큼 아셰를 믿지는 않았으나, 떠나는 날짜를 알려 줄 만큼은 사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셰 역시도, 이 모든 사태를 미리 알았다면 다니엘에게 숨기지 않았을 것 같았다.
“……황족의 피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나 허탈해. 왕궁에 잠시 있었다고, 아메니티 전체의 마력을 없애는 게 가능한가? 스타람 섬처럼 마력을 아예 빼앗기는 것은 옛날 고대마법이 성행했던 때나 가능한 줄 알았는데.”
“아메니티의 마력은 상당히 특이한 방식으로 배분되어 있다고 들었어.”
아셰가 제왕 교육에서 듣지 못했으니, 다니엘도 전혀 모르는 내용일 것이다. 그녀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브나 왕비가, 아메니티의 고른 번영을 위해 왕궁에서 모든 마력을 모아 아메니티 전역에 고르게 흩뿌리는 방식으로 왕궁의 마법을 설계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왕궁의 마력을 통제하면 아메니티 전체가 흔들리는 거야.”
다니엘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어떻게…… 알아?”
“아주 예전에…….”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르엘라가 가르쳐 준 적이 있어.”
다니엘은 그녀와 르엘라의 각별한 사이를 알고 있었다. 비상의 제조법도 아셰에게만 몰래 가르쳐 줬는데 왕궁의 아주 오래된 비밀 정도는 당연히 알려 줬을 법하다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르엘라는 전무후무한 천재였고, 더 나아가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 그 자식은 일부러 왕궁에 왔군. 보호 요청이고 뭐고 다 핑계였던 거야.”
“그러니까 내가…….”
그녀는 팔짱을 끼며 한숨을 쉬었다.
“루벤을 너무 믿지 말라고 했잖아. 윌리엄이든 루벤이든, 너무 극단적이었어. 둘이서 경쟁이 붙으면 상황이 말도 안 되게 비효율적으로 흘러가는 법이니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본인도 짐작하지 못했겠지. 수사국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나 봐.”
그가 눈을 문지르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리한 카드민과 이단이 한꺼번에 아메탄 왕국으로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둘 다 수상하니 요구대로 들어줘서는 안 된다……. 이단을 손대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리한이라도 혀를 뽑거나 고문을 해야 한다는 걸 내가 무시했더니…….”
“그건 안 돼!”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그렇게 재능 있는 사람의 혀를 왜 뽑아? 그것도 우리나라에 살겠다고 온 사람한테. 알잖아, 예술인은 함부로 건드리면 파장이 커.”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어. 황제가 보고 싶다고 하여 지원군 편에 제국으로 보냈거든. 아메니티에 이 사달이 났는데, 원인이 된 두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 화가 나.”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