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아메탄은 금광도 얼마 없었고, 곡창 지대도 끼고 있지 못했으며 자원도 풍부하지 못했다. 인구도 적고 국토도 좁은 편이었다. 그러나 카를 왕에 들어서 산하기관이 설립되며 여러 가지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상당히 많이 올라가고 돈이 많이 돌고 있는 상태였다. 특히나 몇 년 전, 희대의 천재인 약제사 르엘라가 크게 활약하며 미용이나 전쟁에 유용한 시약들을 많이 수출하여 세금도 몇 년째 올리지 않았다.
“그 책임을 묻지 않고 동맹을 맺자 제의하면 너 하나는 데려올 수 있지 않을까. 공화국엔 명분이 필요하겠지만 그거야 만들기 나름이니.”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 고맙다고 하기에도 겁날 정도로 내겐 꿈만 같은 일이지.”
그녀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런 약속에 감동하기엔 그녀는 상당히 현실적이었다. 아셰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직접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다. 어차피 남의 호의에만 기대는 것엔 한계가 있다. 오라비인 윌리엄조차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아무리 서로 사랑을 말했더라도 한 달 동안 몸을 섞은 것이 다인 남자의 말에 인생을 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거야. 전쟁엔 돈이 필요하다며. 너희는 그만큼의 자본이 있니? 스타람이 화수분도 아니고, 그 작은 섬에서 언제까지나 돈이 나오지는 않을 것 아냐.”
“해결……해야지. 해결될 거야.”
그의 말에서 작은 망설임을 발견한 그녀가 조금 더 물으려는데, 그가 갑자기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만, 아셰.”
“응?”
그가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여서, 그녀는 잠시 긴장했다.
“혹시…… 임신할 가능성은 없어? 이렇게 많이 했는데?”
“아.”
아셰는 웃으며 그의 팔에 머리를 대고 자세를 고쳐 누웠다.
“의료국에서는 내게 늘 임신이 어려울 거라고 했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렇구나.”
그의 목소리에서는 분명한 실망감이 느껴졌기에 그녀는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아이를 갖고 싶어?”
“아니.”
그가 나른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래 난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어머, 왜?”
“나 같은 자식을 낳을까 봐. 내 핏줄이 이어지는 것은 끔찍해.”
그녀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재차 말했다.
“그래도 너를 닮은 아이는 보고 싶군. 나를 하나도 닮지 않고, 너만 닮았으면 좋겠어. 너라면 자식이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그래도 난 역시…….”
“역시?”
“너만 있으면 돼. 난 너만. 매일같이 너를 안을 수 있으면 그거면 돼.”
아셰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니, 이렇게 많이 했는데 더 하고 싶어?”
“……많이 참았어.”
“대체 뭘?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으면서.”
그녀가 그의 코를 살짝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가 대답했다.
“참았다니까.”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녀들이 눈치챌까 봐 네 몸에 자국 하나 내지 못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팔 근육이 갈라졌다.
“그래도 네 기분이 좋은 게 우선이라, 혹시나 아플 것 같은 자세는 시도도 못했어. 예를 들어 뒤로 한다거나 일어서서 한다거나…….”
경악에 찬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쿡쿡 웃었다.
“미리 말하지만, 다음에 만날 땐 안 참을 거야.”
그가 그녀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그녀는 그의 체온과, 등에 만져지는 울퉁불퉁한 상처와, 이 육중한 체중이 좋았다. 그것은 리젠도, 다니엘도 줄 수 없는 이상한 안정감이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아마도 내일 떠날 것 같아. 때가 됐어.”
“……내일? 이렇게 빨리?”
“예상보다…… 좀 빨리.”
“아…….”
이별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가 너무 매일같이 찾아와서 그런 것 같았다.
“기다리고 있어. 널 반드시 데리러 올 테니까.”
그는 그녀의 눈에 입 맞추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가 한숨을 쉬고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 넌…….”
“난?”
“나와 둘 중에 선택을 하라면, 네 오라비를 선택하겠지?”
그녀가 피식 웃었다.
“미안하지만 너와 지금 결혼한 것도 아니잖아. 네 반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내 몸에서 떨어트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난 아메탄의 왕족이야. 게다가 나는 공개적으로도 다니엘을 지지했어.”
“……이해해.”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게도 지금은 나의 혁명이 중요한 걸 이해해 줘. 이렇게 떠나는 것도.”
“난 애초부터 이해했어. 설마 네게 떠나지 말라고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줄 알았니?”
“뭐, 꼭 그것만을 말하는 건 아니고.”
그가 그녀의 몸에 자신을 밀착하며 입을 맞췄다.
“네게 모든 걸 말하지는 않았어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어. 그러니 부디 날 믿고 기다려 줘.”
그녀가 싱긋 웃으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그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안 물어봐?”
“네가 말하지 않은 것들은, 어차피 내가 물어도 해 주지 않을 테니까. 네 말대로, 나는 이미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여우같은 애라는 소리를 뒤에서 많이 들어 왔는걸.”
이단은, 난감할 틈도 주지 않는 그녀에게 졌다는 듯이 쿡쿡 웃으며 다시 그녀의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살결을 휘감기 시작했다.
“믿고 기다려.”
그가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널 데리러 올 거야.”
그의 부풀어 오른 남성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단의 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널 사랑해. 내 감정을 이렇게 결론 내린 이상, 나는 어떻게든 너를 내 인생에 엮어 낼 테니까.”
그녀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아주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그때의 그녀는 그가 사랑을 말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다시 욕망에 휩싸인 눈으로 그녀의 온몸에 정신없이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셰의 삶은 평온했다. 윌리엄을 죽이고도 그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녀였다. 한 달 동안 살을 섞은 남자가 떠났다고 해서 감정의 기복을 누군가에게 내보일 그녀가 아니었다.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해 느지막하게 일어난 그녀는 제니를 시켜 생선 요리와 파운드케이크를 가져오라고 요구했고, 리젠이 가져다준 약초학 책을 읽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오늘 따라 리젠도, 다니엘도, 심지어 샤틴도 그녀의 궁을 찾지 않았다. 그녀는 시녀들과 무료하게 카드 게임을 하다가, 그마저도 지겨워져 침대에 누웠다.
똑같은 하루였다. 지겹고 무료해도 항상 이렇게 지냈다. 아셰는 마음 깊은 곳에 어쩌지 못하는 허전함을 참으며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새까만 눈과, 마치 피가 쏟아지는 것 같았던 머리카락, 상처로 가득한 가슴과 단단하게 자리 잡힌 근육들을 생각하면 자신이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만일 이런 상황이 아니라, 자유의 몸으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아셰도 그를 조금 더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투정도 부리면서 가지 말라고 화를 내기도 했을까. 바라는 게 있었다면 조금 더 기 싸움이라도 했을지 모른다. 그녀는 이미 삶을 포기한 상태였고, 그래서 그에게 달관할 수 있었던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는 그녀를 끝까지 여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사실 그녀는 성깔머리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다만 굳이 그와 갈등을 만들 필요가 없었기에 말하기 싫으면 말하기 싫은 대로 둔 것뿐이었다.
그가 전쟁을 끝내고 돌아와 다니엘에게 자신을 요구하여 결혼한다면. 그의 계획대로 된다면 참으로 좋겠으나 아셰는 기본적으로 그런 희박한 확률에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막상 시간이 지나면 그가 그녀를 잊을 수도 있는 것이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다른 여자를 혼처로 들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대로 이곳에 가만히 있겠지만, 그에게는 마음 외에도 변수가 많았다.
반란군이 4년 반 안에 제국군을 격파하고 대륙을 장악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고, 제국군을 이긴다 해도 새로 세운 공화국의 입김이 세서 아메탄을 압박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으며, 이단이 그 공화국의 총통이 된다는 것도 당연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아셰는 단 한 달 있었을 뿐인데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을 충분히 경험했다. 그는 황족이었고, 황족으로 자라났으며, 혈통에서 오는 위압감은 공화주의자가 된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세습을 막는, 그렇게 해서 독재를 막겠다는 공화주의자들이 과연 아셰가 보았던 그 모습을 보지 못할까? 그의 눈빛에선 가끔 황제가 보였고, 단순한 잠자리에서도 자신이 생각한 범위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이끌었다. 그가 그녀를 위해 그은 선은 전적으로 자신의 판단이었다. 정중하게 존대를 쓸 때에는 그런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단은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이 총통이 아니라 황제가 어울리는 인상이었고 측근일수록 반드시 파악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가 약속한 미래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빠르게 이 허전함과 공허함에 익숙해져서, 또다시 평온하고 아무 생각 없는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까무룩 낮잠이 들었다가 깬 그녀는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허기가 져서 제니를 불렀다.
“와인과 치즈가 먹고 싶어. 크래커는 많이. 소시지도 있었으면 좋겠어.”
“네, 다녀올게요.”
제니는 밝게 말하고 궁을 나섰다. 그녀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다가, 아까 읽다 만 책을 읽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어느새 어스름이 내려 책을 읽기에 어두웠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천장에 매달려 있는 마법구를 켜려다 깜짝 놀랐다.
“……헤일리?”
그녀는 급히 시녀를 불렀다. 마법구가 켜지지 않았다. 아니, 아예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황급히 가장 간단한 마법인 불을 피워 보려 했지만, 운용할 수 있는 마력이 조금도 없었다. 급히 뛰어 들어온 헤일리에게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력 아이템인 목걸이를 건넸다. 조금만 마력을 집어넣어도 색깔이 변하는 장난감이었다. 어린 시절 제펠탄에게 받은 유일한 선물이기도 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