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사랑이라니.”
아셰의 말을 들은 그의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이 시점에 사랑? 사랑이라고?”
그녀는 잠시 주춤했지만,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이라는 말을 한순간 그를 감싸고 있던 모든 분위기가 변해 버린 것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네가 결국 그 단어를 말해 버리면…….”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으르렁거렸다.
“어떻게 너는 나를 미치게 하는 말들만 이렇게 골라서 하는 거지?”
밤이 깊게 내려앉았다.
3. 캐넌
“이단 황자의 말대로입니다.”
수사국 제복을 입은 카이든은 다니엘을 독대하며 무표정으로 말했다.
“서쪽에 키리네 산맥을 따라 대거 반란군들의 이동이 있었습니다. 아메탄 국경 쪽인데, 이단 황자가 말한 그 길 그대로입니다. 정말로 그를 호위하려고 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스타람에서 이틀 전, 비밀리에 함대를 띄웠습니다.”
다니엘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학 시절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 어렵다는 수사국 수석을 따낸 카이든 루스를 바라보았다. 카이든은 수사국의 전무후무한 재원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다니엘이 왕위에 오르는 데 카이든은 심지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수사국 내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수사국 사람들은 카이든을 통해 다니엘에게 말을 전하기도 했다. 물론 다니엘 역시 카이든을 통해 수사국 사람들에게 자신의 심기를 내비쳤다.
“함대라면?”
“대규모의 군대입니다. 스타람의 군인들이지요. 스타람이 예로부터 사병 문화였던 건 아실 겁니다.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은 정예병들입니다. 계급이 뚜렷하고 우리와 아주 다른 무기를 쓴다고 합니다.”
“그 때 말하던, 총기인가.”
“이단 황자가 합류하면 본격적으로 내란이 시작될 듯합니다. 그 때가 되면 더 자세한 정보들을 알 수 있겠지요. 사단장은 사브르 키렐으로,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스타람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실 알 수 있는 바가 없으니까요. 마력이 없는 땅인데다가 바다를 사이에 뒀고, 교류조차 없었으니 캐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밀수꾼들도 아무런 정보가 없었어?”
“밀수꾼들이 저희에게 협조적일 이유가 없지요. 하지만 그들도 군대에 대해서는 거의 모릅니다. 스타람에서는 군대를 몹시 비밀리에 조직한 듯합니다. 그것도 대문을 닫은 채 비밀리에 키우는 사병 문화와 관련되어 있겠지요.”
다니엘은 보고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람의 군부대는 제국의 서쪽으로 이동하여 과연 이단과 합류해 공화정을 대대적으로 선포할 계획인 듯했다. 모두가 이단이 말하던 그대로였고, 약속한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단이 몰래 떠나면, 다니엘은 제국이 요구한 대로 지원군과 물자를 보내 줄 예정이었다. 게다가 제국은 지원군과 함께 리한 카드민의 공연을 요구했다. 아메탄에서 그렇게 유명하다는데, 제국의 황제도 한번 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제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제국의 내란에 스타람까지 꼈다고 하더라도 아메탄은 아직 직접적으로 받을 타격이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균형을 잘 잡아 최대한의 국익을 놓치지 않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또 하나 있다면, 공화정의 씨앗이 아메탄에서는 그대로 죽어 버리길 바랐다. 아메탄마저 제국처럼 내란에 휘둘리면 참담하기 그지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아메탄과 제국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지만, 어쨌든 세습으로 이어지고 있는 왕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면 다니엘의 입지는 몹시 위태로워지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은 더욱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짜고짜 옛 의리를 생각하며 제국의 편을 들 수는 없었다.
“수사국에서는…….”
카이든은 어조의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리한 카드민을 제국에 보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네가 직접 취조했을 때,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 않았어?”
“마음이 바뀌었다는데 그 이상을 캐낼 수는 없었으니까요. 아메탄에 두고 끊임없이 감시하면 되었기에 내버려 두었지만…… 하지만 제국은 좀 다릅니다.”
“하지만…… 제국의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어. 뭐라고 하고 안 보내?”
“혀를 잘라 다시는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고, 마법을 사용해 고문하여 정신을 놓게 만드는 방법도 있지요.”
“진심은 아니지?”
다니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공화정이 싫다고 우리나라에 온, 심지어 예술인이야. 그런데 그런 사람을 그렇게 대우하면 공화주의자들에게 힘만 실어 줄 뿐이야.”
“예술인이라는 것도…… 못 미덥습니다만. 그가 사병 출신이라는 데에 저는 제 손가락 두 개 정도는 걸 수 있습니다.”
“예술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노래를 잘할 수 있겠어? 너도 그 공연 봤잖아.”
“……리젠도 아셰 왕녀님도 정신을 못 차리더군요. 전하도 포함되는 줄은 몰랐습니다.”
카이든의 말에 다니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그는 스타람에서 최초로 대륙에 망명한 사람이라는 상징성이 있어. 함부로 대한다면 앞으로의 끔찍한 선례가 될걸. 나는 적어도 아메탄 왕국에 꿈과 희망을 품고 찾아온 사람들의 신변 정도는 보호해 주고 싶어.”
“……루벤 왕자님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그는 시야가 넓고 호탕하며 개방적일지는 몰라도, 속이 투명한 사람은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카이든은 다니엘의 스타람에 대한 호의가 루벤에게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2왕자 루벤은 한결같이 스타람 문화에 대해 경외에 가까운 호감을 보였다.
그러나 수사국에 몸담은 카이든의 눈에 스타람 섬의 사람들은 뭔가 음흉하고 미덥지 않았다. 제국에서 주입하다시피 한 ‘스타람은 미개하며 천박하므로 교류할 가치가 없다’ 같은 밑도 끝도 없는 가치관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스타람은 국가 자체에서 밀수를 장려하는 듯했고, 그런 행위는 카이든에게 자본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도덕한 국가관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스타람 섬이 약자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100년 전 일이지요. 우리가 ‘교역을 해 줄까 말까 고민해 주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제국을 삼키려는 놈들이, 아메탄이라고 존중해 주겠습니까. 공화정도 혁명군도 정의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윌리엄 형처럼 무조건 제국의 편을 들 수는 없는 셈 아닌가. 아직은 조금 더 지켜봐도 된다고 생각해. 여하튼 리한 카드민의 혀를 자르는 건 안 된다. 난 제국의 황제와 달라. 이유 없이 사람을 함부로 해치고 싶지 않아.”
선량하고 자비로운 왕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카이든은 조용히 한숨을 쉬고 물러났다.
아셰는 구불거리는 금발 머리를 차분히 빗어 내리며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답다는 얘기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지만, 지금은 살이 조금 올라 드레스를 입을 때 깡말랐던 예전처럼 태가 예쁘지는 않았다. 심지어 운동량이 줄고 햇빛을 충분히 보지 못하여 혈색도 창백했다. 어차피 갇혀 있는 것, 그다지 남들에게 예쁘게 보일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요새는 다시 몸치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단의 기억 속에 자리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의 기억 속에서 그래도 아름답게 남고 싶었다. 아까 잠시 다녀간 다니엘의 말에 따르면 서쪽으로 반란군이 이동하고 있다고 했다. 이단의 말대로, 그와 합류하기 위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임시 총독이자 2황자인 남자는 그 한 달간 매일같이 비밀리에 자신을 만났다. 아마 아무도 알지 못하고, 사실 그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녀는 빗을 내려놓고 창가에 가만히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학자자리가 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데, 책장의 문이 열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검붉은 머리의 청년이 평소와 같이 들어와, 아셰는 싱긋 웃었다.
“목동자리를 보고 있었나?”
“학자자리라니까. 안 그래도 학자자리가 떴기에 곧 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게 뭐든.”
그가 항상 앉던 의자에 앉아 낮게 말했다.
“……그 별들만 보면 이제 네 생각이 나겠지.”
아셰는 차를 우리기 시작하며 대답했다.
“나도 그럴 것 같아. 그 때 보니 제국에서는 학자자리가 더 잘 보이더라고.”
그녀는 꿋꿋하게 ‘학자자리’를 고수하며 말했다. 학문을 중시하는 아메탄에서 학자자리는 나름 의미가 있었다. 학자자리의 별 여덟 개는 여덟 개의 산하기관을 뜻한다고 전해지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동시에 바라볼 수도 있겠다. 나는 학자자리를, 너는 목동자리를.”
“어차피 같은 별이지.”
천천히 우려낸 찻잔을 앞에 두고 그녀는 그와 마주앉았다. 이제 몇 번 남았을까. 세 번? 두 번? 피를 뒤집어쓴 것만 같은 검붉은 머리카락과, 가끔 짐승같이 번득이던 검은 눈, 가무잡잡한 피부와 선이 굵은 옆모습을 이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많이 허전했다. 위압감을 느끼게 하던 그 체중도, 부드럽게 감싸던 체온도, 격정적으로 나누던 정사도 기억 속으로만 간직해야 했다.
“……늦었지만.”
그가 새끼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가 건네는 반지를 받았다. 그녀의 기억에 그의 왼쪽 새끼손가락에 언제나 끼워져 있던, 세심한 세공이 돋보이는 그다지 두껍지 않은 금반지였다.
“생일 선물이야.”
“어? 아니, 괜찮은데…….”
“받아.”
그 반지가 맞는 손가락은 검지밖에 없었다. 그녀는 오른손 검지에 반지를 끼고, 살짝은 감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근데 매일 하고 있는 걸 보면, 중요한 거 아냐?”
그는 그녀의 오른손을 붙잡고 묘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에 자리한 반지를 바라보았다.
“중요한 거야.”
그녀가 움찔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이야. 나머지는 시녀들이 모두 가져가고 없더군. 침대 베개 밑에서 겨우 발견했어.”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