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비록 전쟁통일 테지만 적어도 자유로울 거야.”
“으, 그, 그만…… 그만해. 아아…… 아파, 아파…….”
“말해 줘.”
그녀의 애원을 전혀 듣지 않은 채, 그가 더 거칠게 움직였다. 살이 부딪히는 소리 속에서 그가 그녀의 귀를 깨물며 말했다.
“널 데려가라고. 함께 가자고.”
“아아!”
“말해.”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의 뺨에 입 맞추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이상하게 눈물이 흘러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테이블보를 적시고, 두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찻잔에 남은 찻물이 찰랑찰랑 움직였다. 정적 속에서 그들이 몸을 섞는 소리와 그의 낮은 신음 소리, 그녀의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울렸다. 그녀가 그의 목을 감싸고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자, 그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아셰는 그의 입술에 자신의 혀를 밀어 넣으며 더 세게 그를 안았다. 그녀의 안에서 떨리는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마침내 그가 그녀의 품 안에서 축 늘어졌을 때, 비릿한 정사의 향과 함께 예전과는 다른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한동안 흐르던 정적을 깨고, 그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참을 수가 없어.”
“……뭘?”
“네가 갇혀서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이.”
“왜 그걸 네가 참아?”
“몰라.”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낮에도 생각이 멈추지 않아. 4년 반의 시간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럴 때마다 너를 가지고 싶어. 이게 정상적인 감정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럼 잘 하고 있네.”
그녀가 웃으며 속삭였다.
“참을 수가 없다니까.”
“안 참잖아.”
“참는 거야.”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간 뒤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단이 이렇게 굳은 표정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정사를 치룬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상체가 찢긴 드레스를 살펴보며, 시녀들에게 할 변명을 지어내 보았다. 넘어졌다고 하면 믿을까. 함부로 벗으려다가 망쳤다고 하는 게 더 좋을까.
“……이단.”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착잡한 표정을 하고 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나는 가지 않아.”
“…….”
“그래……. 사실 나는…… 학문이 발달한 아메탄에서 최고급의 교육을 받은 영리한 왕족이지만 공익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국제 정세가 궁금하긴 해도 나의 인생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해. 앞과 뒤는 당연히 다르고, 누군가 나를 해하는 꼴은 보지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삶이야.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녀가 정말로 진심을 내뱉은 것은, 그의 말에서 진심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진심으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면, 그녀 역시 밑바닥까지 보여 주며 거절을 해야 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동등하게 주고받기로 애초에 약속했으니까.
“그래도 나는 아메탄의 왕족이야. 국왕의 명령을 어기고 외국인과 도망가는 불명예를 아메탄 왕가에 남기지 않을 거야.”
“대체 그 아메탄 왕가가 네게 뭘 해 줬지?”
“시녀들이 나를 위해 더운 식사를 가져다주고,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드레스를 가지고 있어. 평민들은 평생 보지도 못할 가수의 공연을 내 궁으로 불러서 볼 수 있고, 노동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잠을 자. 이 모든 것은 내가 왕족의 피를 타고 태어났기 때문이고, 당연히 왕족의 의무를 행할 의무가 있어. 내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가만히만 있지 않듯이, 받은 것에도 정당한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황족의 피를 버리고…….”
“게다가 나는 공화주의자가 아니니까.”
아셰는 부드럽게 말했다.
“다니엘은 훌륭한 국왕이고, 나는 그의 치세를 사랑하고 다독여 줄 거거든. 내게 넘치도록 잘해 주는 혈육이야. 다니엘을 배신하고 네 손을 잡을 이유는 없어.”
“그리고 그 국왕은 4년 반 후 네게 사형을 선고하겠지.”
“죗값이라면 치를 거야.”
“내가 몇 번이고 말했지. 그건 정당하고…….”
“정당함은 왕이 판단하는 거야. 그것도 내가 지지하고 선택한 왕이. 나는 아메탄의 제왕 교육을 받은 왕녀로서…….”
그녀는 맑은 눈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녀에게 애국심은 없어도 자긍심은 있었다. 다니엘은 범죄자인 그녀에게 생일 파티까지 열어 주는 호의를 보였고, 그녀는 그 우애를 저버릴 생각이 없었다.
“그게 내 신념이야. 누구를 따라 도망가는 것은 안 해. 특히나 내가 민폐가 될 것이 뻔한 전쟁터 같은 곳에는 절대 가지 않아.”
그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넌 정말 대단한 여자야.”
“…….”
“안 그러면 내가 이렇게 돌아 버릴 것 같지는 않겠지.”
아셰는 표정의 변화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널 처음 본 순간부터, 겉과 속이 다른 전형적인 왕족 여자애면서도 남의 기분을 상당히 잘 맞춰 주는 영악한 계집애라는 생각을 했지. 그 영악함이 마음에 들어 즐거웠던 건 사실이야. 머리 굴리는 여자애가 나름 귀엽기도 힘들거든.”
그가 화려하게 장식된 천장을 보며, 마치 광인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느새…… 네게 내가 너무 휘둘려. 내 앞에서 그렇게 예쁘게 웃고, 말도 안 되게 황홀한 쾌락을 주지만…… 넌 어차피 끝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는 않겠지.”
“……넌 내 왕이 아니야. 왕이 아닌 사람이 한 사람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어.”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눈이 번득이며 빛났다.
“하긴, 너는 한결같이 나를 한 달간의 밤 선물로 대했는데, 변한 건 나야.”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그가 정말로 공화주의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공화주의자라고 해도 공화국이 이토록 거대한 존재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다수의 지지를 받아 임시 총독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미묘하게 역설적이었다. 이렇게 마주하고 있기만 해도 본능적인 두려움이 느껴지는 상대가 공화국을 이끈다고? 아무리 지도자여도 법을 지켜서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잠자리를 가질 때 무의식적으로 명령형의 어조를 사용하는 이 남자가?
“……내 자신이 형편없군.”
그가 피식 웃으며 얼굴을 쓸었다.
“네 생일을 최악으로 만든 건 아니겠지, 내가.”
“아냐.”
아셰는 부드럽게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눈치 빠르게 그의 표정에서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발견한 그녀는 이대로 그를 좌절 속에 빠트린 채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달래 주기 위해 또다시 진심을 꺼냈다.
“아무리 내가 네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거친 정사로 인해 깔끔하게 틀어 올려 있던 머리카락 몇 올이 그녀의 목선에 구불구불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네가 그렇게 말해 줘서 나는 정말 좋았어.”
그녀의 나긋나긋한 말이 상냥하게 울렸다.
“난 내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을 죽인 게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줘서 좋았고.”
이단의 손에 깍지를 끼며 엉망이 된 옷을 추스르지도 않은 채로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로즈리가 화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로즈리 앞에서 내 편을 들어 줘서 좋았고.”
그녀의 푸른 눈에 상처 입은 짐승같이 앉아 있는 이단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떠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같이 가자고 해 줘서 좋았어.”
그와 시선이 얽혔다. 그들을 감싸고 있는 이 안타깝고도 강한 유대감의 정체는 대체 뭘까. 이제 며칠 있지 않아 영원히 볼 수 없을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끊이지 않는 생각의 까닭은 뭘까. 별다른 감정 없이 몸을 섞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몸을 섞은 순간들보다 이렇게 강렬하게 얽히는 시선들이 더 기억에 남는 걸까. 언젠가 리젠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는 카이든과 하는 것이 좋아요.’
그녀는 남자라고는 이단밖에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그와 함께 몸을 섞고 쾌락에 달뜨는 순간들이 좋았다. 그의 육중한 무게와 체온을 느끼며 그 어떤 행위도 대신할 수 없는 황홀함이 머리끝까지 치밀 때, 이 좋은 것을 모르고 죽었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 쾌락이 전부가 아니라면.
‘이게 사랑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런대로 너무 슬픈 일이었다.
‘THE LOVE. 사랑?’
며칠 전, 헤일리에게서 생일 점을 보며, 그녀는 현재를 말하는 카드로 ‘사랑’을 꺼냈던 것을 떠올렸다.
‘이 사랑 카드는 안정과 신뢰를 뜻하지는 않아요. 불같고, 치열하고, 그러면서도…… 찰나의 화려한 감정을 뜻해요.’
헤일리, 네 카드점이 꽤나 잘 맞는가 보다. 아셰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을 감싸고 있는 이 끈적한 공기가 사랑이라면, 불같고, 치열하고, 그러면서도 찰나의 화려한 감정이었다. 이단은 곧 떠날 테고, 그녀는 이 상황을 그로 인해서 바꾸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단.”
하지만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그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고 속삭였다.
“나는 여기 있을 거야. 하지만 너는 부디 무사히 떠나서, 네 신념을 이루길 바랄게.”
이제 함께 할 수 있는 밤이 다섯 손가락 안쪽으로나 남았을까. 순간적으로 이별이 실감이 나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아마 이 이별이 문득 피부로 다가와서 아까 이단도 광기에 휩싸여 그녀를 억지로 가졌던 걸까.
“첫날, 비밀 통로로 날 보러 와 줘서 고마워. 그거면 됐어.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거야. 앞으로 네가 가는 길에, 나는 잊어도 좋아.”
몸을 섞었기 때문에 느끼는 일시적인 유대감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의 일생에서 이토록 강렬한 기억을 남긴 남자는 없었다. 연회에서 의미 없이 춤을 추고, 무도회장을 빙빙 돌며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남자에게 웃음과 상냥함을 보여 주었지만…… 눈물과 한숨을 보여 준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이미 끊어진 줄 알았던 인연이 이어져 죽기 전에 새로운 감정을 깨우고 가는구나. 잠시 만나 다시는 연결되지 않을 황자라서 첫키스를 나눴다면, 지금 역시도 다시는 연결되지 않을 반란군의 우두머리라서 진심을 숨기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 같은 사람은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에게만 솔직함을 표현할 수 있었으니까.
그녀가 그대로 그의 입술에 깊게 입 맞추며 속삭였다.
“……그동안, 널 정말로 사랑했어.”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