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봉쇄령 전에, 대륙 순회공연도 했었대요. 미리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가 봤을 텐데. 그땐 춤도 췄대요.”
“……세상에.”
리젠은 결혼식 때부터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근질거렸던 말들을 쏟아 내며 속삭이자, 카이든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녀의 팔을 아프게 쥐었다. 리한은 싱긋 웃었는데, 그 웃음이 얼마나 예쁘던지 아셰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리젠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깜빡거리며 숨을 죽였다. 그녀들의 흥분을 눈치챈 다니엘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특별히 부탁했어. 네게 보여 주고 싶어서.”
“고마워, 정말.”
아셰는 넋을 잃고 중얼거렸는데, 그런 시선에 익숙한지 리한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림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림프가 그렇게 풍부하고 영롱한 음을 울릴 수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세련된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는데, 그동안 듣던 음유시인들의 단조로운 노래들과 차원이 달라서 그녀는 또 한 번 놀랐다.
리한은 아메탄 왕국에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생일 축하 노래까지 합쳐 모두 세 곡을 하고 떠났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셰는 거의 몰입해서 그의 노래를 들었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다니. 게다가 음악들도 몹시 세련되어서 그동안 듣던 음유시인들의 단조로운 노래들과 차원이 달랐다. 생각해 보니 아셰는 연회에 가지 않다 보니 음악이라는 걸 들은 것도 퍽 오래되었다.
카이든과 다니엘이 서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눌 동안, 리젠과 아셰는 흥분해서 속삭였다.
“제국에도 팬이 굉장히 많았대요. 아메탄 왕국에 망명할 때 거의 국경이 시장통같이 혼돈이었다는데 이해가 가죠?”
“우리만 모르고 산 거야? 저런 사람이 있다는 걸? 미쳤어, 진짜 너무 잘생겼는데. 게다가 난 저런 노래는 처음 들어.”
“제가 결혼식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겠죠? 그저 그런 축가일 줄 알았는데,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요. 나중에 들었는데, 팬들은 ‘대륙을 홀린 남자’라고 부른대요.”
“그럴 만해. 난 벌써 또 보고 싶은 것 같아. 스타람 사람들은 다 저렇게 잘생겼을까?”
“요새 연회에 종종 불려 다니고 있는데…… 귀족 부인들이 애인으로 삼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대요. 이해가 가지요?”
아셰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단의 말에 따르면 저 남자는 제국의 반란군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있는 사상적 배경,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왕정 국가에 망명하여, 왕녀의 생일 파티에 노래를 불러 주고 지내는 처지가 되다니 너무나 역설적이었다. 그녀가 다니엘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데, 다니엘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카이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기 때문에, 믿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스타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때에 저렇게 유명한 사람이 망명이라니요. 신변 보호는 취소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망명했어.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
“공화정을 전면 부인한 사람이기도 하잖아. 카이든, 리한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징성이 있는 인물이야. 게다가 마법도 못 쓰잖아. 무슨 위협이 되겠어? 그리고 리한의 팬들은 아메탄에도 많아서, 그 파급력이 엄청나.”
“말씀 드렸지만 평범한 예술인 같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이단 황자와의 연관성이 의심되는 이때에…….”
카이든은 말을 잇다가 아셰의 동그란 눈을 보고 그대로 말을 멈추었다. 아셰는 서둘러 레몬 케이크로 시선을 떨구며 잡념을 떨쳐 냈다.
“못 보던 찻잔인데.”
“예쁘지?”
과연 리젠이 준 우르란 꽃잎은 선명한 분홍빛으로 우러나 붉은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찻잔과 잘 어울렸다.
“친구가 준 거야.”
“그 약제국 친구?”
이단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담담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핀도 처음 보네.”
“이건 다니엘이.”
그녀는 풍성한 머리채를 다니엘이 준 핀으로 틀어 올려 고정한 채였다.
“오늘 내 생일이었거든. 그래서 친한 사람들만 모여서 다과를 함께 했어.”
깨끗하게 우려낸 차를 마시며 아셰는 마주 앉아 싱긋 웃었다.
“정말 좋았어.”
그녀의 얼굴에 붉은 생기가 돌고 있는 것을 이단은 놓치지 않은 채, 천천히 차의 향을 음미했다. 아셰는 꿈을 꾸듯이 말을 이었다.
“오늘따라 햇살은 밝게 빛나고, 정원에 튤립도 한가득 피었지 뭐야. 바람도 딱 살랑살랑해서 기분이 좋고, 오랜만에 정원에서 커피와 다과를 하니 정말 좋았어. 아, 제국에도 커피가 있나? 커피는 처음엔 평민들만 마시던 음료인데, 맛이 좋아 지금은 전 국민이 즐기고 있어.”
이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잔디의 초록빛도 예쁘고, 친구들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하는 것도 좋았어. 게다가 다니엘이 유명한 가수도 초청했어. 잘생긴데다가 노래를 정말 잘하더라. 눈을 뗄 수가 없었어. 아, 천천히 흘러가던 뭉게구름 하나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녀는 조잘조잘 떠들다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이단의 시선이 뜨거워서 문득 흠칫 놀랐다. 벌써 나를 원하고 있나? 하지만 그런 욕망에 달뜬 눈빛은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그 묘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지만, 뚫어져라 보는 시선은 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아셰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지? 오늘 너무 신나서…….”
“……생일인 걸 몰랐네. 미리 말해 줬다면 이렇게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텐데.”
“무슨 소리야!”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난 사실 이렇게…… 기뻐할 처지는 못 돼. 나 때문에 윌리엄은 차가운 지하에 묻혀 있고, 로즈리는 남편을 잃었고, 지젤은 아빠가 없어. 그 생각을 하면 이렇게 웃고 있는 것마저 미안한데, 정말 끔찍하게도…….”
아셰는 시무룩하게 말을 이었다.
“……그 사실을 문득문득, 아니 꽤 자주 잊지 뭐야……. 그럴 때면 나 자신이 너무 잔인해.”
“난 서른 명을 넘게 죽였는데, 그럼 웃지도 말아야 하나.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이야.”
이단은 냉정하게 말했다.
“평화롭기 그지없게 살아가는, 사람을 죽일 일조차 없는 네 평민 친구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우린 살고 있는 세상이 달라. 오히려 나는…….”
그가 짧게 숨을 끊어 쉬고, 다소 속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몇 안 되는 친구들과 다과를 먹고 가수의 노래를 들었다고 이렇게 기뻐하면서 밤까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네 모습이 속상한데.”
“어?”
“생일 연회도 못 열고, 고작 매일 여기서 보이는 작은 정원에서 평소와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고 슬퍼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야.”
아셰는 이단의 말에, 가만히 생각에 잠겨 차를 마셨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내게 남은 시간은 4년 반,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 같은 건 없어. 최대한 감사하고, 작은 새로움에도 기쁨을 느끼며, 모든 순간을 즐겁게 살 거야. 살이 좀 찌더라도 맛있는 것을 실컷 먹고, 나가지 못해도 답답해하지 않고, 밤새 잠이 안 오면 낮에라도 자고, 곧 떠날 너라도 오늘 밤 최선을 다해 안을 거야.”
“…….”
“네 말대로…….”
이단의 시선 때문에 그녀는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왜 저 남자는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걸까. 꼭, 마치…… 새삼스럽게 내게 반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그의 표정은 사랑에 빠졌다기보다는 꼭 무언가를 참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오라비를 죽이지 않고 제국에 갔다면 난 이미 죽었을 수도 있잖아? 내게는 선물 같은 시간들이야. 우연은 또 너를 이렇게 밤마다 선물로 주었잖아. 이 정도면, 나는 세상의 쾌락을 꽤 많이 맛보다 가는 것 아냐?”
그가 벌떡 일어나 그녀의 목을 잡고 그대로 입을 맞춰 왔다. 평소보다 훨씬 더 거친 손길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숨이 막혀서 그녀가 캑캑거리며 그의 가슴을 밀어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그녀의 뒷머리를 꽉 잡은 손이 한동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난 곧 떠나지만.”
이단은 그녀의 입술에 대고 낮게 말했다. 아셰는 의자에 앉은 채였는데, 그의 커다란 몸집이 시야를 가득 채워 마치 갇힌 것 같았다.
“네가 정말로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말할 때마다…….”
아셰는 숨을 죽이고 그의 새까만 눈을 바라보았다.
“……아메탄 왕궁을 모조리 부수고 네 손을 끌어 이 빌어먹을 작은 궁을 나가고 싶어.”
“이, 이단?”
“처음이야. 내가 정말로 황제를 닮았다고 생각한 건.”
그의 속삭임에 그녀는 등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 광기가 비칠 때마다 사실 아셰는 속으로 몰래 황제를 닮은 표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을 아프게 쥐고 있는 그의 서늘한 표정에 순간 위압감이 들어 옷자락을 꼭 잡았다.
“정말 위험할 테지만…….”
그가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꾹 누르며 말했다.
“……나랑 같이 갈래?”
그녀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이런 대화의 흐름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파란 하늘, 뭉게구름, 햇빛을 받아 빛나는 꽃, 살랑살랑 부는 바람은 제국에도 있어.”
그가 그대로 그녀의 겨드랑이를 올려 일으켜 세운 뒤, 테이블에 그대로 눕혔다. 등이 배겼지만 찻잔을 깨트릴까 봐 그녀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 어떤 전희도 없이 그가 성기를 꺼내 그대로 그녀의 치마 안에 밀어 넣었다.
“……아, 아읏!”
“난 황궁에서도 탈출했어.”
“아, 아파…….”
“너 하나 데리고 나가는 건 일도 아니야.”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려다가, 한숨을 쉬고 다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허리가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이미 그녀의 몸을 파악한 그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여성도 촉촉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가. 내가 매일같이…… 네가 그런 표정으로 웃을 수 있게 해 줄게. 전쟁이 무서우면 제국의 가장 안전한 곳에 숨어 있으면 돼. 갇혀 있는 여기보단 나을걸.”
“……아, 아아…….”
그의 손이 거칠게 드레스를 찢고 그녀의 가슴을 꽉 쥐었다. 이상하게 아릿한 통증이 그만큼의 흥분이 되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