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이야기는 다음 날 밤, 정사가 끝난 후에 이어졌다. 몸을 섞은 지 세 번째 밤이 되니 더 이상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고, 아릿하면서도 이상한 쾌감이 느껴졌다. 이단이 다른 자세를 취할 때마다 몸 안에서 새로운 감각이 느껴져 움찔움찔할 정도였다.
“그런데 거의 매일, 정확한 시간에 오는 것 같아.”
아셰는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쓸며 말했다. 그가 대답했다.
“맨 처음 네 궁에 올 때, 목동자리가 뜨는 시간에 왔거든. 그 때 오라는 기억이 나서, 목동자리가 뜨는 걸 보고 오지.”
“학자자리라고 부른다니까.”
“그게 뭐든.”
그는 뭐가 대수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별은 그냥 제자리에 있을 뿐이라니까. 제국에서도, 아메탄에서도 똑같이 보이잖아. 목동자리든, 학자자리든, 이단자리든 결국 그 자리는 그 자리야.”
아셰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제국의 황자이면서도 와인을 나무 컵에다가 따라 마시기도 하고, 심지어는 찻잔에도 따르던 그는 아마 아셰가 뭐라고 하든 ‘결국 와인은 와인이잖아’라고 할 것이 뻔했다.
“어쨌든 그 별들은 좋겠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그 자리가 그 자리라니, 나도 내 자리만 하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눈앞의 이 남자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회의장에서의 공손한 태도를 보면 만들어진 온화함이 가득 느껴졌지만, 로즈리에게 날을 세웠을 때를 보면 눈빛 하나로도 상대를 소름 돋게 하는 위압감이 있었다. 열다섯 소년이었을 때부터 남들과 다른 능력을 가진 데에서 오는 특유의 오만함이 보였고, 가끔 그가 그녀의 위에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허리를 흔들 때면 이상하게 광기 어렸던 황제의 얼굴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일단 정사가 시작되면 아셰가 그만하라고 하거나 부끄러움에 특정 체위를 거부해도 절대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정사가 끝난 후 그녀에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해 줄 때면 누구보다도 다정했다.
“오늘도 좋았지?”
그녀가 눈을 반달로 만들며 그의 목을 감쌌다. 이단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이 여우야.”
“좋았잖아, 그렇지?”
“그래서…… 어제 이야기를 이어 가 볼까. 내 얘기가 나오겠군.”
그녀는 그의 체온을 느끼며 몸을 밀착했다.
“아메탄 왕국은 계속해서 평화를 누려 왔기 때문에 스타람의 공화정에 큰 타격을 입지 않았지만, 제국은 좀 달랐어. 황제는 폭정을 일삼았고, 국고는 사치와 향락으로 매일같이 적자였고, 그것은 세금으로 메우고, 흉년이 거듭되며 평민들은 굶어 죽었지. 마력이 예전 같지 않으니 황제는 이제 비를 내려 줄 수도 없고 땅을 비옥하게 해 줄 수도 없었어. 일부는 할 수 있더라도, 그 넓은 땅은 다 안 되지.”
“게다가 그럴 사람도 아니잖아.”
“그건 그래.”
제국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단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우리는 아무도, 그 누구도 그러면 안 된다는 소리를 할 수 없었어. 충언을 하면 그 자리에서 목이 그어져 죽었으니까. 황궁엔 황제가 불안해서 불러들인 호위 무사들이 가득하고, 지방의 군대는 점차 비어 갔지. 당연히 폭동이 일어나고, 그 숫자는 점점 더 커지는 와중에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이 들어온 거야.”
“어떻게? 봉쇄령을 내렸는데!”
“밀수꾼들은 못하는 게 없거든. 아마 아메탄에도 들어왔을 거야. 다만 아메탄 사람들은 그런 책을 안 읽어도 잘 먹고 잘살았기 때문에 관심이 없는 거고. 하지만 제국은 좀 달랐어. 몇 권의 책은 순식간에 사본이 생기고,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혁명군을 형성하게 되더군. 사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그 책을 읽었고 그러다 보니 혁명군과 깊게 얽히게 되고 하다가…… 나도 그때 감화됐지.”
“…….”
알고 있었지만, 아셰는 그가 공화주의자라는 말에 새삼 묘한 기분이 들었다. 1황자가 아니기 때문에 일으킨 반란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제국을 무너트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가 공화정에 대한 반박을 하려는데 그가 차분히 말했다.
“이브나 왕비 얘기를 하려나 본데, 카를 왕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대로 묻혔을 거야. 뛰어난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해. 그리고 그 뛰어난 사람들은 다수가 알아볼 가능성이 높지. 적어도 핏줄을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황제가 되는 것보다는 정당성이 있어.”
“하지만 카를 왕이……!”
“돌고 도는 얘기는 지금 하지 말자. 어쨌든, 황제 한 사람 때문에 이 모든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야. 앞으로도 이런 폭정을 막으려면 정치 체계를 바꿔야 해. 황제만 죽여서 될 일은 아냐. 이게 내가 혁명군에 들어간 이유야. 내가 임시 총독이 된 건 내 혈통 때문이 아니고…… 혁명군의 바닥에서부터 함께 하면서 다수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이지.”
이단은 어렸을 때부터 제국을 떠돌며 여행을 다녔다고 했다. 루벤 역시 어릴 때부터 툭하면 밖으로 나다녔기 때문에 그녀는 둘째 아들들은 다 저렇게 궁에 못 붙어 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나 싶었다. 이단이야 친모가 황제의 손에 살해되었으니 더더욱 궁에 정을 붙이지 못했을 수도 있고, 자신의 말로는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그 황궁 특유의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고 했다. 그래서 혁명군에 가담했다니, 참 특이한 일이었다.
“임시 총독이야?”
“어. 아직은 아니지만, 내가 혁명군에 가담하면 그렇게 될 거야.”
“황제랑 뭐가 달라? 정확히 공화정이라는 게 뭔데?”
“사람마다 그리고 있는 정확한 공화정의 모습은 다 다르겠지만…… 일단은 만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 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위에 있다는 것이 왕국과 가장 큰 차이점이겠지.”
아셰는 눈을 깜빡였다. 법이 모든 사람의 위에 있다고……. 아메탄 왕국에도 법은 있고, 그 법을 다루는 법무국이라는 산하기관도 있지만 그래도 법은 최소한의 규제일 뿐이고 왕명이 절대적이었다.
“내가 임시 총독이어도, 심지어는 혁명이 성공하여 통령에 올라도…… 내 멋대로 할 수 없어. 법에 따라 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하고, 이유 없이 남의 삶에 개입하면 안 돼. 황제처럼 맘대로 아무나 죽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국가의 모든 일도 회의를 거쳐서 정하고.”
왕권이 제국처럼 강하지 않은 아메탄에서는 이미 일정 부분 이루어지고 있는 형태였다. 이단이 왜 각자 그리고 있는 공화정의 모습이 다 다르다고 했는지 막연히 알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는 공화정부를 발표하고, 본격적인 지지 성명을 모아 대대적인 공격에 들어가려고 해.”
“군사 기밀인데 나한테 막 알려 줘도 돼?”
“숨길 생각은 없어. 아메탄은 날 보호해 주고 있으니까. 대외적으로는 여행 중이었던 내가 그대로 혁명군을 이끌지 않고 황궁에 들어간 건…….”
그는 한숨을 쉬었다.
“……황궁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니까, 암살 시도라도 한번 해 보고 싶어서였어. 황제가 마력을 움직이는 건 예전 같지는 않아도 굉장히 막강한 힘이니까. 그런데 실패했지. 늙은이가 바로 기척을 알아채더군. 그리고…….”
그가 자신의 셔츠 단추를 두 개 풀었다. 그녀는 한 번도 그의 알몸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셔츠 단추를 더 풀기 시작하다가 놀라서 숨을 삼켰다. 거대한 흉터가 그의 가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죽을 뻔했지 뭐야.”
이단이 키득거리고 웃었다.
“등 뒤는 더 심해. 살아 도망친 게 기적이지.”
그녀가 그의 셔츠를 벗기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보지 마. 흉해.”
“보고 싶어.”
그는 순순히 몸에 힘을 뺐고, 그녀는 드디어 그의 상체를 볼 수 있었다. 가슴의 큰 흉터뿐만이 아니었다. 등은 거의 난도질되다시피 했으며, 허리까지 자잘한 상처가 이어졌다. 근육질의 탄탄한 구릿빛 몸에 이토록 많은 상처가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녀가 그의 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대체 왜…….”
그가 그녀의 푸른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넌 황자로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는데…….”
“혁명군 백 명에게 물어봐. 다 똑같은 대답일 거야.”
그녀의 눈에 눈물이 살짝 고인 것을 핥아 주며 그가 속삭였다.
“신념 때문에.”
“너도…… 공화주의자야?”
“기본적으로. 하지만…….”
그의 눈에 쓸쓸함이 언뜻 스쳤다.
“……난 엔리히 황조의 역사에 대한 사명이 더 큰 것 같아.”
“응?”
“엔리히 황조의 최초 정당성은 힘에서부터 나와. 그런데 그 힘이 사라지고 있어. 시작을 잃었다는 건 끝이 다가왔다는 뜻이지.”
“무슨 말이야?”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 줄게.”
며칠 후, 리젠과 카이든의 결혼식이 있었다. 아셰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가장 아름다운 보석을 선물로 주었고, 리젠은 그녀 앞에서 또 눈물을 보였다. 행복하기 미안하다는 그녀의 말에 아셰는 진심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날 결혼식이 끝나고 찾아온 다니엘은 궁금했을 그녀를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결혼식 축가를 부른 리한 카드민이라는 가수에 대해서였다. 스타람 섬에서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 국경을 넘어 망명해 왔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때 구름떼같이 몰린 사람들 때문에 혼란이 벌어진 틈을 타 이단이 아메탄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기가 막히더군.”
다니엘은 아직도 여운이 남는지 감탄하며 말했다.
“림프(악기 중 하나)로 그렇게 풍부한 음을 낼 줄도 몰랐고, 목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을 줄도 몰랐어. 음률도 훌륭하고 성량도 대단해서, 신부마저도 넋을 놓고 보던데.”
“그랬어?”
리젠이 카이든에게 듣고 나서 전한 말에 따르면 리한 카드민은 스타람 섬의 공화정이 싫다며, 왕정 국가로 넘어온 전무후무한 사람이었다. 굉장히 유명한 아이돌 가수의 리더였고, 봉쇄령이 내리기 전까지는 대륙에서 순회공연을 할 정도로 인기가 상당했단다. 아셰는 리한 카드민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타르안’이라는 그룹 이름은 알았는데, 대학에 다닐 때에 여전히 타르안을 좋아하는 여학생들을 드물게 보았기 때문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