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전하는 가끔 찾아오시나요?”
리젠은 가는 눈을 뜨고 아셰의 응접실에 위치한 책장을 바라보았다. 리젠은 다니엘이 3왕자궁에 있을 때, 3왕자궁과 아셰의 궁을 연결하던 비밀 통로를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예전에 다니엘이 리젠에게 마음이 있을 때, 그 길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아마 놀라서 동그래진 리젠의 갈색 눈을 보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아, 이제 왕자궁이 아니시니까 저 길로 못 들어오시나?”
“다르게 연결된 길이 있어. 어쨌든 이 궁에 들어오는 길은 저 서재를 통해야 하니 중간에 연결되긴 하지만. 그럭저럭 자주 오는 편이지. 나는 밖에 나가지 못하니까.”
리젠이 턱을 괴고 살짝 한숨을 쉬었다. 왠지 쓸쓸해 보이는 리젠의 얼굴을 보면서 아셰는 혼자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예전 생각이 나서 아쉽네요. 3왕자궁이 지금처럼 비어 있지 않고…….”
사실 3왕자궁은 비어 있지 않아. 몸이 단단하고, 눈매가 깊고, 카이든만큼이나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한 남자가 비밀리에 거처하고 있어.
“이제는 아무도 걷지 않을, 그 구불구불한 비밀 미로를 우리가 다닐 때에는…….”
바로 그 길을 통해 거의 매일 밤, 누군가가 나의 궁에 오고 있어.
“정말로…… 왕녀님이 이렇게 무료하게 지내게 될 줄 생각도 못했는데…….”
그리고 그 남자 때문에, 나는 그렇게 무료하지는 않아.
밤이 되어, 리젠이 쓸쓸하게 바라본 서재의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온 이단은 부드러운 실크 원피스를 입은 채 기다리고 있는 아셰를 보며 순간 멈칫했다. 어제의 단추가 많고 벗기는 법이 너무 복잡했던 실내복과는 다른 차림이었다. 부드러운 실크 사이로 희고 부드러운 아셰의 살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오늘 약제국에서 친구가 왔었어.”
그녀가 찻잎을 꺼내며 말했다.
“선물로 히비라스 꽃을 갖고 왔지 뭐야. 굉장히 귀한 건데, 차에 섞어 마시면 향이 좋을뿐더러 약간의 각성 효과도 있거든.”
“약제국이라면, 아메탄 고유의 기관이라는 산하기관? 우수한 평민들을 뽑아 연구를 시킨다고 들었는데.”
“연구뿐만이 아니라 온갖 행정 업무, 기록, 재정 관리, 교육과 건강 등등을 담당하지.”
아셰는 차를 정성 들여 우리며 말을 이었다.
“왕족들은 귀족들과 함께 정치를 하지만, 산하기관의 이해와 관리를 위해 평민들과 함께 학교를 다녀. 그래서 약제국에 친구가 있는 거야.”
과연 히비라스 꽃잎을 넣어서 그런지 그윽한 차 향기가 아셰의 작은 응접실에 퍼졌다. 옆으로 살짝 묶어 늘어트린 머리카락과, 흐느적거리는 실크 원피스가 퇴폐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녀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선반 위에 있던 찻잔을 꺼내는 데에도 이단의 시선이 따라왔다.
“그 친구가 곧 결혼식을 올리는데…… 난 갈 수가 없네.”
“아쉬워?”
“아쉽지. 내 결혼식도 못 올리는데, 친구 결혼식 정도는 보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겠어?”
그는 아셰가 내민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작게 탄성을 뱉은 뒤 다시 한 번 마셨다. 그녀가 그의 얼굴에 떠오른 만족감을 보면서 환히 웃었다.
“내 친구가 예전에 그런 말을 했어. 제국의 황제와 결혼을 하게 되면 이토록 차를 잘 우리니 궁에 황제 폐하가 자주 오실 테고, 그렇게 총애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제국의 황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애니까 할 수 있었던 말이었지만.”
“내가 말하지 않았나. 황제는 남이 주는 것은 절대 마시지 않아. 네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단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나서 피식 웃었다. 아셰는 웃음기 없는 그의 눈에서 예전에 보았던 광기 어린 황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넌 아마 열 명의 호위 무사가 지켜보는 앞에서 마약에 취한 황제에게 짐승처럼 범해지고 그대로 내팽개쳐졌을 거야. 만일 흐느끼기라도 했다면 뺨을 두어 대 맞았을 수도 있겠지. 몇 번 더 반항했다가는 입속에 마약이 쑤셔 넣어질 테고, 그럼 네 영리한 머리도 더 이상 돌아가지 않을걸.”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아셰의 굳어진 표정을 보고 이단은 괜한 말을 했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지만 그만큼 사실일 것 같은 이야기였다. 아셰가 다소 떨리는 손으로 차를 마시자 이단은 화제를 돌리고 싶었는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꿈꾸는 결혼식이 있었을까.”
“뭐, 예전에 말한 내가 원하던 결혼 상대와 맞닿아 있는 이야기지만…….”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별달리 화려하지 않고 조촐할수록 내가 원하던 상대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형식이나 장소에는 전혀 아무런 바람이 없었어. 다만, 그냥…….”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본 일이 없었는데, 막상 예전의 부질없던 상상을 떠올리니 왠지 마음이 아릿해졌다.
“나의 딸이나, 아니면 내 아들의 여자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시어머니에게 패물 하나를 받았으면 했어. 왜냐하면 나의 어머니는 내게 실가락지 하나도 주지 않았거든. 나는 언제나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았고, 아메탄 왕가의 역사는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했어. 대를 이어 오는 무언가가 있으면 나도 조금 더 소속감이 생기지 않을까……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예전에는 했었네.”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초야가 로맨틱했으면 했어. 아메탄 왕국에서는 보통 신혼여행을 떠나는데, 따뜻한 봄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푸릇한 들꽃 향이 코끝에 맴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벌써 비워진 이단의 찻잔을 보고 그녀가 조금 더 찻잎을 꺼내기 위해 일어섰다. 선반은 이단의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테이블을 돌아 조금 더 그에게 가까이 가야 했다. 그의 숨이 잠시 멈춘 것을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다른 찻잎을 꺼내고 싶어서 선반을 향해 까치발을 들었는데, 한 손을 높게 뻗어 올리니 무릎께로 오던 실크 원피스가 허벅지를 타고 올라갔다. 내일 시녀를 시켜 찻잎 배치를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허리를 그가 순식간에 잡아챘다.
“어머!”
눈이 커져서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입을 이단의 다른 손이 막았다.
“방음 마법을 아직 안 쳤어. 소리 지르지 마.”
그녀는 그대로 앉은 그의 무릎에 포개어 걸터앉은 자세가 되었다. 그녀의 허벅지 아래로 단단히 커진 그의 남성이 느껴졌다. 어제의 정사가 생각나 붉어진 그녀의 귀를 입술로 물며 그가 속삭였다.
“이렇게 입고 있으면…… 아무리 차가 맛있어도 더 마시고 싶지 않아. 다른 생각만 들거든. 왜 이런 옷을 입고 있는 거야?”
“……어제, 불편해 보이는 것 같아서.”
그의 묘한 표정을 보고 아셰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어릴 때, 우리 엄마는 내가 눈치가 너무 빨라 여우같은 계집애라며 욕을 하곤 했어.”
그가 바로 입을 맞춰 와서, 아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두 손이 자신도 모르게 의자의 팔걸이를 꽉 잡았다. 그의 한쪽 손은 실크 원피스 위로 가슴을 애무하고, 한쪽 손은 원피스를 들어 올려 흰 허벅지를 모두 드러냈다. 그녀는 이런 관계를 먼저 요구한 주제에 부끄럽다 말할 수 없어 눈을 꼭 감았다.
그녀의 입술에 대고 그가 낮게 말했다.
“벌려.”
“……어?”
“다리.”
그는 제 다리로 그녀의 다리를 각각 고정하고 힘들이지 않은 채 그대로 벌렸다.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의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속옷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그녀를 보고 씩 웃었다. 그녀는 속옷을 안 입고 있었던 것은 더 편리한 정사를 위한 그녀의 선택인데도 불구하고 왠지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그녀의 여성을 만지던 그가 애액으로 촉촉해진 손가락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벌써 이렇게 젖었어.”
“보여 주지 마. 부끄럽단 말이야.”
“……혹시 보자마자 하고 싶었어?”
“뭐?”
“난 그랬거든.”
“아!”
그가 다시 손가락을 그녀의 다리 사이로 넣어, 가장 민감한 부분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한쪽 가슴은 터질 듯이 유린당하는 채로, 아래에서 느껴지는 쾌락이 너무나 커서 저절로 몸이 들썩거렸다. 그녀가 참을 수 없어 소리를 지르려는데 그의 입술이 억지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여긴 방음 마법이 약해. 소리 지르면 안 돼.”
“아…… 아으…….”
닫힌 문 밖에는 시녀들이 지키고 있다. 오늘 밤은 제니가 궁 입구를 지키는 당직 근무라고 알고 있었다. 벽 하나를 두고 꾸벅꾸벅 졸고 있을 제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이상한 스릴이 느껴졌다.
아래에서 강하게 민감한 돌기를 누르는 손가락 때문에 쾌감으로 그녀의 몸이 뻣뻣해지기 시작하자, 그가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테이블에 앉혔다. 그녀의 두 다리를 의자 팔걸이에 올려놓으니, 아셰는 자세를 버티기 위해 테이블의 양쪽 끝을 손으로 잡아야만 했다. 그녀의 벌려진 다리 사이로 그가 입술을 가져다 댔다.
“안 돼!”
아셰는 기겁을 하며 속삭였지만 그의 입술은 그녀의 여성에 조심스럽게 입 맞추고, 부드럽게 핥기 시작했다. 아까와 다른 부드럽고 축축한 느낌과, 혀의 간질간질한 감촉에 그녀는 팔이 다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로 처음 느껴 보는 쾌감이었기 때문에, 그 와중에도 그녀는 이런 생전 새로운 기분을 모르고 죽었다면 정말 억울할 뻔했다고 생각했다. 척추를 타고 짜릿한 감각이 올라와 머리를 울렸다. 그녀의 다리가 축 늘어지며 찻잔 하나가 굴러떨어져 쨍그랑 하는 소리를 냈다.
“왕녀님!”
“괘, 괜찮아!”
제니의 발소리가 들리자 아셰의 심장이 툭 내려앉았다. 그녀가 이단의 팔을 잡고 소리 질렀다.
“안 깨졌어. 안 들어와도 돼!”
그녀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 사이에도 이단은 멈추지 않고 그녀의 음부를 소중히 핥았고, 이미 남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질에 손가락을 넣어 부드럽게 자극했다.
소리를 지를 수 있었다면 이미 질렀겠지만, 입술을 꼭 깨물고 버티자 호흡이 가빠졌다. 그녀가 마침내 크게 터져 온 환희에 으윽, 하는 신음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그가 그녀를 그대로 들어 침대에 눕혔다.
“……어제보다는 괜찮을 거야.”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바지를 벗었다. 어제는 자신의 치마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그의 남성을 보고 아셰가 숨을 들이켰다. 저렇게 커다란 것이 내 안으로 들어왔으니 당연히 그토록 몸이 갈라지는 것처럼 아팠을 수밖에 없었겠구나. 그녀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그의 것이 그녀의 질 속에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제처럼 커다란 통증은 없었다. 적어도 입술을 깨물고 소리를 내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아직은 아릿했지만 그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