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78/256)

  

19화.

“일반인은…… 나를 포함해서, 민감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겨우 그 흐름이나, 그냥 마력의 많고 적음 정도만 느낄 뿐이야. 넌 그런데 그 흐름이 다 보이고, 심지어는 조종할 수도 있다는 뜻이지?”

이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셰는 마른침을 삼켰다. 천 년을 이어 온 권력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신의 후손이어도 그렇지, 너무 엄청난 능력 아닌가. 그리고 그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자신의 여자를 연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베던 황제가 떠올랐다. 그토록 막강한 능력이 있으니 평범한 인간들이 얼마나 하찮아 보일까.

“예를 들어 넌 모르겠지만, 아메탄 왕궁은 엄청난 고대의 마법이 둘러싸고 있어.”

“알아!”

아셰가 새초롬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다시 걸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여러 가지 마법이 걸려 있잖아. 우리 아메탄의 역사에서도 엄청난 천재가 있었단 말이야. 비록…… 평민 출신의 여자였지만.”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종알거렸다.

“우리 아메탄 왕국 산하기관의 초석을 만들었다고 평가되는 행정국장, 이브나 왕비는 스스로가 천재 마법사였다고 해. 그래서 몇 겹이나 왕궁과 산하기관 각각에 맞는 엄청난 마법을 씌웠대. 나는 이브나 왕비도 대단하지만, 평민 여자의 말을 들어 주고 끝끝내 왕비 자리에 앉힌 카를 왕도 대단하다고 생각해.”

“나는 아메탄 역사는 잘 모르지만, 이 왕궁이 대단한 고대 마법을 품고 있는 건 느낄 수 있어. 넌 모르겠지만, 너희 왕궁은 수도 아메니티의 모든 마력을 모아 모든 곳에 균일하도록 고루고루 흩뿌리고 있어. 이런 방식은 우리 황궁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단의 말에 아셰는 뿌듯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아메니티의 전제 마력이 왕궁에 의존하고 있다고 봐도 되지.”

그녀는 잠시 스친 불안한 예감에 속삭였다.

“그럼 우리도…… 황제의 눈에 거슬리면, 스타람 섬처럼 마력을 뺏길 수도 있을까?”

“그건 100년 전 이야기지. 이제는 황제도 그런 건 불가능해. 뭐, 며칠간이라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해 볼 수는 있겠지만 쉽지는 않을걸. 게다가 말했잖아. 아메니티의 마력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왕궁에서 분수처럼 흩뿌리고 있어. 왕궁을 직접 건드리지 않는 이상 힘들걸. 그러니…….”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고 드러난 어깨에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날 데리고 있는 걸 들키더라도, 그런 저주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아…….”

“……왜 그래?”

“잘 자. 가야겠다.”

이단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 바람에 표정을 확인하지 못한 아셰가 의아한 듯 물었다.

“응?”

“이대로 있으면 몇 번 더…… 하고 싶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러면 오늘은 네가 아플 거야.”

이야기를 듣느라 잠시 정사를 잊고 있던 아셰의 얼굴이 붉어졌다.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없으세요? 제니를 부를까요?”

“고기 종류라면 아무 거나 상관없어. 신선한 샐러드도 좀 먹고 싶고.”

다음 날 아침, 꽤 늦게 일어난 아셰는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려서 오전 내내 힘없이 의자에 기대 앉아 있었다. 시녀인 헤일리가 침구를 정리한 뒤 아무 말 없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찻잔을 치웠다. 두 개의 찻잔을 보니 어제의 기억이 또 새롭게 올라와 귀 끝이 붉어졌다. 그의 거친 손이 어제 그녀의 가슴을 쓸었고, 또 있는지도 몰랐던 가장 은밀한 부위를……. 그녀는 문득 찻잔을 치우던 헤일리에게 물었다.

“헤일리.”

“네.”

“헤일리는 궁 밖에 애인이 있지?”

“……네.”

시녀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자, 그녀가 턱을 괴고 웃었다.

“뭐 하는 사람이야?”

“목수예요.”

“자랑 하나만 해 봐.”

“힘이 좋죠.”

헤일리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웃었다. 아셰는 멍한 눈으로 성의 없게 말했다.

“목수니까 힘이 좋겠지?”

그녀의 당연하다는 말에, 시트를 가지러 온 제니가 깔깔거리며 끼어들었다.

“에이, 왕녀님, 그 뜻이 아니고요. 헤일리 애인은 하룻밤에 네 번도 했대요!”

아셰의 눈이 동그래지면서 귀 끝이 붉어졌다. 제니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머, 왕녀님 알아들으셨구나.”

그래서 어젯밤에 이단도 한 번 더 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구나. 그래도 한 번 경험했다고, 아셰는 이제 이런 대화가 전혀 추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럼…… 아프지 않아?”

“가끔은 아프죠. 그래도 익숙해지면 좋아져요. 자세를 다양하게 하면 더 즐겁고……. 어머, 왕녀님, 제가 너무 천박한 이야기를 했죠?”

“아, 아냐.”

아셰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녀들은 이 궁에 다니엘이 아닌 남자가 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하긴, 시녀들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모를 테지. 그러나 제 발 저리는 느낌으로 아셰는 대화를 멈추고, 새롭게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 날 오후엔 왕궁과 가까운 산하기관, 약제국에 근무하는 리젠이 찾아왔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로서 약초학 책과 더불어 또 다른 붉은 표지의 책을 가져온 그녀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조심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왕녀님.”

“어?”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리젠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저…… 저희 결혼식에는…… 오실 수 있으세요?”

아셰는 싱긋 웃었지만 아무래도 기운이 빠진 내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일전에 리젠이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내민 적이 있었다. 평민 출신의 수재, 리젠 하카트는 그녀의 고모 르엘라 하카트와 외모로는 딱히 닮은 구석이 없었지만 내면은 빼다 박은 것처럼 유사했다. 엘리트 평민들이 국가 발전을 위해 열심히 연구하는 산하기관인 약제국에 근무하고 있다는 것도 똑같았다.

“아…….”

그녀의 남편 될 사람, 카이든 루스는 지방 귀족 출신이지만 산하기관에 근무 중이었다. 어차피 산하기관 직원이 되면 영지가 없어도 귀족에 준하는 신분을 보장 받는다. 카이든은 산하기관 중 왕의 직속기관이자 거의 대다수의 권력을 가지는 수사국에 근무 중이었다.

수사국 직원들은 왕국의 온갖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하지만…… 이단이 자신의 처소에 들고 있다는 것까지는 모를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그녀는 상황에 맞지 않게 이상한 뿌듯함마저 들었다.

“……다니엘에게 말해 보았지만.”

아셰는 서운한 듯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말했다.

“결혼식에는…… 못 갈 것 같아.”

리젠의 갈색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테이블에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죄송해요, 왕녀님.”

아셰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게…… 잘해 주셨는데……. 정말로…… 죄송해요.”

“리젠.”

남들 앞에서 윌리엄이 죽은 이유를 밝혀낸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는 결국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동안 찾아올 때마다 늘 밝고 명랑한 척했지만, 사실은 이것이 그녀의 진심이었다. 아셰는 일말의 표정의 동요도 없이 말을 이었다.

“다시 돌아가도 넌 그렇게 할 거잖아.”

“…….”

“네가 믿고 있는 것이 정의, 객관성, 그리고 진실이라면…… 그 믿음이 맞다면,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결정을 할 거잖아.”

리젠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그러면 미안해하지 마.”

“…….”

“나도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할 거라서 윌리엄에게 미안하지 않아.”

아셰는 리젠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어차피 그녀들의 사이는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아무리 예전처럼 허물없이 친한 사이로 돌아가고 싶어도, 리젠에게는 죄책감이, 아셰에게는 삶에 대한 자포자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명확한 역경을 극복하는 건 어쩌면 쉬운 일이야……. 소중한 것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진정한 어려움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난 우정보다 진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네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어. 존중하기도 하고.”

리젠은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고작 이런 것, 무료하지 않게 책이나 갖다 드리고, 시간 될 때마다 자주 찾아뵙는 것밖에 없어서…… 그것은 미안해해도 되나요?”

아셰는 리젠을 싫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유일한 아셰의 친구였고, 영리하고 당찬데다가, 밝고 명랑하면서도 주관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를 생각하는 진심이 느껴질 정도로 곧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예전에는 다니엘도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가 다니엘의 비가 되어 가족이 되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4년 반 남은 인생에서 그렇게 아쉽지는 않았다.

“리젠, 카이든과 행복해.”

리젠의 눈물을 닦아 주며 아셰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한때는 다니엘과 연결해 주기 위하여 리젠의 죄책감을 이용해 곁에 있어 달라 부탁도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리젠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녀의 진심이었다.

“왕비 자리를 걷어차고 간 보람은 있어야지. 수사국 남자니까 왕국의 온갖 비밀은 다 알고 있을 테고, 그러니 너를 지켜 줄 수 있겠지. 게다가…….”

그녀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밤에 힘도 좋을 것 아냐?”

눈물을 떨구던 리젠의 눈이 둥그렇게 변했다. 곧 웃음을 터트리는 리젠을 바라보며 아셰는 이제 이런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자신이 재미있었다.

수사국 소속이자, 수석 출신이기 때문에 루카스의 신임이 두터울 카이든은 어쩌면 이단이 지금 왕궁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연인인 리젠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카이든은 평생 리젠에게 여러 가지 비밀을 안고 살아가겠지. 그러나 그 카이든마저도 모르는 비밀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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