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너는…… 형을 죽이고…… 그리고…… 나를 이 자리로 밀어 넣었지만…….”
그는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내게 남은 건 또 너뿐이야.”
아셰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4년 반 이후를 생각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 때가 되면, 그녀의 오라비는 정말로 혼자 남겨졌다는 느낌이 들까.
이틀 연속 찾아오던 이단은 그날 이후 꼬박 이틀 동안 오지 않았기에, 아셰는 자신이 그에게 무리한 제안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긴,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상당히 곤혹스러운 제안은 맞았다. 게다가 이단은 황궁에서 황자로 귀하게 자랐으니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성적으로 즐겁게 해 달라’라는 요구가 수치스러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사교계에서 귀족 미망인들이 젊고 잘생겼지만 작위가 변변찮은 젊은 남자들에게 수작을 거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고.
리젠이 건네준 표지가 붉은 책을 읽으며, 아셰는 남녀 간의 교합이란 정말로 이렇게 기분이 묘하고 손발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좋은 것일까 다시 한 번 자문해 보았다. 과장하는 법이라고는 모르는 고지식한 리젠이 ‘좋아요’라고 단호하게 말할 정도면 정말로 좋은 것 아닐까?
이단과의 키스는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 미묘했던 떨림과 척추를 타고 흐르던 긴장감, 멈추고 싶지 않던 촉감 등은 아련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무도회에서 춤을 추었던 남자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녀의 등에 닿던 체온, 허리를 감싸던 손, 밀착한 몸에서 느껴지던 상대의 근육……. 만일 이단과 춤을 추면 무슨 느낌일까.
정말로 그와 자기라도 한다면? 그 짐승같이 서늘하던 눈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까. 제안한 건 그녀였는데, 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남사스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머리로 생각하면, 어차피 이단은 한 달 후에 떠날 몸이고, 자신은 4년 반 후에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건넸던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머리처럼 냉정하지 못해서, 그런 말을 꺼냈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한창 관리할 때보다 살짝 통통하게 살이 오른 듯한 몸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그렇게 3일째가 되던 날 밤, 드디어 서재의 문이 열렸다. 아셰는 차를 마시며 약초학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다소 긴장한 것 같았고, 심지어 한쪽 손에는 와인 병까지 하나 들고 왔다.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아셰의 앞에 털썩 앉았다. 그녀가 찻잔을 하나 꺼내어 차를 따라 주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따라 준 차를 마셨고, 아셰는 약초학 책을 덮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오랜만이야. 심심하진 않았어?”
“……시녀들이 잘 해 줘. 물론 감시도 잘 하지만.”
“뭐 하고 지내, 하루 종일?”
“그냥 이것저것.”
그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각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사흘 전에는 또 한 가지가 늘어서 말이야.”
아셰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결정했어?”
“뭘?”
“네가 제안한 거.”
“……넌?”
“넌 어떤데. 내가 먼저 물었잖아. 네게도 쉬운 일은 아닐 거 아냐.”
이단의 말에 아셰는 눈을 반달로 만들어 보이며 웃었다. 어차피 그가 와인을 가져왔을 때부터 그의 대답은 알아챘다. 그녀는 천천히 턱을 괴고, 그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나는 이 방에 갇혀서 4년 반을 보낼 거야.”
“…….”
“일상과 다른 일이 생긴다면 무조건 도전이지. 난 매사에 아쉬울 것이 없어.”
그녀가 생긋 웃었다.
“넌 어리고 잘생겼잖아.”
이단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가 와인 병을 따더니 그녀와 자신의 빈 찻잔에 따랐다. 아셰는 기겁을 하며 야만인 보듯이 그를 보았지만, 생각해 보니 예전부터 나무 컵에도 와인을 마시던 사람이니 특별할 것도 없는 듯했다.
“마셔. 긴장을 푸는데 도움이 될 거야. 만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말고.”
그녀는 찻잔에 담긴 와인을 한 번에 마셨다. 다소 현실감이 없었다. 언제나 갇혀 있던 그녀의 궁에서, 오래 전, 찰나의 인연을 가진 남자와 함께 동침이라니. 그건 이단도 마찬가지였는지, 단숨에 와인을 마신 그가 한 번 더 빈 찻잔에 와인을 따랐다.
“오늘은 별로 안 좋을 거야. 아플걸.”
“……알아.”
“하지만 좋아질 수 있게 해 볼게.”
“고마워.”
“……한 달 동안.”
두 번째 잔을 단숨에 비운 그가 그대로 일어나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2. 이야기의 밤
그가 아셰를 너무 쉽게 번쩍 들어 올렸기 때문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선대왕이었던 제펠탄조차도 그녀를 안아 준 적이 없었다. 침대 위에 그녀를 눕힌 이단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벽에 손을 대었다.
아셰는 마법에 능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력의 흐름과 마법의 원리 정도는 꾸준히 배웠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마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메탄 왕궁은 아주 오래 전부터 고대 방어 마법이 몇 겹으로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마법을 시전하기에 어려웠다. 그런데 고대 마법에 묶여 있던 마력들이 거대하게 움직이며, 이단의 뜻대로 탄탄하게 사방의 벽에 자리 잡았다. 아셰는 이단이 방음 마법을 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가 말했다.
“소리 지르다가, 밖의 시녀들이 들어올까 봐.”
“어느 정도 방음 마법은 이 방에 다 되어 있는데.”
“소리 질러도 될 정도는 아니던데.”
아셰는 침대에 누워서 신기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방음 마법이 얼마나 탄탄한지 이 안에서 그녀가 크게 소리를 질러도 문 밖에 있는 시녀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내가 대학에서, 수많은 수재들을 봤지만 이런 마법은 처음 봐. 어떻게 마력을 이렇게 네 몸과 같이 운용할 수 있지?”
“내게도 황족의 피가 흐르니까. 황족의 핏줄에 대해서는 너도 지겹도록 들었을 것 아냐.”
“아니, 그래도 너무 신기해……. 이런 건 특히나 고대 마법인데…….”
그는 아셰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가두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양팔을 잡고, 지척의 거리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그가 속삭였다.
“지금 너랑 황족이며 고대 마법이며, 이런 말을 할 땐 아니지 싶은데.”
아셰는 그의 눈에 일렁이는 욕망을 보았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눈빛을 보며, 어느 정도 상대의 내면을 파악하는 것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위압감이 드는 눈은 처음이었다. 분명히 자신이 제안했는데, 왜 그의 얼굴에서 참을 수 없는 소유욕이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두 번째 입맞춤의 상대도 이단이라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몇 번이고 떠올렸던 그 옛날의 입맞춤이 그대로 재현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때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혀를 밀어 넣고 밀어붙일 정도로 서툴렀던 소년은 이제 훨씬 더 골격이 크고 무언가 능숙해진 청년이 되어 있었다. 이단은 천천히 큰 손으로 그녀의 팔을 쓸어 올라가 그녀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의 혀가 부드럽게, 그러나 깊숙하게 들어왔다.
그 옛날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같았다. 서툴러서 어쩔 줄 모르는 건 자신뿐이고, 이단은 그녀의 혀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가, 다시 입술을 핥았다가, 잠시 떨어졌다가 그대로 또 깊게 밀고 들어오는 등 자신의 템포로 완급 조절을 완벽하게 해냈다. 와인 향을 머금은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안에서 거칠게 움직이다, 아셰에게서 살짝 신음 소리가 나자 그의 손이 그녀의 실내복 단추를 하나하나 푸르기 시작했다. 허리 즈음에서 멈춘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거 어떻게 풀어?”
“아…… 호, 혼자서 못 풀어. 시녀가 도와줘야 해. 일단 일어서서…….”
그녀는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려다가, 상반신이 모두 드러나 있음을 깨닫고 황급히 두 가슴을 가렸다. 이단이 어렵지 않게 그녀의 손을 잡아 뒤로 물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 한쪽을 부드럽게 쥐었다. 아셰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돌렸지만, 그가 나머지 한쪽 가슴을 입으로 한껏 머금었을 때에는 처음 느껴 보는 간지러움에 허리를 꼬며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허리를 비튼 후에야 그의 남성이 크게 그녀를 짓누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모든 상황에 머리가 핑 돌았다.
모든 것이 처음 느껴 보는 상황과 감정이었다. 허리를 타고 올라가는 이상한 쾌감도, 가슴 애무에 찌릿해지는 온몸의 감각도, 마치 끈적이는 것 같은 이 공기도.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지자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손으로 치마를 들어 올렸다. 섬세한 레이스로 이루어진 흰 속옷을 내리는 그의 손짓에 다급함이 느껴졌다. 아셰는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으나, 그를 막을 새도 없이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는 있는지도 몰랐던 민감한 곳 위에 작은 원을 그릴 때마다 북을 울리듯이 커지는 쾌감에 그녀가 허리를 튕겼다. 신음 소리는 더 커졌고, 그녀는 어쩔 줄 몰라 그의 목을 감았다.
“아……. 아아…… 아앗!”
그녀의 허리가 본능적으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라 정신이 없었다. 그가 그녀의 가슴 둔덕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이렇게 잘 느끼면 어떡해…….”
그의 속삭임과 함께 작은 입김들이 그녀의 몸을 간지럽혔다.
“그럼 나도 못 참는데…….”
이단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음부를 길게 쓸고는, 끈적한 애액이 묻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유두를 문질렀다. 그녀의 배가 간질거리는 쾌감에 움찔했다. 그가 빠르게 자신의 바지를 벗고, 그녀의 다리를 벌려 다시 애액을 확인했다. 둔탁하고 뜨거운 것이 그녀의 음부를 문지르는 것을 느끼고 아셰는 눈을 떴으나, 치마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