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5/256)

  

16화.

“얘, 됐어. 내 미래는 내가 아는데 뭣하러 아프게 피를 내? 올해부터 그럼 카드점 치지 마. 사실 난 미래가 궁금하지도 않다고. 마력도 이젠 거의 없는데 흑마법이 뭐, 잘 듣겠니?”

아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헤일리가 과도로 손가락을 베어 내 피를 낸 뒤 카드 주머니에 똑똑 떨어트렸다. 아셰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가죽 주머니에서 꺼낸 카드에 피가 하나도 배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살짝 소름이 끼쳤다. 어쨌든 사막국가 한스팀은 뭔가 이상한 땅이었고, 아셰로서는 짐작하기조차 싫은 음침한 마법들이 발달해 있었다. 헤일리가 카드를 펼쳐 보였다.

“네 장 고르세요, 왕녀님.”

“네 장? 보통 한 장이었잖아.”

“피까지 먹였는데 제대로 봐야지요.”

항상 생일의 카드점은 가볍고 밝은 분위기에서 재미 삼아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생일 아침이 아닌 보름달이 뜨는 날에 행하는 것도 처음이고, 네 장이나 고르는 것도 처음이고, 피를 본 뒤라서 그런지 분위기도 조금 섬뜩했다. 아셰는 적절히 카드 네 장을 골랐고, 헤일리는 엄숙한 표정으로 카드를 뒤집었다. 아셰는 첫 번째 카드를 보고 중얼거렸다.

“THE PATH. 길?”

“네. 이 카드는…… 과거를 말해요. 왕녀님은 되는 대로 살아오신 게 아니라, 목적을 갖고 계산하며 살아오셨군요. 진취적이고, 전략적인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나요.”

아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 정도는 너무 왕족에게 당연한 서술인 것 같아 딱히 감동을 받지는 않았다. 헤일리는 두 번째 카드를 뒤집었다.

“THE LOVE. 사랑?”

“어…….”

헤일리는 당황했는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이…… 카드는 현재를 말하는데, 음, 새로운 사랑의 등장과 인연의 이어짐을 뜻……해요. 음, 그런데 이 사랑 카드는…… 안정과 신뢰를 뜻하지는 않아요. 불같고, 치열하고, 그러면서도…… 찰나의 화려한 감정을 뜻해요.”

아셰가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헤일리는 분명 갇혀 지내는 아셰에게 사랑 카드가 나타난 것이 의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점괘가 아셰에게 또 다른 허탈함을 느끼게 할까 봐 그녀는 굉장히 자신감을 잃은 표정으로 말꼬리를 길게 끌었다.

“세 번째는 미래겠네?”

“네.”

그녀가 세 번째 카드를 뒤집었다. 아셰는 가만히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헤일리는 거의 울상이 되어 그 카드를 노려보았다.

“THE STRANGER. 낯선 이?”

“이 카드는…….”

시원시원하게 말을 하지 못하는 헤일리를 보고 아셰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아. THE DEATH가 나온 것도 아니니까 시원하게 말해.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고, 그래 봤자 4년 반 안에 이 궁에서 일어나는 지지부진한 사건밖에 더 돼?”

“왕녀님, 왕녀님 말대로 이제 마력 같은 건 많이 사라져서, 흑마법도 옛날의 그 힘을 잃었나 봅니다. 피를 먹이면 제대로 결과가 나오나 했더니, 그렇지도 않은가 봐요.”

아셰가 괜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그래서 무슨 뜻인데? 안 들으면 또 찝찝하니까 그냥 말해 봐. 괜찮아.”

“여기서…… 낯선 이는 왕녀님을 뜻해요. 왕녀님은 어디론가 떠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계속해서 이방인으로 남으실 거예요. 이 카드는 마음가짐을 뜻하기도 하는데, 왕녀님의 마음이 끝내 정착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그녀는 이미 점괘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남은 4년 반 동안 이 궁에서 다니엘의 허락이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 그런데 어디로 떠난단 말인가. 게다가 만일 떠난다고 해도, 그녀는 어차피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에 그곳에 정착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셰는 그래도 재미 삼아 본다는 마음으로 마지막, 네 번째 카드를 가리켰다.

“그럼 네 번째는 무슨 카드야?”

“조언 카드인데…… 왕녀님, 그냥 안 보셔도 돼요. 그렇게 정확하지도 않은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이왕 보기로 한 거, 끝까지 봐야지.”

헤일리는 한숨을 쉬며 네 번째 카드를 뒤집었다.

“THE KING. 왕?”

차분하게 카드를 읽어 가던 아셰도 네 번째 카드에서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녀님, 제가 괜한 짓을 했나 봐요. 진짜 쓸데없는 카드만 나오네요……. 괜한 피만 흘렸어요. 왕녀님 말대로 요새 마력은 사라지는 추세니까요.”

“그런데 왜 조언 카드가 KING으로 나와?”

“말이 조언이지, 주의하라는 경고의 의미를 지닌 카드예요. 한스팀의 흑마법은 거의 부정적인 것에 초점을 두니까요. 고귀한 혈통과 관련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특별히 유의하는 것이 좋겠어요. 이 카드는 액면 그대로 왕의 카드이기도 하지만, 왕녀님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과 핏줄을 뜻하기도 해요.”

“정확한데, 뭐.”

아셰는 카드를 정리하며 시무룩해진 헤일리를 바라보다가 턱을 괴었다.

“어쨌든 사형 선고는 국왕 전하가 해야 할 테니까. 나름 꽤 맞췄잖아, 의기소침해하지 마. 절반은 맞췄겠지. 적어도 과거는 진짜 정확했어.”

정말로 최선을 다해, 낑낑대며 길을 만들어 가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그녀는 카드를 정리하는 헤일리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씩 웃었다.

그 날 저녁, 아셰의 방으로 다니엘이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언제나 세 명뿐으로, 친구인 리젠과 국왕인 다니엘, 그리고 친모 샤틴이 전부였다. 그녀는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방문객들을 맞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샤틴은 그녀에게 그저 히스테리를 부리러 오는 것이었다.

리젠의 경우, 아셰와의 친분도 어느 정도 있지만 상당한 지분으로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모인 르엘라의 일기장을 보고 자신을 고발한 장본인이었다. 아무리 그게 정의였다고 하더라도,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 때문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하면 괴로울 것이다. 갇혀서 적적할 그녀를 위해서 자주 찾아오는 것이 그녀 나름의 우정이자 속죄일 것이다.

다니엘의 경우는 조금 더 복잡했다.

“내 백성들이…… 나보고 통치할 자격이 없다며, 왜 아버지가 선왕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냐고 물으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그럴 일 없어.”

아셰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아메탄에 반란은 일어나지 않아. 왜냐하면…….”

다니엘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누구보다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방향키를 잡고 있는 사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왕위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3왕자였고, 그래서 결정 하나하나에 자신이 없는 것이었다. 앞에서는 당당한 권위를 내보여도 뒤에서는 자신의 나약함을 표현할 상대가 필요했다. 그리고 아셰는 그의 내밀한 바람을 꿰뚫고,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었다.

“오빠는 제국의 황제처럼 무리하게 황궁을 증축하지도 않고, 세금을 올려 향락에 빠져 있지도 않은데다가, 흉포하게 무고한 사람들을 수없이 죽이는 것도 아니니까. 더 잘살게 해 주고, 더 평화롭게 해 주면 백성들은 언제나 만족할 거야. 그러려고 오빠가 계속 노력하면 되지.”

그녀는 상냥하게 웃었다. 마치 그동안, 수많은 남자 앞에서 선량한 눈웃음을 쳐 보였던 것처럼.

“힘들겠지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오빠가 잘 중심을 잡으면 돼. 그런 면에서 나는 진심으로, 루벤이나 윌리엄보다는 오히려 오빠가 왕위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루벤도, 윌리엄도 서로에 대한 경쟁심에 눈이 멀어 양극단으로만 갔잖아.”

“확실히 윌리엄 형이라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겠지. 물론 루벤 형은 자꾸만 제국의 눈치를 보는 나보고 답답하다고 하지만…….”

“루벤은 스타람을 너무 좋아해. 대체 전기라는 게 뭔데 그렇게 난리야? 마법조차 못 쓰는 천한 사람들의 마력 대용품 따위에 너무 빠져 있어. 옛날부터 온갖 곳을 여행하면서 시정잡배들이랑 어울리더니 취향도 천민처럼 변했나 봐.”

다니엘은 아셰의 말에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셰는 표정을 누그러트리고, 다니엘의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잘할 거야, 다니엘.”

그는 한숨을 쉬며 피곤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이제 부모도 없었고, 친형도 없었으며 그나마도 한 명 있는 이복형 루벤은 거의 대다수의 시간을 궁 밖에서 보냈다. 그가 좋아하던 여자, 리젠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을 할 예정이었다. 결국 그가 공허하고 불안한 마음을 위로받을 곳은 어렸을 때부터 늘 곁에 있던 이복동생, 아셰뿐이었다.

“……결혼은 안 할 거야? 귀족들의 성화가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내가 노선을 정하지 못했는데, 어떤 귀족과 결혼을 하겠어. 친제국파? 친스타람파? 하려면 중립파 귀족과 하는 게 좋겠지. 아니면 언제나 정치적인 중립을 띠는 산하기관 직원이나.”

아셰는 씁쓸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 산하기관 직원과 결혼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다니엘도 마음만 통했다면 약제국의 리젠과 결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리젠의 마음이 다른 쪽으로 옮겨갔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결혼 얘기가 나오니까 말인데…….”

아셰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리젠과 카이든의 결혼식…… 나는…… 갈 수 없겠지?”

“넌 감금이 원칙이라……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네가 나서는 게 현명한 것 같지는 않아.”

다니엘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셰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한 친구의 결혼식을 가지 못한다는 것이 조금 슬프긴 했지만 반면 자신이 정말로 기쁘게 축하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녀는 이제 결혼식마저 올리지 못하는 몸이 되었으니까.

“아셰.”

“응?”

“결국 우리 둘이네.”

다니엘이 쓸쓸하게 웃었다. 산하기관 직원들이 될 평민 엘리트들과 왕립마법대학에서 함께 어울려 다니던 시절은 그들 인생에 상당히 특이하던 시간들이었다. 대학에서 카이든과 리젠을 포함해 넷이서 친하게 지내기는 했으나, 대학 졸업 이후 그들은 당연하게 신분의 격차를 체감할 수밖에 없었고 나머지 둘은 심지어 결혼을 하며 멀리 떠나가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다시 궁에는 아셰와 다니엘만 남은 셈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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