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74/256)

  

15화.

“근데 그때는 하루였고, 지금은 한 달일 텐데. 자주 올 듯해. 아메탄 왕궁을 떠나면 다시는 이런 훌륭한 차를 마실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아셰가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다른 것이 또 뭐가 있을까. 그녀는 요즈음 먹는 것 빼고는 딱히 큰 즐거움을 못 느끼는 상태였다. 재미있는 책이야 리젠이 오늘처럼 계속 가져다줄 테고……. 책 생각을 하고 나니, 불현듯 하나의 호기심이 떠올라 뱃속이 간지러웠다. 어쩌면 먹을 것보다도 큰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 있다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한 달.”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정확히 4년 반 동안 여기 감금되어 한 발자국도 못 나갔다가, 그 전에 죽겠지.”

이단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천천히 그와 눈을 마주쳤다.

“너는 이 궁에 들어올 수 있는 다니엘을 제외한 유일한 남자고.”

안 될 것은 뭐람.

“여전히 꽤 젊고, 꽤 잘생겼고.”

그녀는 찬찬히 차를 마셨다. 한 달 뒤면 어차피 다시 못 볼 사이인데다가 철저히 합의된 계산만을 주고받는 상대라는 것이 이상하게 편안함을 주는 관계였다.

“네가 내게 줄 수 있는 즐거움이란 건 뻔하지. 물론, 나는 아직 모르는 즐거움이긴 하지만.”

“……뭐?”

이단은 못 알아들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죽을 거, 세상의 즐거움은 다 느껴 보고 싶어. 난 요즈음, 매일같이 식사 메뉴를 고민하고, 잠이 오면 아침이라도 일어나지 않아. 옛날엔 몸매 관리를 하느라 달콤한 것들을 잘 먹지 못했는데, 요즈음엔 실컷 먹고 있거든.”

“그래서 예전보다 살이 좀 올랐군. 보기 좋아.”

사실 아셰는 궁에 갇혀서 움직임은 없는데, 먹고 싶은 것들을 양껏 먹고 있었기 때문에 살이 조금 오른 상태였다.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내 친구가, 남자에게서 얻는 즐거움이 꽤 크다고 말하던데 아직 나는 모르는 즐거움이라…….”

열여섯의 그녀는 그에게 이미 팔목의 상처를 대가로 첫 키스를 받아 낸 바 있었다. 물론 술김이기도 했고, 철없는 소년의 어이없고 즉흥적인 제안이기도 했다.

“수면욕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식욕은 잘 채우고 있는데…… 아직 성욕이라는 건 내가 아예 모르는 영역이거든.”

7년이 흐른 뒤 술도 마시지 않고 철도 이미 다 든 여자의 합리적인 고민에 이단의 귀가 붉어졌다. 그는 황급히 아셰의 시선을 피하고, 차를 마셨는데 찻잔을 든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훨씬 더 엄숙한 자리에서도 긴장하는 내색이 전혀 없던 그의 태연함이 생각나 아셰가 장난스럽게 웃고, 책장을 열었다. 이제는 가 보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것은 아니니, 서로 생각을 좀 해 보자.”

그녀가 어딘가 비뚤어진 성향을 갖게 된 것은 사실 모친인 샤틴의 영향이 컸다. 샤틴은 아셰에게 끊임없이 불평만 했다. 힘없는 공국에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보내진 것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것도, 왕비 테스티의 괴롭힘이 심해지는 것도, 주변에 사람이 없어 외로운 것도 샤틴에게는 모두가 너무 힘든 일이었다. 샤틴이 그 모든 감정을 풀 상대는 딸인 아셰뿐이었기에, 아셰는 샤틴의 불평불만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다.

“그래서, 그 계집애를 아주 매질해 주었다. 어디서 감히 눈을 부릅떠?”

“……그래요?”

“테스티도 죽었겠다, 이제 내 세상이라고. 그동안 나를 멸시했던 것들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다음 날 아침 찾아온 것은 그녀의 친모, 샤틴이었다. 감금령으로 인해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아셰를 대신해 가끔 샤틴이 찾아오곤 했다. 그러나 그녀를 위로하려고 오는 것은 아니고, 그저 짜증을 풀거나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할 때 일방적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리젠과 이단에게 차를 대접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일어나 찻잔을 가져왔다. 그런 그녀를 보고, 샤틴이 무심결에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자신이 일어서서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아셰는 깡마른 엄마의 등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샤틴이 갖는 아셰에 대한 유일한 감정이라는 것이 특별하지도 않았지만 다소 상처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옛날에 테스티 그년이, 너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눈을 부릅뜨며 나의 뺨을 칠 때에…….”

샤틴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20년도 넘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분노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은 것 같았다. 샤틴에게는 왕비인 테스티가 무고한 사람들을 잔뜩 죽인 것보다, 20년 전 뺨을 때린 것이 더 큰 일이었다. 아셰는 이럴 때마다 내가 감정의 쓰레기통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에는 그저 엄마가 불쌍하기만 했지만 이제는 엄마를 불쌍해하는 것밖에 못했던 어린 시절의 아셰가 더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우리 리스 공국이 곧 무너질 지경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공주였어. 테스티 같은 평민과 출신부터가 달랐다고!”

아셰는 벌써 몇백 번도 더 들은 얘기를 태연히 흘리며 차를 마셨다. 정말 천벌을 받을 생각이기는 한데, 차라리 아셰는 샤틴이 테스티의 반만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적어도 테스티는 자기 자식인 루벤을 끔찍하게 아꼈다.

참으면 되는데, 참지 못하고 아셰는 결국 말해 버렸다.

“……테스티는 죽었어요.”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얼마나 끔찍한 건지. 샤틴이 의지할 만한 곳은 이 궁에 아셰뿐이었고, 샤틴의 그런 말들을 다 받아 주는 사람도 아셰뿐이었다.

“너 지금…….”

샤틴이 죽일 듯이 아셰를 노려보았다.

“나를 무시하는 거야? 너마저 아메탄 씨라고 날 무시하니?”

아셰는 한숨을 쉬었다. 샤틴은 테스티가 죽고 나서도 각종 왕가의 회의에 절대 출입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릴 수 있는 대상은 아셰와 시녀들뿐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네가 아들이었다면 이야기가 또 달랐을 수도 있지! 다니엘 같은 유약한 놈도 왕이 되는데 너도 만일 남자였다면……. 넌 태어났을 때부터 내 발목을 붙잡았어!”

샤틴이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찻잔을 던졌다. 벽에 유리 파편이 튀었다. 대꾸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셰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이나 숨을 골랐고, 샤틴은 씩씩대며 아셰의 궁을 나가 버렸다. 시녀가 황급히 들어와 깨진 찻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르엘라가 했던 말, 샤틴은 우울증이고, 치료 받지 못한 채로 오랜 시간 틀어 박혔고, 그러므로 점점 더 성격이 이상해진다는 것, 그리고 그건 아셰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되뇌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말을 해 줄 사람도 없었다.

슬픈 것은, 어쨌든 감금되어 있으니 아셰가 샤틴의 운명을 그대로 답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모친과 비슷한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며, 삶의 상황은 같더라도 삶의 태도는 달리 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여기에 태생적으로 영특하고 눈치가 빠르며 냉정한 성향까지 더해져, 제왕 교육을 받으면서 그녀의 성격은 ‘현실이 불만족스러우면 행동할 것’으로 굳어졌다.

태생이 불만족스러웠지만, 불평불만하며 궁에 우울하게 박혀 있느니 무도회를 다니든 정치적 노선을 타든 최대한 노력했다. 귀족 영애들의 수군거림이 듣기 싫고, 외로움도 싫으면 평민 출신이라도 친하게 지냈다. 최악의 혼인을 하게 생기자 1왕자를 죽였다. 그녀는 샤틴처럼 가만히 앉아 신세 한탄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범죄가 밝혀져 5년간의 유예 기간이 주어졌어도 아셰는 일단 벌어진 상황에 불평은 하지 않았다.

외로운 건 싫으니 자신을 고발한 친구더라도 리젠과 여전히 잘 지냈다. 곧 죽을 것에 괴로워하기보다는 일단 남은 생애는 즐겁게 보내고 싶어 식욕에 충실했다. 이 정도면 큰 절망 없이 인생 그저 그렇게 잘 살다 간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래서 뭐 그렇게 슬프지도 않았고, 그렇게 절망적이지도 않았다. 샤틴이 가끔씩 패악을 부리고 가더라도, 맛있는 식사를 생각하면 기분이 좀 나아졌다. 제국의 평민들은 긴 흉년으로 밀빵조차 배불리 못 먹는다는데, 작지만 부유한 왕국에 태어나 온갖 달콤한 것들을 먹을 수 있는 그녀는 얼마나 행복한가. 그런 생각을 하면 그녀는 또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의기소침해진 그녀를 보는 게 안쓰러웠는지, 시녀 중 하나인 헤일리가 찻잔을 모두 치운 뒤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그럼.”

아셰가 피식 웃었다.

“한두 번이니?”

명랑한 말투와 대비되는 그녀의 허탈한 표정을 보고, 헤일리가 한숨을 쉬며 안 되겠다는 듯이 말했다.

“왕녀님, 기분 전환 겸, 생신 선물을 미리 드릴게요. 오늘이 보름달이 뜨는 밤이라 영기가 가장 충만하거든요.”

“그래?”

곧 아셰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헤일리는 그동안 매해 생일 선물로 카드점을 쳐 주었다. 그녀가 멍하니 앉아 있던 아셰의 앞에 앉았다. 사막국가인 한스팀에서 배워 왔다고 하는데, 아셰는 딱히 그녀의 점을 믿지는 않았지만 재미 삼아 듣곤 했다. 작년 그녀의 생일에, 헤일리는 그녀가 딱 원하던 곳으로 시집을 가는 패가 나왔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제가 점을 치면서, 사실 생략한 것이 있었어요.”

“뭔데?”

“사실 한스팀의 흑마법은 모두 피를 필요로 해서, 좀 더 영험한 점을 위해서는 카드에 피를 먹여야 해요.”

“확실해?”

아셰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쨌든 한스팀의 흑마법은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배울 때 그렇게 배웠죠. 근데 전 점쟁이가 직업이 아니니, 그동안 피를 안 먹인 것뿐이에요. 무섭고 아프잖아요. 하지만 올해부터, 피를 먹이려고요.”

헤일리의 시무룩한 말에, 아셰는 잠시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틀린 점괘에 전혀 괘념치 않았지만 막상 점을 본 사람은 이상한 책임감을 느꼈을 것 같아서였다. 아셰는 착한 헤일리가 자신을 동정하고 있고, 미래를 축복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마저 갖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손사래를 쳤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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