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73/256)

  

14화.

“지난번에 말씀하신 책이에요. 어제 시녀분이 오셨다가 정신없이 그냥 나가셨어요.”

그녀가 부탁했던 ‘렌토 지역의 약초’라는 책이었다. 아셰는 책을 받아 들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리젠에게로 향해 있었다. 아셰는 진심으로 눈앞의 리젠이 부러웠다. 평민 출신이지만 영리하므로 왕궁 산하기관인 약제국에 입사하여 마음껏 연구를 할 수 있었고, 카이든과의 자유로운 연애 끝에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아셰는 화려한 옷과 장신구, 몇 명씩이나 붙어 있는 시녀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 같은 것보다 리젠과 같은 자유로운 삶을 원했다.

“왕녀님의 차는 언제나 맛있네요.”

리젠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셰가 내려 준 차를 마시고 눈을 휘어 보이며 웃었다. 리젠은 평민이고, 따라서 지금 왕궁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다. 아마 카이든은 수사국 직원이라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리젠에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사국의 비밀 유지 강령은 가족들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저만 마시는 것은 너무 아까워요.”

아셰는 조용히 웃고, 어제의 밤손님에 대해 혼자서 멍하니 생각했다. 리젠은 아무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주변을 한 번 살피고, 가방 속에서 새로운 책을 하나 꺼냈다.

“왕녀님, 그리고 이거.”

“어? 뭔데?”

“저도 어렵게 구했어요.”

리젠이 씩 웃었다.

“요즈음 난리라는 소설책이에요. 저도 소식이 느려 전혀 모르다가, 약제국 동료가 말해 줘서 알았어요. 서점에서 사려고 해도 웃돈을 꽤 얹어 줘야 한대요. 새 책은 아니고, 제가 한 번 읽었어요.”

아셰는 제목도 없는 붉은 표지의 책을 받아 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대학 시절 동기들끼리 많이 돌려 보던 느낌의 책이었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어떤 내용의 책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모범생인 리젠은 공부만 하느라 이런 책에 별달리 관심이 없었지만, 아셰는 사실 어렸을 때부터 가끔 읽어 왔다.

“리젠, 이런 책도 읽어? 예전엔 별로 관심 없더니.”

“재, 재밌더라고요.”

리젠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셰는 씩 웃으며 말했다.

“왜? 실제로 카이든이랑 하니까 이제 관심이 생겼어?”

“아, 왕녀님!”

당황하는 리젠의 얼굴을 보며 아셰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모범생인 이 아가씨는 대학 시절 내내 고리타분하게 공부나 하고 체력이나 단련하면서 남들이 몰래몰래 하는 연애도 학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전혀 생각지 않았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이런 남녀 간의 합을 다룬 책을 구하고 읽는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아셰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하긴 하나 보네? 어때? 좋아?”

“네?”

“책 보면, 다들 좋아 죽는다고 해서. 진짜 좋은가 하고.”

리젠은 말을 고르는 듯한 눈치였다. 어차피 아셰가 정상적으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 리 없었고, 이대로 5년 동안 궁에 감금되어 있다가 사형 처분이 날 확률이 높았다. 사실 이 감금 생활이 지겨울 것을 아니까 그녀답지 않게 이런 소설까지 가져온 것이었다. 리젠은 아셰의 손을 붙잡으며 속삭였다.

“좋아요.”

“정말?”

“네.”

“어떻게?”

“처음엔 아픈데, 하다 보면 점점 좋아져요. 물론 서로가 서로의 몸을 잘 알아야 하고요.”

“맛있는 걸 먹는 것보다 좋아?”

아셰의 물음에 리젠은 또 열심히 고민하더니, 모범생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아주 다른 즐거움 같은데요. 음, 보통 식욕, 성욕, 수면욕이 3대 욕구라고 하잖아요? 먹거나 자지 못하면 죽지만, 남자와 하지 못해서 죽는 사람은 없는데 그 세 욕구가 같이 묶인다는 건…… 오히려 생존과는 전혀 관계없기 때문에 좀 더 원초적인 본능이라고 생각해요.”

“사랑……과는 다르겠지?”

물론 아셰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교계에 나가면서 온갖 지저분한 소문들과 뒤틀어진 욕망들을 충분히 보고 들었다. 정부를 둔 백작부인, 애인을 다섯 명씩 두는 미망인, 연회에서 일어나기 마련인, 사랑과 관계없는 그 수많은 교합들……. 리젠은 또 성실히 대답했다.

“저는 카이든과 잠자리를 갖는 것이 좋아요. 그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쾌락이 분명 있어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게 사랑 아닐까요?”

리젠은 참 현명했다. ‘렌토 지역의 약초’보다는 확실히 이름 없는 붉은 책이 훨씬 더 재미있었던 것이다. 아셰는 차를 홀짝이며 책을 읽다가, 거짓말을 못하는 리젠이 ‘좋아요’라고 말을 할 정도면 얼마나 좋은 것일까 잠시 상상해 보았다. 달아 오른 얼굴로 책을 읽고 있는데, 책장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검붉은 머리의 청년은 어제와 같은 시간에 그녀를 또 방문한 것이다.

아셰는 책을 재빨리 책장에 꽂아 넣으며, 분주하게 다기를 준비했다. 이단이 태연하게 어제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내 평생 차가 마시고 싶어질 줄은 몰랐는데.”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니까.”

아셰가 뿌듯하게 웃으며 찻잎을 골라냈다. 우려낸 차를 정성스레 담은 찻잔을 건네며 그녀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마시기 싫으면 안 마셔도 돼.”

이단은 대답도 하지 않고 향을 먼저 즐긴 뒤 한 모금 마셨다. 그의 앞에 앉으며 아셰가 우물쭈물 말했다.

“넌…… 내가 징그럽지도 않니? 바로 이 방에서, 친 오라버니를 독살했다니까. 제국에 가기 싫다는 이유로.”

“잘 한 거라니까.”

그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7년 전보다 더 난폭하고, 더 늙었고, 더 이상해졌어. 술과 마약을 너무 오랫동안 해서 판단력은 흐린데 폭력성은 더 짙어졌지. 네가 갔으면 아마 사람들 앞에서 유린당하고, 반항하다가 바로 죽었을 가능성이 높아. 이미 정상이 아니거든. 이제 정말로 패배할까 봐 두려워서 불안증도 늘었어. 수하인은 매일 바뀌고, 당연히 모두 죽이지.”

두 번째 만남이라서 그런지, 어제만 해도 서늘한 짐승과 같던 그의 눈빛은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끔찍한 내용이라서 그렇지 말수도 늘었다. 그녀는 이상하게, 오늘 왔다 갔던 리젠을 마주하는 것처럼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왜 아메탄 왕국으로 도망쳐 왔는지 알아?”

“……왜?”

“조금 참고 버티다 혁명군에 적당한 때에 합류하면 될 걸…… 마력증폭약이라는 게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 마력이 거의 다 고갈된 지금도 저 모양인데, 마력이 회복되면 정말 대륙엔 희망이 없는 거야. 충동적으로 암살을 시도했다가 들켜서 바로 탈출하느라 경황이 없었지. 다행히 아직까지 황제가 저 모양인 걸 보면 헛소문 같지만.”

아셰는 마른침을 삼켰다. 

“난 천륜을 어기고 내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는데, 네가 징그러울 이유가 없어.”

그는 차를 마시면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아메탄 왕국의 제왕 교육이라고 해 봤자 제국의 모방이겠지. 그럼 너와 나는 어린 시절에 같은 교육을 받은 것이고, 어린 나이에 학습한 가치관은 절대 변하지 않아. 살인하지 마라, 친족은 소중하다, 남을 속이지 마라, 이런 평범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는 애초부터 다르니 남들이 널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고…….”

그녀는 왜 그 순간 가장 친하다는 친구 리젠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리젠은 영원히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녀는 살인하지 마라, 친족은 소중하다, 남을 속이지 마라, 그런 평범한 교육을 받은 바르고 올곧은 사람이니까.

“내가 널 이해하는 것도 당연해.”

아셰는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황급히 차를 마셨다. 감금 이후로 한 번도 울어 보지 않았지만, 아주 먼 옛날 한 번 술친구를 했던 남자가 이렇게 마음속 깊이 들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시녀들도, 꼬박꼬박 찾아와 할 수 있는 위로를 모두 건네는 친구 리젠도,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 온 다니엘도 지금 이 순간 그처럼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 누구도 로즈리 앞에서 대놓고 그녀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우리가 정말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조건 없는 친분 같은 건 없다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네가 이렇게 날 찾아오는 것도 난 사실 의심스러워. 회의에선 네 편을 들었지만, 솔직히 네 말을 다 믿지도 않고.”

“한 달 후에 떠난다니까. 그리고 혁명군에 합류할 거야. 이건 진실이지.”

그 말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뭐 그녀와 딱히 상관있는 일은 아니었다. 아셰의 묘한 표정을 보고 그가 씩 웃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란 건 동의하지?”

“뭐, 그건 맞겠지? 적어도 나는 행복과 불행을 계산해 본 뒤 불행이 조금이라도 커지면 아쉽지 않게 죽을 테니까.”

아셰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그가 턱을 괴고 말을 이었다.

“모든 걸 일대일로 교환하도록 하자. 서로 과도하게 의심하거나 바라지 않도록.”

“좋아.”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만일 리젠이 들었다면 어이없다고 웃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애초부터 서로를 믿지 않는 것을 기반으로 딱 같은 만큼만 주고받는 관계가 더 편한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사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다니엘과 아셰는 서로 그런 거래가 능숙하기도 했다. 무엇을 주는 대신, 무엇을 내게 줘. 사실 윌리엄은 그런 의미에서 아셰를 배신한 것이다. 그동안 보잘것없었지만 아셰가 보여 준 지지를 깡그리 무시한 셈이니까. 그래서 아셰도 배신에 배신으로 답했다.

눈앞의 이 남자는 시원시원한 성격대로 서로를 믿지 않는 왕족들 간의 은밀한 약속을 대놓고 제시하고 있었다. 아셰가 손가락을 접어 가며 천천히 말했다.

“황궁의 비밀 통로를 이용했으나 네가 살려 주었으니, 나도 왕궁의 비밀 통로를 이용한 건 눈감아 줄게. 대신 내 궁이 아닌 다른 통로를 이용하는 건 네 책임이야.”

“대다수의 통로를 이미 네 오라비가 다 막아 놨던데. 막히지 않은 통로 중 여기로 통하는 것이 있다는 게 조금 재미있었지.”

“다니엘이 여기 자주 오니까 그랬겠지. 그만큼 내가 큰 변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테고.”

아셰는 가볍게 대답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얻어 마신 술값은 여기서 차로 대접하도록 할게. 날 그때 다치게 한 것은 이미 갚은 셈이고, 앞으로는 비밀 하나에 비밀 하나로 갚기.”

이단이 민망한지 귀 뒤를 긁었다. 아셰는 어릴 적 그가 ‘술 처음 마시는 순간하고 뭐가 다르냐’며 허세를 부린 것과는 달리 첫키스의 기억에 대해 꽤나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단순히 반말만으로도 로즈리를 떨게 했던 그 패기가 무색할 정도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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