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녀는 별로 애국심이라는 것도 크게 없었다. 가끔 아셰는 자신이 평민 출신의 약제국 직원 리젠보다도 아메탄 왕국의 미래에 관심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애초부터 외국인이었고, 아버지가 아무리 국왕이라고 해도 자신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외국으로 시집가야 한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소속은 예전부터 ‘미정’이었던 셈이다. 오히려 왕위를 잇지 않는 왕족들은 모두 외국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 아메탄 왕국에서 힘없는 왕녀로 태어난 것이 불행으로 느껴졌다.
모두가 어떻게 되든 말든. 내일은 초코칩 쿠키를 먹고, 향긋한 민트를 우린 차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몸을 씻고, 잠옷을 갈아입은 채 다시 아까의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그제야 시녀가 약초학 책을 받아 오지 않은 것을 기억해 냈다. 그녀는 시녀를 부르려다가, 어차피 밤이 늦었기에 내일 한 번 더 심부름을 시키기로 결정한 채 또다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천천히 일어나 그녀는 작은 다기로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비밀 통로로 연결된 책장 문이 열렸을 때, 그녀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당연히 다니엘이 다시 온 것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차를 우리는 모습을 다니엘이 어떻게 볼지 몰라 두려웠다. 이 모습을 보면 윌리엄의 죽음을 당연히 떠올릴 텐데, 어떻게 자연스럽게 넘어가야 하나. 아셰는 차를 내리는 데 집중하는 척하며 밝은 목소리를 꾸며냈다.
“왜? 또 의논할 일이 있어? 아니면 잊어버린 거라도?”
완벽하게 표정을 만들어 낸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땐, 예상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찻물을 쏟을 뻔했다.
“이미 누가 왔다 갔나 보지?”
회의장에서 봤던 핏빛 머리의 청년이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셰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까 다니엘이 앉았던 자리였다. 아셰는 조용히 차를 마저 우리고, 잔에 따른 뒤 한 모금 마셨다. 심신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한동안 정적이 흐르고, 그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메탄 왕궁은 황궁의 축소판이니, 비밀 통로를 추론하신 모양이군요.”
“7년 전 네가 한 것보다는 훨씬 확실한 방법이지. 길이 단순하여 오기에 어렵지 않더군. 네 오라비가 원래 그가 쓰던 궁을 줬거든.”
그의 거처는 예전에 다니엘이 쓰던 왕자궁으로 정해졌다. 다니엘이 태자인 시절이 없었으므로 그 정도면 꽤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왕이 머물던 궁을 주면서 제국의 핏줄에 대한 예우를 하고, 태자궁을 내주지 않음으로써 자존심을 지킨 것이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제 오라비가 왔다 갔습니다. 마주쳤으면 어쩌려고 이런 위험을 무릅쓰셨을까요? 게다가 제가 시녀와 같이 있거나, 손님을 맞을 상태가 아니었으면 어쩌시려고.”
“7년 전 너는 죽음을 무릅썼는데,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네가 그 때 오지 않았다면, 아메탄 왕궁의 비밀 통로가 제국을 본뜬 것도 몰랐을 거야. 그러니 이 사태의 책임은 우리 둘 다에게 있어.”
이단은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7년 전에는 잘도 반말을 쓰더니. 내가 너보다 한 살 어린 건 알고 있지?”
“나중에 알았지요. 아까 회의장에서는 존댓말도 잘 쓰시더니, 왜 여기서는 황족 행세를 하십니까?”
원래 황족은 절대 아메탄 왕족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아까 보여 주었던 정중한 태도는, 자신이 제국과 정말로 분리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그저 반말을 쓰고 있는 것뿐인데도 사람이 다르게 보였다. 아무리 공화주의자라고 하더라도, 날 때부터 남들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특유의 오만함과 자유분방함이 모두 섞여 기묘한 분위기를 냈다.
“황족 행세 아니야. 그냥 너도 반말 쓰라고.”
아셰는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더 삼켰다. 앞의 이 남자가 원하는 것은 예전의 그 편한 사이였다. 아마 그 지붕에서의 대화가 나름 재밌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딱히 못 들어줄 이유도 없었기에 아셰는 치렁치렁한 금발 머리를 뒤로 넘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그가 마음에 든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의자에 편히 등을 기댔다. 아셰는 차를 홀짝이며 조금 더 자세히 그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의 인상은 더 거칠어졌다. 분명 잘생긴 얼굴이지만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종류의 인상은 아니었다.
“손님이 왔는데, 혼자 차를 마시는 건 대체 어느 나라의 예법이지? 난 듣도 보도 못했는데.”
“마시고 싶어?”
아셰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 제국에 소문이 퍼지지 않아 모르는 모양인데, 나는 내 궁에 찾아온 오라비에게 독을 탄 차를 건네 죽였어. 그런데 내 궁에서 내가 우린 차를 마시고 싶어?”
“왜 몰라?”
이단이 태연하게 말했다.
“네가 내 아버지의 비가 될 뻔했는데.”
아셰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단은 자신이 직접 빈 잔에 아셰가 우린 차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내 아비가 너한테 혼담을 넣은 것도, 갑자기 왕과 태자가 죽으며 취소된 것도, 태자가 죽은 이유도, 밝혀지게 된 경위도, 다 알지.”
“내가 그렇게 제국에서 유명한 인물인지는 몰랐네.”
“아니. 제국인들은 거의 몰라. 지금 제국은 전쟁통이라 난리도 아니니까.”
그가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널 지목해 혼담을 넣고 난 뒤 계속 찜찜했는데, 너희 태자가 죽고 약혼이 자연 파기가 되니 안심이 되더군.”
“……그래서 나한테 잘했다는 거야?”
“몇 번을 말해? 넌 그 때 제국에 왔으면, 이렇게 멀쩡히 숨 쉬면서 나랑 대화도 못 해.”
아셰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이단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아셰는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암살에 실패하고 여기까지 오는 데 살인이 한 번도 없었으리라 여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궁에서만 몇십 명을 베었을 것이다.
“……그렇겠지.”
“황제를 죽이지 못함으로써.”
그 말이 섬뜩해서 아셰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황제는 그의 친아버지였다.
“그때 성공했어야 했는데…….”
아셰는 비로소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암살에 실패하여 더 많은 목숨을 희생했다는 뜻이었다.
“그 인간이 더 살아 숨 쉬면서, 수많은 무고한 인생이 사라지겠지. 그때 숨을 끊어 놓았어야 했는데……. 황궁에서는 또 남모르게 수십 개의 시체가 버려질걸.”
그가 직접 따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태연하게 마시던 그의 눈이 커졌다.
“뭐야?”
“어?”
“나 별로 차 안 좋아하는데…… 맛있네.”
아셰는 자신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차를 우려내는 것이라면 대륙 전체를 놓고 보아도 가장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내가 차를 잘 우려내는 것으로 유명했어. 내 궁에 차를 얻어 마시려고 오는 사람들도 꽤 되었다고. 사실 시약을 만드는 것과 차를 우리는 것은 한 끗 차이라는 말도 있지만, 어지간한 약제국 직원들보다는 내가 나을걸.”
이단이 감탄한 눈으로 자신의 잔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장식장 가득한 다기와 찻잎을 발견하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셰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여기는 내 서재 겸 응접실이야. 저 공간은 침실로 이어지고. 보통 아무 일 없으면 여기서 시간을 보내. 가끔 비밀 통로로 다니엘, 그러니까 전하가 오시기 때문에 시녀들은 거의 들어오지 않아. 방음 마법도 꽤 탄탄하게 쳐져 있고.”
“그럼 아까 말을 걸었던 사람이…….”
“응. 당연히 다니엘인 줄 알았지.”
아셰의 말에 이단은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친한 오라비라고 해도 왕위에 올랐다면 경어를 써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맞는데, 다니엘이 원하지 않아. 그래서 그냥 둘이 있을 때엔 예전처럼 대하는 거야.”
“넌?”
“나?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녀는 조금 더 큰 다기를 꺼내, 새로운 찻잎을 우리며 말했다.
“어차피 5년 뒤에 죽을 건데, 그런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아.”
“5년?”
“정확히 말하면 4년 반. 원래 즉시 사형 당해도 이상할 게 없지만…… 시체의 성분 분석은 정확히 5년 후에 가능해. 다니엘은 5년 후에 그 성분 분석을 모두 한 뒤에 결정해도 된다고 우겼어. 어차피 성분 분석해 봐야 내가 독살한 것 맞는데.”
금세 새로운 차가 우려졌다. 아셰는 생긋 웃으며 새로운 잔을 이단의 앞에 두었다.
“마시기 싫으면 안 마셔도 돼.”
“그럴 리가.”
예전에, 이 모든 일이 있기 전에는 차를 우리고 있으면 시녀들조차 한 잔 달라고 조르곤 했다. 독살이 밝혀진 후 아셰에게 차는 혼자만의 것이 되었다. 가끔 친구인 리젠이 와서 차를 함께 마셔 주곤 했지만 편한 자리는 아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닥치고 나서야, 아셰는 누군가에게 차를 대접하고 함께 마시는 일을 자신이 얼마나 좋아하던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다 마시고 가. 이 정도면 7년 전의 술값은 한 것 같은데.”
아셰의 말에, 이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묘한 표정을 보며 그녀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가 오늘 한 번 찾아오고 말 것 같지 않아서 그녀는 먼저 상냥하게 말했다.
“다니엘은 절대 이 시간에는 오지 않아. 잠자리에 일찍 드는 편이거든. 오고 싶으면 지금 이 시간 이후에 와.”
“난 심심하던 차에 좋은데, 넌?”
“나?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녀의 평온한 표정을 이단은 한동안 바라보다가, 잔을 모두 비운 뒤 천천히 일어서 비밀 통로를 통해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부터 아셰의 유일한 친구인 리젠이 찾아왔다. 평민 출신이자 산하기관인 약제국에 근무하고 있는 그녀는 아셰의 시녀들이 눈총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꿋꿋이 아셰를 보러 왔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는 너무 정의로운 여자라서 자신의 독살을 밝혀내고 난 뒤 모두의 앞에서 진실을 이야기했고, 또 너무 정이 깊은 여자라서 그 와중에 꼬박꼬박 아셰를 찾아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