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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71/256)

  

12화.

아셰는 자신의 궁에 돌아온 뒤, 자신도 모르게 아주 옛날에 배운 마법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도 마법을 잘하지 못했다. 본디 아메탄 왕국의 왕족들은 황족과는 다르게 마력을 갈무리하는 능력이 특출 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린 시절에는 불이라도 잘 붙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리 기를 써 봐도 시시한 담배 연기 같은 매캐한 냄새만 날 뿐이었다. 아셰가 마법을 더 못 쓰게 되어서가 아니라, 그저 대륙 전체에 존재했던 마력이 사라지는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제국의 문명은 마력으로 인한 마법이다. 모든 아이템들은 마력을 기반으로 개발되었다. 그런데 그 마력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권력을 누려 왔던 제국 황제의 힘도 약해지고, 그러니 반란군까지 이토록 오랫동안 토벌하지 못하고 있겠지. 변화의 시대에 재빠르게 적응해야 한다는 루벤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아무리 제국에게 그동안 충성을 바쳐 왔다지만, 지는 해가 분명하다면 얼른 다른 노선을 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예전부터 일관적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아셰가 궁에 돌아와 다 식은 피칸파이를 먹고 있는데, 왕궁의 비밀 통로를 통해 다니엘이 들어왔다. 궁에는 왕족의 피난과 비상 상황에 대비한 여러 가지 비밀 통로가 있었고, 왕족들은 남들의 눈을 피하고 싶을 때 이 통로를 이용하곤 했다. 다니엘과 아셰는 동갑내기로 어렸을 때부터 친했기 때문에 서로의 궁을 자주 왕복해 왔다.

그녀는 다니엘이 열고 들어온 책장을 다시 닫으며, 그의 피로한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원래라면 차를 우려 주었을 테지만, 윌리엄의 죽음이 밝혀지고 나서 아셰는 차마 그에게 차를 한잔 주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밝게 웃으며 그의 앞에 앉았다.

“왜 이렇게 루벤이랑 친해? 예전에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이미 왕위에 올랐으니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싶어서. 난 윌리엄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어. 봉쇄령이 내리기 전의 기억은 거의 없으니 스타람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다니엘은 애초부터 왕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었다. 그저 형인 윌리엄의 도움이 되어 주고 싶어했을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왕위에 앉은 그가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아셰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제왕 교육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왕위의 무게는 엄청났다. 만일 지금 아셰에게 아메탄의 왕이 되라고 하면 정말 도망쳐 버리고 싶을 것이다. 다니엘을 이 자리에 앉힌 건 결국 아셰의 독살 때문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다니엘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아셰뿐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나는 너무 무서워.”

그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그녀뿐이었다. 아셰는 어쩌면 그가 자신에게 5년의 시간을 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앉게 될 왕위를 무서워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벤은 여전히 왕궁이 답답하다면서 떠도는 삶을 살았으니 아셰마저 없어진다면 다니엘은 정말 혼자가 된다.

“변화가 눈에 보인다는 건, 두려운 시대를 산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나는 윌리엄의 친제국주의적 정책이 오히려 믿음이 안 가. 아마 우리가 더 윌리엄보다 어리고, 더 늦게 대학에서 마법을 배웠기 때문일까. 마력이 사라진다는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잖아.”

“그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지.”

아셰에게 가장 큰 능력이 있다면, 상대의 원하는 바를 본능적으로 알아낸다는 것이었다. 다니엘은 지금 그녀에게 ‘불안함을 들어 주는 오랜 형제’의 역할을 바라고 있었다. 그 정도는 당연히 해 줄 수 있었고, 5년 동안의 유예 기간을 준 것에 대한 대가이기도 했으며, 조금 더 면밀하게는 어쨌든 국왕이라는 권력을 가진 자이니 최대한 잘 보이면 좋다는 계산이 깔려 있기도 했다.

“공화정도 무서워. 왕족의 권력 기반인 세습을 아예 부정하는 거잖아. 아셰, 나는 내가 원래 알았던 체계나 법칙, 역사와 문화가 모두 흔들리는 느낌이야. 아슬아슬한 벼랑길을 걷고 있는데,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어. 시대가 토해 내는 새로운 가치들을 내가 어떻게 다뤄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

“잘하고 있어.”

아셰는 사실 딱히 진심은 아니었지만 그가 원하는 대답은 해 줄 수 있었다.

“우리는 제국과 달라. 황족은 오로지 마력을 다룰 수 있다는 그 대단한 핏줄 하나로 제국을 통치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결정’하고 ‘선도’하는 역할을 하는 왕족이잖아. 마력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달라지는 건 없어. 봐, 난 원래부터 리젠보다도 마법을 못 썼는걸.”

“아…….”

“제국의 황제는 폭군이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난 거야. 오빠가 아메탄 왕국을 잘 이끌어 나가면 그 누구도 공화정을 원하지 않을 거야. 이럴 때일수록, 변화가 극심한 세상일수록 오빠가 가장 현명하고 믿음직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남겨. 폭풍우 치는 이 풍랑 속에서 방향키를 잡을 사람은 아메탄 왕족뿐이라는 것을 보여 줘.”

다니엘은 두 눈을 문질렀다. 아셰는 자신의 위로가 성공했음을 알았고, 자신과 똑같이 닮은 금발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동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시대가 변한다는 건 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아셰에게는 별일이 아닐지 몰라도, 아메탄 왕조의 대를 이어 가고 있는 다니엘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하지만 루벤에게 너무 휘둘리지는 마. 내가 보기에 루벤은 너무 스타람 섬을 좋아해. 전기? 그게 정말로 마력을 대체할 수 있을까? 루벤은 태생이 반골이기 때문에 그냥 제국이 제멋대로 하는 게 싫은 것일 수도 있어. 확실히 시원시원하고 개방적인 사람이지만…… 믿어도 될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어.”

“난 봉쇄령 이전에 너무 어려서, 스타람 문화를 잘 몰라. 루벤이야 봉쇄령 전의 기억이 있다고 해도…… 대학에서 전기공학도 배워 봤다 하니. 그러니 의견을 들을 수밖에 없지.”

아셰는 턱을 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왕위에 오른 형제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아메탄 왕국의 부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법도에 따라, 루벤이 일부러 다니엘을 흔들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잘 모르기 때문에, 계속 어영부영한 결정밖에 내릴 수가 없어.”

다니엘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왕위에 앉고 나서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황제가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어. 반란군의 세력은 점점 더 커질 거야. 만일 정말로 반란군이 승리하여 공화국 정부라도 세우면, 우리는 분명히 대외적으로 제국의 편을 들었다는 책임을 져야 할 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드러내 놓고 반란군과 스타람의 편에 서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커.”

“그래서 결국 그런 결정을 한 거야?”

아까 회의에서, 뮤엘튼 공작과 로즈리는 거세게 반대 의견을 냈다. 체제를 뒤흔드는 공화국 정부의 사람을 대체 왜 도와주며, 제국과의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즉시 황제에게 송환해야 하지 않겠냐는 주장이었다. 만일 예전 같았다면 당연히 황제에게 알아서 충성했겠지만, 지금은 아셰가 봐도 상황이 좀 달랐다. 애초에 예전 같았다면 황제가 이토록 반란군 진압에 쩔쩔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일 매력적이었던 건 제국이 모른다는 거였지. 난 루벤처럼 스타람 섬의 편을 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제국에 맹목적인 믿음을 가질 수도 없었어. 만일 제국이 정말로 지는 해라면, 난 미래를 위해 이 정도 투자는 해 둘 수 있어. 임시 총독을 한 달 동안 보호해 줬다는 명분.”

“잘했어. 약소국은 어쩔 수 없지.”

어쨌든 이단은 아메탄 왕궁에서 한 달 동안 비밀리에 신변을 보호받게 되었다.

“고마워. 내 마음을 읽어 주고, 찬성표를 던져 줘서.”

“뭘. 잊었어? 난 오빠를 지지한다니까.”

그녀는 쓰게 웃었다. 예전에 공개적으로 다니엘의 왕위를 지지했던 기억이 나서였다. 그때만 해도 윌리엄을 죽인 것이 들키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그녀는 다니엘의 의중을 읽고 찬성표를 던져 주었지만, 사실 예전의 첫키스 상대가 황제의 손에 죽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이상한 마음도 있었다.

“사실은 불안하긴 하지만, 이미 결정한 것, 어쩔 수 없겠지.”

그의 불안함을 아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메탄 왕궁은 여러 겹의 고대 마법이 덧씌워 있었기 때문에 마력을 조정할 수 있는 황족이 머문다는 것 자체가 위험 요소였다. 황족은 그들이 갖지 못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게다가 ‘제국은 절대 모른다’라며 호언장담했던 이단의 말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버거워, 아셰. 어릴 때부터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자리라 너무나도.”

아셰는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만일 그녀가 윌리엄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는 윌리엄이 앉았을 테고, 정치적인 노선이 확실한 윌리엄이었다면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황제에게 송환했을 것이다. 다니엘은 그저 옆에서 지지만 하면 되는 역할이었을 텐데. 그러나 이번에도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테니까.

이런 사고방식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괜찮아, 잘하고 있잖아. 생각보다 잘한다고 누구나 오빠를 훌륭하게 평가해. 그리고 난, 루벤이나 윌리엄처럼 자기가 옳다고 한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사람들보다는 선택 하나하나에 신중한 오빠가 훨씬 더 훌륭한 왕이라고 생각해.”

그녀는 끝까지 다니엘이 원하는 답을 내어놓으며 싱긋 웃었다.

“진심이야.”

사실은 상관없었다.

“……고마워. 그럼 난 가 볼게. 저녁 먹던 중에 미안해.”

“마음 털어놓을 사람이 없으면 언제든지 와.”

아셰는 다시 책장을 열어 주며 말했다. 다니엘은 비밀 통로를 통해 사라졌고, 그녀는 다시 태연히 탁자에 앉아 피칸파이를 꼭꼭 씹어 먹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어찌 변할지 모르는 국제 정세가 아니라 1차원적인 쾌락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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