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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70/256)

11화.

“저를 한 달 동안 왕궁에서 은신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나중에 공화국 정부가 들어섰을 때 그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지요. 지원군과 물자를 제국 쪽에 보냈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혁명군의 핵심 인물들은 제가 지금 아메탄 왕궁에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여기서 제가 제국으로 송환된다면 후폭풍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아셰는 얌전히 앉아 있었지만, 이미 다니엘의 의중을 알 것 같았다. 애초부터 여기에 부른 것 자체가 보호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리고 당연히 이 모든 것에 관심이 없을 그녀를 억지로 불러온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편을 들어 달라는 것이겠지.

“제국에서는 전혀 모르는 일임을 확신합니다. 황제는 너무 오랫동안 마약과 음주에 노출되어 총기가 떨어지며 능력 있는 비밀 조직도 운영하고 있지 못합니다. 저는 비밀리에 조용히 움직일 것이고, 아메탄 왕국에는 그 어떠한 피해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대체 왜…….”

뮤엘튼 공작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말했다.

“왜 하필 아메탄 왕국이지요? 저희는 왜 그런 위험 부담을 껴안아야 합니까?”

“갑자기 계획에 없던 암살을 무리하게 시도한 것이…… 아메탄 왕국에서 마력증폭약을 개발했다는 소문이 돌아서입니다.”

아셰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력증폭약이라면 이제는 죽고 없는, 천재 약제사 르엘라가 개발한 부작용이 심한 약이었다. 황제의 권위는 마력에서 나온다. 마력은 마법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문명의 기반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륙의 마력은 점차 고갈되고 있었고, 그로 인해 황제의 힘도 약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반란군에게는 마력증폭약의 개발이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책임을 묻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제 도주에는 어느 정도 아메탄 왕국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만 말씀드리고 싶군요. 어쨌든 제가 초대 통령이 될 때에 아메탄의 도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통령?”

뮤엘튼 공작이 두렵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국의 몰락은 예견된 수순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내가 가장 잘 아는데.”

공화정 개국을 얘기하는 그의 말투가 태연했다. 공화정이란 세습을 포함한 절대적인 권력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통령’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젠가는 물러난다는 말이었다.

“제국은 여전히 마력에 의한 중앙 집권이 너무 심하고, 안쪽에서부터 너무 썩어 들어가 재생이 불가능합니다. 대륙에 마력은 사라지고 있고, 이젠 새로운 체계가 필요합니다. 아메탄처럼 산하기관을 키우든가, 스타람 섬처럼 신분제를 철폐하든가. 황제의 말에 모두가 복종하던 시절은 마력이 융성할 때뿐이며, 황제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데 그 넓은 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지만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공화정이라니…….”

“세습은 독재를, 독재는 편협함을, 편협함은 부패를, 부패는 정체를 부르기 마련입니다.”

그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했으므로 그저 침묵이 흐를 뿐이었다. 이단이 한 명 한 명을 눈에 새겨 두겠다는 듯 빤히 쳐다보았기 때문에 다들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 듯했다. 처음엔 차림새 때문에 얕잡아 보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 차림새가 익숙해지고 나니 제국의 황자이자 반란군의 수장이어서 그런지 사람 자체가 내뿜는 위압감이 강렬했다. 아셰는 열다섯이었던 그의 눈빛도 만만치 않았음을 기억해 냈다.

“일단은 잠시 휴식 후, 회의를 계속하도록 합시다. 이단 황자는 그만 나가도 좋습니다.”

다니엘이 낮게 말했다. 일단 잠시 휴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아셰 또한 기지개를 켜며 한숨을 쉬었다. 이단은 처음 들어왔던 곳으로 나가기 전, 그녀의 앞에 섰다.

“아셰 왕녀?”

“…….”

그가 아셰에게 말을 걸 줄은 몰랐기 때문에, 아셰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얽히자마자 온몸이 긴장되어 표정마저 굳었다. 설마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예전의 일을 꺼내지는 않겠지? 아니, 사실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는 시간이 엉겁처럼 길었다.

“황궁의 식구가 되실 뻔했군요.”

그녀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7년 전 이야기를 꺼낼 생각은 아닌 듯했다.

“좋은 결정이었습니다. 칭찬해 주고 싶군요. 우리 어머니는 당신 또래에 죽었으니.”

“좋은 결정?”

아셰의 옆에 있던 로즈리가 날카롭게 물었다.

“지금, 한 나라의 태자를 암살한 것이 좋은 결정이라고 한 건가?”

그녀의 목소리가 분노에 떨리고 있었다. 아셰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리는데, 이단이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받아쳤다.

“오죽 못났으면 이복 여동생에게 암살당할까. 그럴 정도의 인덕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면 왕좌에 오르지 못하는 게 맞겠지. 권력만큼 죽음을 가까이 하라는 기본적인 왕가 교육도 못 받았나.”

로즈리가 먼저 반말을 쓰자, 이단은 전혀 거리낌 없이 말을 놓았다. 반말을 쓰는 그의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어서, 먼저 팩 쏘아붙였던 로즈리가 순식간에 위축될 정도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목숨을 건 싸움에 윤리 따위 들이대지 마라. 전쟁에 살생이 죄던가? 태어남 그 자체로 선전포고인 왕족들에게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나 보군.”

아까 그들의 앞에 앉아서 물 흐르는 듯이 말하던 그와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녀는 이상하게 그의 얼굴에서 난폭한 황제의 눈빛을 보았다. 지붕에서 그녀의 목에 단검을 들이대던 그 짐승 같은 잔인한 표정으로 그는 말을 이었다.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함부로 대했겠지. 처음부터 이복 여동생이 자신을 암살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여겼다면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이런 미친……. 아비를 암살하려 한 패륜아 주제에…….”

지금까지 그 누구도 로즈리에게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분노한 로즈리가 번쩍 손을 들었다. 아셰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외교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한숨을 쉬고, 이단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아니, 들어 보니 제가 잘못한 것이 맞군요.”

“…….”

“거기 들어가 황제를 죽였어야 했는데. 그럼 당신도 아메탄에 올 일조차 없었겠죠.”

“택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황제는 그 누구의 차도 마시지 않아. 특히나 자신의 여자가 주는 음식은 뭐든.”

어차피 후회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등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한 사실이었다. 그가 어느새 사태 진정을 위해 빠르게 다가온 루카스에게 붙잡혀 있는 로즈리를 보며 한마디 더 하고 떠났다.

“네 딸이 황제의 비로 간다고 생각해 봐. 그 지옥 같은 황궁에 네 딸을 밀어 넣느니 네가 네 남편을 직접 죽였을걸.”

“자, 이제 회의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아셰는 어차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제국의 내란이 어찌 되든 자신과 무슨 상관이랴. 7년 전, 독주를 마시며 처음 본 소녀와 함께 외로움을 달래던 그 소년은 언제부터 공화주의자가 되었고, 또 언제부터 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을 생각을 했을까.

“누누이 말했지만, 제국은 지는 해고.”

2왕자 루벤은 이단을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답게, 단호한 어조로 주장했다.

“제국에 전쟁 물자와 지원군을 보낸다면, 이 정도 보험은 들어 놔야지. 게다가 한 달만 보호하면 되는데, 아무런 위험 부담도 없잖아?”

“왜 부담이 없습니까? 황제께서 알기라도 하시면 경을 칩니다. 그리고 아메탄 왕국은 개국 이래 늘 제국에게 충성을 바쳐 왔습니다. 의리를 지켜야죠.”

“의리는 무슨.”

루벤은 코웃음을 쳤다.

“그냥 힘없으니 납작 엎드려 있었던 거지, 제국에서 우리를 길들이려고 갖다 붙인 좋은 말에 현혹되지 말자고. 자국의 이익이 우선 아냐?”

“그래도 제국은 우리의 형님 같은 국가입니다.”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게다가 공화정이라뇨.”

뮤엘튼 공작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허 웃었다.

“아메탄은 왕정 국가입니다. 제국에서 혁명이 성공해서 공화정 정부가 들어서면, 우리의 입지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어찌 왕족이 되신 분께서 공화정 정부를 지원한단 말입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로즈리 역시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셰는 턱을 괴고 반박을 시작하는 루벤을 바라보았다.

“체제의 전복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냐. 고작 금서 몇 권으로 혁명군이 일어선 것 같아? 혁명군이 일어선 것은 황제의 폭정 때문이야. 머리가 아니라 배가 반응한 거고, 자존심이 아니라 굶주림이 반응한 거라고. 아메탄과는 상황이 달라. 그리고 설사 공화정이 우리에게 위협이 된다 하여도.”

루벤이 평상시의 말버릇과 경어를 섞어 날카롭게 말하고 있는 동안, 다니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력이 사라지는 이 시점에, 대륙의 변화는 당연해. 손 놓고 있다 보면, 우리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마력 아이템들을 바라보며 추위와 굶주림, 온갖 불편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걸. 국민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옆의 공화정 국가보다 우리를 더 위협하는 것이지.”

루벤은 아주 옛날부터 궁 밖을 돌아다니며 평민들에 섞여 여기저기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확실히 귀족들하고만 교류하던 윌리엄과 생각이 많이 달랐다. 다니엘은 조용히 듣고 있더니 아셰를 바라보며 말했다.

“투표를 하겠습니다.”

아셰는 다니엘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이 정도 계산은 할 수 있었다. 이 회의 자리에, 로즈리가 있어서 당연히 그녀가 불편해 할 법한 이런 긴급한 사안에 그녀를 부른 이유가 있었다. 다니엘도 바보가 아닌데, 이런 사안에 대하여 아셰가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반대부터 손을 들죠.”

수사국장 루카스가 말했다. 선발된 우수한 엘리트 평민들만이 왕립마법대학을 거쳐 들어오는 산하기관은 존재의 의의가 객관성과 전문성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결국 투표권을 가진 사람은 루벤, 다니엘, 뮤엘튼, 로즈리, 그리고 아셰였다. 애초부터 뮤엘튼과 로즈리는 윌리엄을 지지했던 친제국파로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반대했을 사람들이었다. 예상대로 뮤엘튼과 로즈리가 손을 들었다.

“둘이군요.”

아셰가 이 자리에 없었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다니엘이 이렇게 무리해서 그녀를 부른 이유는, 자신의 편을 들어 달라는 뜻이겠지. 그리고 이런 구도에서 다니엘의 뜻은 명확했다.

“그럼 찬성하시는 분들, 손을 들어 주십시오.”

다니엘, 루벤, 아셰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셋이군요.”

아셰는 다니엘을 향해 씩 웃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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