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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69/256)

  

10화.

초코칩 쿠키 생각을 하고 있던 아셰는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자신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모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황제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반란군의 수장이 바로 그의 둘째 아들이라고? 게다가 황족은 핏줄로 유전되는 강력한 마법의 힘이 세습의 근원인데, 바로 그 황족이 공화국 정부의 임시 총독을 맡을 예정이라고? 하나부터 열까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모두가 놀랐는지, 로즈리와 뮤엘튼 공작이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아셰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이토록 놀란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이미 왕궁에 와 있는 상태인데요…….”

루카스는 한숨을 쉬며, 이 대목에서 루벤을 바라보았다. 2왕자인 루벤은 아셰의 기억에 아주 옛날부터 반제국파였다. 제국은 무너지며, 반란은 성공하고, 마력이 사라지는 만큼 스타람의 전기 기술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급진파였다. 여러모로 제국파였던 윌리엄과는 반대 노선을 타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분명히 그가 개입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제 스타람 섬의 유명한 가수, 리한 카드민이 망명해 오면서 국경에 엄청난 혼란이 있었는데요, 그 틈을 타서 국경을 넘어왔다고 합니다.”

다니엘이 중앙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다. 배경 설명이 이어졌다. 제국의 황자가 황제를 시해하려다가 실패하게 되자, 국경을 넘어 한 달간의 보호 요청을 해 왔다는 것이었다. 요즈음 제국은 정말 시끄러웠는데, 반란군이 잠시 머물렀다는 이유로 황제가 직접 영지 하나를 아예 초토화시킨 라가닐 대학살 사건을 생각해 보면 아메탄에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지경이었다.

“아직 제국에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며, 황자인 이단은 한 달 정도만 보호를 해 주면 반란군들과 합류하여 떠나겠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한 달이요?”

뮤엘튼 공작이 한숨을 쉬었다.

“이거, 제국에 들키면 전쟁입니다. 그냥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논의할 거리가 아닌 것 같은데.”

루벤이 날카로운 눈을 치켜뜨며 한심하다는 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문제는, 반란군이자 이단의 군대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점이지. 상대는 제국의 황자고, 게다가 스타람이 반란군의 배후에 있다는데.”

“스타람? 그 마력도 없는 외딴 섬이 뭘 할 수 있다고요?”

“마력은 없지만 재력이 되지. 마력이 사라진 지금, 이미 마법의 시대는 저물고 자본과 기술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 반란군이 황자가 없어진다고 해서 반란을 멈출까? 제2의 이단, 제3의 이단을 만들어 내겠지.”

“제국은 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이번 반란 역시 지나가는 바람일 수도 있지요.”

“반란군의 기지로 꼽히고 있는 키리니 산맥이 우리 아메탄의 국경에 접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돼. 반란군이 반란에 성공할 경우 황자를 넘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뮤엘튼 공작과 루벤이 설전을 벌일 동안 다니엘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민 중인 다니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정치적 노선은 언제나 중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었다. 그동안 회의에 자리 지킴이 정도로 참여하고 있었던 아셰의 생각으로는, 윌리엄이라면 제국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노선을 택했을 테니 이단을 제국에 보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루벤은 언제나 ‘제국은 곧 저물 것이다’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스타람 섬이 배후에 있다는 이단을 당당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지지 성명이나 내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이래저래 외부의 환경에 존망을 걸어야 하는 것이 약소국의 운명이다. 아셰는 고민에 휩싸인 다니엘의 선택을 기다리며 가만히 테이블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제국의 황자가 오든 말든, 보호를 하든 말든, 아셰에게 남은 시간은 정확히 4년 반이었다. 처음엔 호기롭게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갈 방도를 찾으려 했지만, 시간이 좀 흐르자 그렇게까지 삶을 이어 가야 하는 건지 결정하지 못했다. 저승의 윌리엄이 듣는다면 기함하겠지만, 생각해 보면 애초에 아셰는 단순히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 그를 죽인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를 해하려고 한 것에 복수하고자 독살을 계획했다.

“……일단은 이단 황자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이 좋겠죠.”

다니엘이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몇 명의 외국인조차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가 어떻게 그 수많은 반란군을 이끌겠습니까?”

반대로 말하면, 설득해 볼 여지를 주겠다는 소리였다. 미리 준비되어 있는 건지, 그가 눈짓을 하자 회의장 문이 열렸다.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능구렁이 다 되었다고 아셰는 생각했다. 정치 안 했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계산적이기 그지없었다. 이미 다 정해 놓고, 의견을 내는 것까지 확인한 다음 민주적인 척하기는. 그가 언제나 대외적인 자리에서 습관적으로 존대를 쓰는 것도 아셰의 눈에는 더 속을 보여 주지 않는 것 같은 연막처럼 보였다. 아셰는 피식 웃은 채로 턱을 괴고 멍하니 기다렸다. 만들어진 정적이 조금 흐르고 나자 마치 짜 맞춘 듯이 루카스가 말했다.

“전하께서 우리 모두가 그의 말을 듣고 결정하는 것이 좋다 여기셔서 회의에 잠시 참석시킬까 합니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왕의 결정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단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토론은 시작될 것이다. 루카스는 회의장 옆의 비밀 문을 열어, 한 사람을 데려왔다. 아셰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몇 년 만이지? 7년인가? 계산도 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전이었다. 그녀의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검붉은 머리의 풍채 좋은 청년이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태도로 외국의 비밀 회의장에 천연덕스럽게 들어와 앉았다. 평민들이나 입는 린넨 셔츠와 질이 좋지 않은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검고 깊은 눈이 풍기는 기운 때문에 잠시 회의장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의 눈이 잠시 아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를 기억하고 있구나. 아셰는 그 짧은 눈 맞춤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 사람을 죽여.’

그는 그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을까? 그래서 아셰는 오라버니를 독살했다.

‘어리고 잘생긴 남자와 키스 한 번은 해 보고 싶다면, 내가 해 줄게.’

그때 아셰의 나이 열여섯, 이단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존댓말과 반말을 섞은 엉망진창의 대화였고, 그 치기 어린 나이에만 할 수 있는 헛짓거리이기도 했다.

제국의 황궁에서 마주친 이후론 다시는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하지도 못한 시기에 아메탄 왕국의 왕궁에서 만나다니 참 미래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 독주를 들이켜던 소년은 제 아비에게 칼을 겨누는 반란군의 수장이 되었고, 시집가고 싶은 상대의 조건을 꼽아 보던 소녀는 제 오라버니를 죽인 살인자가 되었다.

“2황자 이단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전혀 예법에 맞지 않는 말에 옆에 앉아 있던 로즈리가 움찔했지만, 아셰는 속으로 여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왕가의 둘째들은 다 저런가? 루벤도 항상 예법 같은 건 개나 주라면서 시정잡배의 말투를 쓰곤 했다. 그때에도 성숙해 보이던 소년의 외관은 완전한 청년이 되어 선은 더 굵어지고, 목소리는 더 낮아졌으며 키도 훌쩍 커 있었다.

그러나 맨 처음 짐승처럼 날카롭고 사납다고 생각한 눈매는 성장하면서 더욱더 자신의 아비, 제국의 황제를 닮아 있었다. 아셰는 그의 시선의 끝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피칸파이도, 초코칩 쿠키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의식할 뿐인데도 이상하게 온몸이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원래 황궁에서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는데 실패하고, 쫓기는 몸이 되어 서부 지역의 혁명군과 합류하지 못했습니다. 그…… 암살이 다소 갑작스럽게 시도된 바람에.”

이단은 물 흐르는 듯이 말했다.

“제국 내에서 혁명군을 만나기도 전에 신변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국의 국경 내에서는 황제가 개인의 마력을 추적하는 게 가능합니다. 마침 유명인 하나가 아메탄 왕국에 망명한다고 하여 국경이 혼잡했고, 그 사이에 급한 대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혁명군 부대는 한 달 뒤에 호위대를 국경 근처로 보내겠다고 했으니 한 달만 이곳에서 몸을 숨기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귀족 대표, 뮤엘튼 공작은 날카롭게 물었다.

“아메탄 왕궁까지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습니까?”

“연줄을 타다 보니. 혁명군의 뒤에 스타람이 있다는 것은 이미 다 아시는 일이지요? 공화정의 씨앗이 된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이 스타람 섬에서 나온 책 아닙니까. 혁명군은 거의 대다수가 평민 출신인데 전쟁에는 돈이 들지요. 당연히 돈은 스타람에서 옵니다.”

아셰는 한숨을 쉬었다. 일이 복잡했다. 스타람 섬은 아카날 총통이 이끌고 있는 현재 유일한 공화정 국가로, 마력이 전혀 없어 대륙과는 전혀 다른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제국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 아메탄 왕국은 10년 전 제국이 스타람에 내린 봉쇄령에 응하여 그동안 모든 교역을 끊은 채였다. 스타람 섬은 대륙의 봉쇄령을 비웃듯이 마법이 아닌 전기 기술을 기반으로 아주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 냈다.

“스타람 섬과 거래하던 밀수꾼이 연결해 주더군요.”

“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설명하지.”

한때 왕위 계승을 눈앞에 두었던 2왕자 루벤이 끼어들었다. 그는 일찍이부터 대륙에 점차 마력이 사라지고 있으니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야 하며 스타람 섬과의 교역을 시작하여 새로운 동력을 찾아야 한다 주장한 골수 개혁파였다.

“내가 어쩌다가 소식을 듣고 왕궁에서 보호해 주겠다고 했어.”

아셰나 다니엘은 원래부터 왕이 되고 싶어 하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옛날부터 외교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다니엘은 윌리엄과의 우애가 깊어 당연히 친제국파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왕위에 오르고 나서는 루벤과 합이 잘 맞는지 슬슬 제국과의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루벤이 연결되었다고 하더라도 다니엘의 묵인이 없었다면 이런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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