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68/256)

  

9화.

아셰는 어차피 죽으려고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것, 5년 동안 맛있는 것이나 먹고 책이나 읽다가 사형 선고가 내려지면 스스로 조용히 목숨을 끊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발버둥 쳤는데, 결국 못 벗어나는구나.’

그녀는 궁에 감금되어, 바깥의 작은 정원을 바라보며 매일같이 생각했다.

‘망가트리지 않으려고 애써도, 애초부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인생이 아니었네.’

가끔 유일한 친구인 리젠에게 놀러 오라고 했고, 리젠은 평소와 같이 종종 놀러 와 그녀의 말상대가 되어 주었지만, 다시는 옛날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대륙의 문명은 마법으로 흥한 것이고, 그래서 황제는 흉포하기 그지없어도 제국을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마력은 영원한 힘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고갈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20년간 마력은 꾸준히 줄어 왔고, 그 속도는 점점 더 가속이 되어 마법사들이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든 사태에 다다랐다. 반면, 아주 옛날부터 황제의 저주를 받아 마법을 쓰지 못하던 스타람 섬에서는 전기라는 기술을 개발하여 새로운 문명을 건설해 냈다.

그렇게 모든 것이 격변하던 시대에, 자신의 배다른 오빠를 죽이고 그 죄가 이미 밝혀져서, 5년간의 유예를 선고 받아 시한부처럼 살고 있던 아셰에게 한 손님이 찾아왔다.

1. 뜻밖의 손님

“왕녀님, 오늘은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없으세요?”

아셰는 턱을 괴고 생각에 한동안 잠겨 있다가,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열심히 고민한 후 말했다.

“피칸파이와 단호박 스프.”

“네. 또 필요한 것은요?”

“약제국의 리젠 하카트에게 책 한 권을 받아 와. 렌토 지역 약초의 특성, 이라는 책이야.”

아셰의 말을 모두 기억한 시녀, 제니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궁을 나섰다. 아셰는 비가 주룩주룩 오는 궁 밖을 바라보며 또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길게 늘어뜨린 금발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부스스한 얼굴로 멍한 시선을 자신도 모르는 곳으로 던졌다. 심부름을 나간 제니의 뒷모습이 정원의 외길을 따라 사라졌다. 제니는 약제국에 들러 책 한 권을 받고, 주방에 가서 아셰의 식사를 가져올 것이다. 아셰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외출이었다.

한때 대륙에서 꽤 아름답다 소문이 났을 정도로 매력 있었고, 꽤나 똑 부러진 성격이었던 그녀는 아메탄 왕국의 유일한 왕녀였다. 그녀의 배다른 동갑내기 오라버니 다니엘은 아메탄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현재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자신의 궁에 감금당한 상태였다.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녀, 제니가 주방에 가서 그녀의 끼니를 가져왔다. 아셰는 매 끼니를 상당히 신중하게 골랐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남은 인생에 유일한 즐거움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모두 들킨 마당에 죽는 것이 아쉽지는 않지만 그 전에 먹고 싶은 것들은 양껏 먹고 나서 세상을 뜨고 싶었다. 어차피 그녀는 5년 동안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셈이었다.

“다기를 데워 줄래? 차를 한 잔 내려 마셔야겠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서 찻잎을 꺼냈다. 매일 일어나는 일인데도 시녀가 움찔하며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아셰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 5년 동안 먹고 싶은 것은 모두 먹고, 읽고 싶은 책은 모두 읽은 뒤 죽을 테니.”

그녀는 유예 처분이 난 범죄자였다. 살인의 증거는 시체에서 마력이 모두 빠지는 5년 후에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녀가 범인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오라버니이자 왕위에 오른 다니엘은 그저 5년간의 유예 기간을 준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빨리 죽이지, 왜 5년간 사람을 가두어 놓나 하고 생각했는데 하루하루 살다 보니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시녀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그녀가 차를 우려낼 때마다 시녀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셰를 지켜보곤 했다. 아셰는 시녀들에게 너그럽고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궁에 있는 몇 안 되는 시녀들은 진심으로 그녀를 아꼈다. 시녀들은 차에 대해서도, 독초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아셰가 그 둘에 대한 지식이 방대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혹여나 차를 이용해 자살이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그대로 읽혀서, 아셰는 피식 웃었다.

동갑내기 오라버니이자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다니엘은 왜, 왜 자신을 살려 두었을까. 바로 결정을 내려도 될 분위기였는데, 왜 직접적인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형을 집행할 수 없다며 윌리엄의 처인 로즈리의 항의를 끝까지 무시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어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와, 왕녀님.”

제니가 예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빈손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다른 시녀들의 눈까지 동그랗게 변했다. 아셰는 차를 우리다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왕가의 회의가 급하게 열린다고 합니다. 아셰 왕녀님도 지금 당장 모셔 오라는 전하의 명이 계셨습니다.”

“안 간다고 전해.”

“이미, 왕녀님은 아마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중대 사안이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이 중요하다 하셨습니다. 꼭 참석하셔야 한다고…….”

왕가의 회의라면 굉장히 비밀스러운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진행하겠다는, 그만큼 왕의 책임이 상당히 크게 따르는 자리였다. 아셰는 한숨을 쉬고 거울 앞에 앉았다. 시녀 몇몇이 달라붙어 재빠르게 그녀의 머리를 올리고, 단장을 도와주었다. 최소한의 단장을 한 그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며칠 만에 나가는 궁이었다.

제 오라비를 죽인 것을 왕궁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왕족끼리의 살해는 다른 살인과 그 성격이 다르다 해도, 워낙에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아셰가 나타나면 모두가 신기하다는 듯이 그녀를 흘끔거렸다. 이런 시선이야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지만, 왕가의 회의에서 로즈리를 마주치는 것은 조금 힘들었다. 그녀는 윌리엄의 처로, 어린 딸인 지젤과 항상 함께 참석했다.

아셰의 어머니인 샤틴은 외국인이라는 핑계로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왕가의 회의에 샤틴이 참석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예상하고 있는 바였다. 아셰는 자리에 앉아 구성원을 살펴보았다. 먼저 왕위에 오른 동갑내기 배다른 오라버니이자 3왕자였던 다니엘은 가장 화려한 중앙의 좌석에서 아셰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지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은 대체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는지 모를 또 다른 오라버니인 2왕자였던 루벤이 그의 옆에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국가의 모든 일을 비밀리에 처리하는 수사국장 루카스와 귀족 대표 뮤엘튼 공작도 제 자리에 착석해 있었다.

“오셨군요.”

아셰를 똑바로 바라보며 로즈리가 말했다.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어쨌든 로즈리는 아셰 때문에 남편을 잃었고, 지젤은 아버지를 잃었다.

“네. 오랜만입니다.”

그녀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괜히 미안한 태도를 보이는 건 서로에게 더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기 때문에 진심 어린 사과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정말 최소한의 인원만 모았구나. 아셰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차피 결정은 다니엘이 내릴 테지만,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최소한을 모았다는 건, 이미 결론을 내렸거나, 정말로 중대한 비밀이라는 뜻이었다.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아셰가 도착함으로써 모든 인원이 모인 셈이다. 수사국장 루카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제국에서 일어난 반란이 쉽게 잡히지 않는 사태를 모두 아실 것입니다. 마력이 점차 고갈되면서 황제 폐하의 마법에 여러 제약이 생겼기 때문인데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어쨌든 회의의 배경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절차였기 때문에 아셰는 얌전히 고개를 루카스에게 고정한 채 경청했다.

“요 며칠 전, 반란군들은 스스로를 혁명군이라고 칭하며 공화국 정부를 세우겠다고 천명한 뒤, 지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 수가 깜짝 놀랄 정도로 많았고, 황제 폐하께서 친히 지지 성명을 발표한 지역을 모두 진압하고 계신다는 것도 다 아실 겁니다.”

아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폭정이 도를 넘은 데다, 오래된 기근에도 불구하고 황궁의 증축을 위해 세금을 더 걷기로 했다는 결정에 반란군들이 우후죽순 일어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들의 구심점이 되는 어떠한 세력이 있다는 건 모두가 예상 가능한 일이었으나, 그게 공화정이라는 건 조금 충격적이긴 했다. 지도자를 세습이 아닌 방식으로 선출한다……. 작은 스타람 섬에서나 가능한 그 황당무계한 정치 체계를 주장하면서 반란군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우리는 제국의 동생뻘 되는 국가로서 당연히 반란 진압을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달 내에 지원군과 자원 물자를 보낼 예정입니다. 그런데 지금…….”

루카스는 아주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의외의 인물에게서 아메탄 왕궁에 잠시 보호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아셰는 사실 별생각이 없었다. 제국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지금도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한참 전부터 삶의 의지를 벼랑 끝에 걸어 둔 채 살았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피칸파이 말고 다른 것을 말할 걸 그랬나, 하는 의미 없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제국의 2황자 이단 아르마스 엔리히입니다. 반란군에 합류할 때까지 한 달의 시간 동안 아메탄 왕궁에서 머물게 해 달라고 비밀리에 보호를 요청했으며, 이후엔 실질적인 반란군의 지도자이자 공화국 정부의 임시 총독으로 발표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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