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167/256)

  

8화.

거기 가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고 말지. 유서를 써서 윌리엄의 위선을 폭로하고 여기서 죽어 버릴 테다. 겉으로만 온화하고 합리적이며 부드러운 척하지, 결국엔 왕위에 정신이 팔려 여동생까지 팔아먹는 위선자. 더 억울한 것은, 그녀가 황제에게 간다고 해서 왕위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를 받치는 여러 가지 기둥 중 하나가 늘어나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목숨값에 비해 큰 대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기에.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동안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겠다, 고생 한번 안 하고 예쁜 장신구도 많이 가져 봤겠다, 친구와 즐겁게 대학 생활도 했겠다 크게 아쉬운 것도 없었다. 남자와 몸을 섞는 즐거움이 그렇게 크다는데, 아직 그 즐거움은 몰라도 적어도 젊고 잘생긴 그녀 또래의 남자와 키스도 한 번 해 보지 않았는가.

‘어리석은 생각이군.’

검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을 떠올리자, 그가 했던 말까지 생각났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는 게 옳지. 일단 태어났으면 무조건 끝까지 가 보는 게 맞아.’

정말 그럴까? 아셰는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아픈 두 뺨의 통증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억울함과 복수심이 차오르게 했다.

‘왕녀님,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마세요. 어떤 미친놈이 왕녀님을 괴롭혀서 죽고 싶거든, 그놈을 죽이세요.’

그녀가 가진 무기란 여자에게만 해독 작용을 가지는 비상과 그 해독제. 그러나 제국에 가서 제국의 황제를 죽이는 것이란 모르긴 몰라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셰는 그가 과연 그녀의 궁에서 차라도 한 잔 마실지 궁금했다. 그런 권력을 가지고, 사방에 적이 있다면 분명 엄청나게 몸을 사릴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게다가 황제의 힘은 그녀에게 미지수였다……. 차를 보기만 해도 그녀의 비상을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황제를 시해할 수 있는 확률보다는, 확실히…….

‘그렇다면, 누군가 저를 해하려고 한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아도 되나요? 아무리 오라버니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아셰 왕녀님께 당할 정도라면 어차피 그 나약함이 왕좌의 재목이 못 되니 뜻대로 하시옵소서.’

일주일 후, 윌리엄은 약속대로 아침에 찾아왔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윌리엄의 발치에 엎드려 울며 빌었다.

“윌리엄, 오라버니, 제발…… 제발…… 한 번만 내 말 좀 들어줘. 제국은 정말 가기 싫어. 거기 보내는 건, 날 죽이는 거야…….”

“……동생아, 실망스럽구나.”

윌리엄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그와 똑 닮은 푸른 눈을 마주쳤다.

“게다가 제국은…… 오빠, 마력은 줄어들고 있어. 느낄 수 있잖아. 황제는 이제 반란군도 한 번에 진압을 못해. 마력이 줄어들면 황제의 권력도 줄어. 꼭 황제가 앞으로도 건재할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적어도 내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는 건재해.”

“정말로, 함께 커 오면서 조금의 정도 없었어?”

아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조금도, 조금도 날 생각하는 마음이 없어? 배는 다르지만 난 오빠의 동생이야. 그동안 난 오빠를 위해서 미약하지만 정말 많이 노력했어……. 제국의 황제가 아닌 다른 곳에…… 다른 곳에 가면 안 돼? 정말 아무 곳이나……. 난 열여섯 살 때, 그 사람이 자신의 비를 베는 장면을 봤어…….”

“그렇다면 이렇게 반항하면 안 되지.”

회의 때마다 보았던 그의 온화하고 고상했던 얼굴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아셰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음을 알았다. 차라리 2왕자 루벤은 시정잡배같이 껄렁껄렁하고 조금 다혈질이며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는 성향이 있어도 이렇게까지 앞과 뒤가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그의 발치에 엎드려 있던 그녀를 세게 발로 찼다. 그는 이미 폭력이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차였다.

“비를 셋 죽였다고? 그럼 다섯은 살아 있잖아. 반이 넘는 확률인데 대체 왜 이렇게 나를 실망시키는 거지? 넌 어차피 가야 하고, 가야 한다면 네 역할을 다 하고 갔으면 좋겠구나.”

아셰는 그가 그녀를 조금도 아끼지 않았음을, 그동안 그녀를 아끼는 척했던 것은 딱히 무관심을 표현할 필요가 없어서였음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그의 발길에 거세게 한 번 차이자 흉통에 거대한 통증이 느껴지며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숨을 헉헉대다가, 호흡이 돌아오자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다.

“오라비의 정을…… 확인하고 싶어서. 한 번만 더…… 기회가 있어도 좋을 것 같아서.”

“……기회.”

윌리엄은 그녀의 표정에 떠오른 체념을 확인한 후 씩 웃었다.

“왕족에게 기회는 탄생뿐이다. 그리고 제왕 교육을 받지 않았나? 오누이의 정을 따질 정도로 우리가 여유롭게 탄생하지는 않았지. 다음 생애에 평민 오누이로 태어나면 내가 너를 그 누구보다도 아껴 주마.”

아셰는 일어서서 평소처럼 정성껏 우린 차를 대접하고, 같은 주전자에서 차를 따라 함께 마셨다. 쪼로록, 찻물을 따르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윌리엄은 그녀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잘 부탁해. 어쩔 수 없다면 가야지, 어떡하겠어.”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말한 ‘기회’는 윌리엄에게 주었던 것임을 아마 그는 무덤에 들어가서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이 씩 웃었다.

“넌 꽤 영리했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제국에 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표정을 지어 달라는 것까지 부탁하고 흡족하게 떠났다.

아셰는 적어도 그 날 밤에는 비상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에, 완전 범죄를 위해 산하기관인 약제국에 근무하는 그녀의 대학 동기이자 가장 친한 친구, 리젠까지 불렀다. 같은 차를 아침에 윌리엄과 함께 마셨다며 은근슬쩍 정보도 흘렸다. 리젠은 함께 차를 마시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돌아갔다.

그 날 그녀의 아버지였던 아메탄의 왕, 제펠탄까지 명을 다한 것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 이후는 그녀의 계획대로였다. 윌리엄은 그 날 밤 죽었고, 아셰는 용의자로 바로 체포되었으나 같은 차를 마셨다는 리젠의 증언으로 성분 검사를 마친 뒤 풀려났다. 아셰, 리젠, 윌리엄의 몸에서 같은 차의 성분이 나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은 황후 테스티와 그의 아들 루벤이 윌리엄을 죽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윌리엄이 죽으면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루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윌리엄의 동생이자 아셰와 가장 친했던 다니엘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의 우애가 깊었던 것은 함께 자란 아셰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조용히 살던 다니엘은 루벤과 대립각을 세우며 왕위쟁탈전을 시작했고, 아셰는 본인과 친한 다니엘을 지지하며 왕위 계승을 포기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왕위쟁탈전이 공개적으로 시작된 왕가는 이제 누가 누굴 죽일지 알 수 없었고 왕위에 오른 사람은 외국인과 결혼할 필요가 없었기에 모든 혼담이 무효가 되었다. 왕위 계승은 포기했어도 어쨌든 절차상 아셰에게 들어온 혼담도 모두 무효가 되었다.

사실 아셰는 누가 왕이 되든 상관없었다. 루벤이 왕이 되면, 적어도 자신을 먼 구석에 박아 둘지라도 훗날 위험의 씨가 될 제국에는 보내지 않을 것이다. 다니엘이 왕이 되면, 굳이 루벤을 경계할 이유가 없어지므로 자신을 원하는 자리에 보내 줄 것이다. 다니엘은 어쨌든 뒤늦게 정치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윌리엄보다는 순수했고, 자신과의 친분도 훨씬 돈독했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다니엘은 자신과 가장 친했다. 대학까지 함께 다니며, 왕위와 거리가 먼 두 사람으로 유일한 유대감을 공유하기도 했다. 다니엘이라면 반드시 자신을 조용하고 안전한 곳으로 보내 줄 것이다.

“……이게 맞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셰는 밤마다 윌리엄의 꿈을 꿨고, 그래서 늘 수면제를 서랍에 두고 살았다. 아무리 먼저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타국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합리화해도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그 때, 아셰는 자신의 인생이 어떤 나락으로 한 번 떨어졌음을 예감했다. 사람을 한 번도 죽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음울하고 찐득찐득한 늪을 그녀는 항상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돌이킬 수 없으니까.”

그녀는 불면증에 시달리더라도 낮에는 항상 웃었으며, 마치 하나의 가면을 쓴 것처럼 행동했다. 윌리엄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인 지젤을 어르기도 하고, 윌리엄의 장례식에서 엉엉 울기도 했으며, 다니엘을 진심으로 응원하기도 했다. 속마음을 숨기는 건 아주 어릴 때부터 능했던 그녀의 특기였으니까.

그녀가 윌리엄을 독살할 수 있었던 건, 그 누구도 이 비상과 해독약을 모른다는 르엘라의 호언장담을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르엘라가 같은 왕족을 죽이라고 그 해독약을 가르쳐 준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러나 르엘라는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고,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셰는 끝까지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르엘라가 일기를 썼다는 건 아셰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르엘라의 일기장은 르엘라가 죽은 지 몇 년이 되어서야 리젠의 손에 들어갔고, 영리한 리젠은 단번에 모든 정황을 알아차렸다. 리젠은 아셰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지만, 객관성과 진실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산하기관 직원답게 그 사실을 모두에게 밝혔다.

리젠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셰는 그녀가 아주 밉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느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그녀 역시 리젠을 이용한 것이 분명했다. 왕족 살해는 다른 살인과 다르다는 원칙 아래, 왕가의 재판은 엄숙하게 치러졌으며,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윌리엄의 시체에서 마력이 모두 빠져 나가는 5년 후에 한 번 더 정확한 성분 분석을 시행한 뒤 처분을 결정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절대 지금 당장은 죽일 수 없다는 것이 다니엘의 확고한 주장이었다. 물론 그동안 궁에 감금되는 것은 당연했다.

실질적으로 5년간 삶이 유예된 셈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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