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아셰는 어린 시절과 똑같이 자라났다. 적당히 영악했고, 어느 정도 성깔도 있었으며, 본능적으로 짧은 대화를 통해 남자들의 환심을 사는 법도 알았다. 성장하며 점점 더 아름다워졌고 그 외모를 더 빛나게 가꾸기도 했다. 귀족 영애들과는 별로 가까이 지내지 않았으며,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친구 리젠 하카트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호의를 보였다. 그녀는 죽은 르엘라의 조카로 학교에서 친해진 평민 출신의 수재였다.
그동안 아셰는 왕족의 의무인 각종 회의에 참석하면서 정치적 계산으로 다니엘, 윌리엄과는 친하게 지냈고 루벤은 가까이 하기 힘든 성격이라 거리를 두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루벤만 빼고 나머지가 친하게 지내는 셈이었다.
보수파 윌리엄과 개혁파 루벤의 왕위쟁탈전은 상당히 첨예했고, 왕비 테스티의 세력도 만만치 않아서 귀족들은 거의 절반으로 갈라진 상태였다. 윌리엄을 진심으로 따르고 존경하는 다니엘과는 달리 사실 아셰는 자신의 혼사만 해결된다면 누가 왕이 되든 상관은 없었다. 윌리엄도 배가 같은 동생 다니엘은 진심으로 아꼈으나, 아셰는 그저 다니엘의 옆에 있는 부속물로 여기는 듯했다. 그러던 도중 그들은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혼담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제발 내가 고를 수 있게 해 줘. 한 번이라도 내가 무도회에서 만나 본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정말 싫은 자리는 가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녀는 온갖 무도회를 다니면서 ‘나중에 꼭 청혼을 넣겠다’라고 약속을 남기고 간 남자들을 기억하며 윌리엄에게 필사적으로 부탁했다. 윌리엄은 알았다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제펠탄의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그들의 혼사 문제는 태자인 윌리엄이 전통에 따라 주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실 아무런 힘도 없는, 시집가면 그대로 잊힐 왕녀의 혼사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아셰는 불안하게 기다렸다. 분명 그동안 내가 대외적으로 보여 준 지지에 나름대로의 성의를 보여 주겠지. 매일같이 몇 개씩 쌓이는 혼담의 명단을 보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윌리엄이 아침 일찍부터, 다니엘도 없이 혼자 그녀의 궁에 방문했다. 사실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혼담이 들어왔어.”
윌리엄은 아셰가 우려 준 차를 마시며 천천히 말했다. 아메탄 왕궁에서는 손님에게 차를 우려 주는 것이 예의였고, 아셰는 차를 우리는 솜씨가 뛰어났으므로 시녀에게 시키는 대신 직접 우려서 내오곤 했다. 나름 차를 잘 우리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시녀들까지 모두 물린 윌리엄이 꺼낸 말은 생각보다 단순해서,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하루 이틀이야? 아주 특별한 혼담인가 봐?”
아셰는 그 때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내심 윌리엄이 자신에게 딱 맞는 혼담이 들어와서 직접 왔나, 기대하기도 했다. 윌리엄이 아셰를 마음속 깊숙하게 아낀다는 생각은 못 해 봤지만, 그동안 쌓아 온 정이 있으니 마지막 혼처는 사실 최선을 다해 고르고 있나 싶었다. 현재 왕이자 아셰의 아버지인 제펠탄은 자리에 누워 제대로 된 언행이 불가능했다.
“제국이야.”
“어?”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의, 아홉 번째 비.”
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제국의 황제? 열여섯 때 본, 단칼에 여섯 번째 비를 죽이던 바로 그 남자? 아셰보다 30살은 많아 보이고, 심지어 옆에 있던 여자를 아무 이유 없이 분풀이 대상으로 때리던 바로 그 짐승 같던 그 남자……?
“마, 말도 안 돼……. 황제께서 나를 왜…….”
“우리도 깜짝 놀랐어. 황제가 왜 아메탄의 왕녀를 비로 삼을까……. 훨씬 더 대단한 여자들이 줄을 섰을 텐데, 왜 아무런 뒷배경도 없는 너를……. 믿을 수 없어 알아보니, 반란군들의 세가 만만치 않아서 아메탄을 혼약으로 묶어 두고 싶어 한다는 의도가 있었어. 아메탄은 작지만 부유한 곳이라……. 게다가 누군가가 너를 굉장히 아름답다고 칭한 모양이더구나.”
아셰의 손이 덜덜 떨렸다.
“대단한 자리지. 만일 가서 황제의 총애를 얻고, 아들이라도 낳으면, 게다가 그 아들이 황제의 눈에 들어 대라도 잇게 된다면…… 너는 상상할 수도 없는 부와 명예를 갖게 될 거야.”
“말했잖아. 나 그런 거 필요 없어. 아홉 번째 비가 거기까지 올라갈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 난 원래 그런 데에 별로 욕심도 없었어. 알잖아.”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나, 나는 싫어. 그 자리만은 안 돼. 개죽음 당하기도 싫고, 부와 명예가 따를 수도 있는 자리이니 남들의 투기도 심할 테고, 심지어 황궁이니 자유라고는 조금도 없을 거야. 아, 안 돼. 싫어.”
“나는…….”
윌리엄은 아셰의 말을 제대로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네가 갔으면 좋겠어.”
“어?”
“루벤의 세력이 너무 커. 그런데 네가 이 시점에 제국에 가 준다면, 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네가 황제의 비가 된다면, 그 사실 하나로도 내게는 큰 힘이 돼. 우리는 제국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뭐?”
아셰가 드레스를 움켜쥐며 말했다. 이미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내가 정말로 황제의 총애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황제가 무슨 사람인 줄은 알지? 희대의 폭군이라는 걸 알 사람들은 다 알아. 자신의 비를 셋이나 죽인 사람이야. 그것도 술자리에서 한순간의 충동으로. 근데 지금 그 자리에 나를 밀어 넣겠다고?”
“…….”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가 그렇게 졸랐는데? 내가 원하는 자리가 무슨 자리인 줄 알잖아. 남들은 제국에 간다며 축하할 수 있어. 잘 모르니까. 하지만 오라버니는 알잖아. 혼담이 들어와도 막아 줘야 하는 것 아니야? 내가 끔찍하게 싫어할 것을 알면서…….”
“다니엘도 황제의 누이 중 하나와 결혼해. 너만 제국과 연결되는 건 아니야.”
“다니엘이랑 내가 같아?”
윌리엄의 변하지 않는 표정과 침묵을 보고, 아셰는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이미 결정했음을 직감했다. 지금 윌리엄은, 왕위를 위해서 그녀를 사지로 밀어 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다니엘은 내게 힘이 된다면 기쁘게 제국과의 혼사를 치르겠다고 했어. 심지어 다니엘은 그 여자의 얼굴도 몰라. 그런데 너는 내게 힘이 되어 주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얼마나 오랫동안 아셰가 그녀의 위치에서 아등바등했건, 그런 건 이미 제국에서 혼담이 들어온 이상 모두 무시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상상하던 최악의 미래가, 아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미래가 아가리를 벌리고 그녀를 삼키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가 빠르게 일어나 윌리엄의 손을 잡았다.
“아니야, 안 돼. 차라리 제국의 다른 귀족은 안 될까……. 황제는 아니야. 제발…….”
“이 계집애가 성가시게, 진짜!”
뺨에 불이 튀었다. 아셰는 누군가에게 맞아 본 것이 난생처음이었다. 남자의 악력 때문에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휘청인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윌리엄을 보았다. 윌리엄은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다른 쪽 뺨을 올려붙였다. 아셰는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 숨을 헐떡였다.
“난 네가 기쁘게 가기를 원해. 황제는 자신의 여자를 이것보다 더 세게 때리는 것을 좋아한다던데, 표정이 그 따위면 가자마자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녀의 이복 오빠는 차가운 푸른 눈으로, 잔인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동안 윌리엄이 받고 있던 어질고 온화하다는 평가가 모두 거짓임을 알았다. 무릇 왕족이라면 겉과 속이 다르고,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법이라지만 이렇게 철저하게 이기적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복동생인 자신을 대상으로.
“일주일 후에 다시 올게.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 때 발표하도록 하자.”
“…….”
아셰는 두 뺨이 얼얼하여 제대로 된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남자에게 맞는다는 것이 이토록 무서운 일일 줄은 몰랐다. 더 이상 말을 꺼내는 것이 무서웠다. 와들와들 몸이 떨려 머리조차 돌아가지 않았다.
“네가 떠나면 네 어머니 샤틴은 궁에 혼자 남게 되지. 만일 네가 웃으며 제국으로 얌전히 가 준다면, 그 분에 넘치는 자리를 영광으로 여기며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내가 왕이 된다면…… 샤틴을 잘 보살펴 주마.”
윌리엄은 생각해 보라며 자리를 떴지만, 사실상 그녀에게 통보를 하고 나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사람들에게 발표할 때 내색하지 말라고. 심지어 그녀의 어머니 샤틴까지 언급했다.
그녀는 궁에 홀로 조용히 앉아 부어오른 뺨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그녀는 어쨌든 선택권이 없었고, 윌리엄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 이제 와서 루벤에게 붙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의 뒤에 있는 왕비 테스티는 그녀도 싫었다. 아셰는 자신이 막다른 길에 다다랐음을 알았다.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크고 부강한 국가였다. 황제는 마법의 기반이 되는 힘, 마력을 자유자재로 융통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능력은 핏줄로 세습되기 때문에 황제의 존재는 그 자체가 권력이었다. 지금은 대륙에서 자꾸만 마력이 사라지고 있어서 예전 같지 않다지만, 그래도 스타람 섬이라는 작은 섬나라가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모든 마력을 뺏기고 원시인처럼 미개해졌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이 없으면 밤에도 매캐하고 번거로운 촛불 같은 것으로만 빛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춥고 더우며 지저분할 것이다. 마력이라는 건 그토록 대단한 힘이었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아메탄 왕족과는 태생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황궁이라 하면 모든 권력과 부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그녀는 순종적이고 요염한 자태로 황제를 휘어잡을 자신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끊임없이 언제 죽을지 몰라, 그것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을지 몰라 불안해하며 떨어야 할 것이다. 조용히 숨어 지낸다 해도 황제의 비라는 자리이므로 남들의 투기와 질투에 시달려야 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샤틴은 왕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테스티에게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