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165/256)

  

6화.

떨어진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담백하고 편안하던 아까의 분위기가 확실히 미묘해져 있었다. 별것 아니라며 담담하게 굴던 이단의 눈에도 초점이 없었다. 그가 그녀를 일으키며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미, 미안……. 새, 생각보다…… 좋아서 멈추기가…….”

아셰는 그 말에 붉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면서도 크게 웃고 말았다.

“결국 사과하시네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지러운 느낌이었다. 아셰는 다시 구두를 집어 들고, 숨을 가다듬으며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별이 밝은 밤 황궁에서 황자님과…… 첫키스가 적당히 낭만적이어서 너무 다행이에요. 어느 늙은이랑 출렁거리는 침대에서 한다고 상상하면 끔찍했던지라……. 그럼 만수무강하시고…… 어…….”

생각해 보면 적당히 영악하고, 어느 정도 성깔머리도 있으며 최선을 다해 정치적인 노선도 탈 줄 알던 그녀가 이토록 당황한 것은 난생처음이기도 했다. 둘 다 태연하고 담담하게 마무리할 줄 알고 시작한 일인데, 소년 소녀는 난생처음 겪는 열기 때문에 둘 다 허둥대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기분을 무시하며 그녀가 재빨리 계단으로 향하다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그에게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어, 근데…….”

“어?”

“그래서, 황자님은 세 가지 조건이 맞는 두 여자 중 어떤 여자를 선택하신다고 대답하셨나요?”

이단은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귀 뒤를 긁었다.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궁금해?”

“네.”

“그럼 어리고 잘생긴 남자랑 키스해 봤다며 미련 없이 죽지 말고, 끝까지 잘 살아남아 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 사람을 죽여. 혹시라도 먼 훗날 마주치면 내가 대답해 주지.”

“제가 무슨 능력이 있어 아무나 죽일 수 있겠냐마는, 삶의 호기심은 하나 남겨 두도록 하지요.”

아셰는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빤히 바라보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아셰의 인생에서 유일한 도망이었다. 그 이후 그녀는 그 어떤 것에도 도망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무엇에 도망치는지도 모르는 채 붉어진 얼굴로 연회장에 돌아온 뒤, 그녀를 찾던 동갑내기 오라버니 다니엘과 마주쳤다.

“어? 아셰? 볼이 왜 이렇게 빨갛지? 드레스는 왜 이 모양이고?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니.”

그녀는 급히 드레스에 묻은 흙을 털면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별일 없었어.”

다니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열 살 때까지는 키가 고만고만했는데, 열여섯이 되자 다니엘은 아셰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커져 있었다. 그녀와 똑같은, 결 좋은 금발 머리와 물빛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까 여자 하나 죽는 거 봤어?”

조각을 깎아 놓은 것같이 생긴 이복형제 다니엘은 낮게 속삭였다.

“오래 있을 곳이 못 되는 것 같아. 그냥 기분이 나빠. 다들 제국에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이해가 가면서도 또 이해가 안 돼. 저게 황제라고? 온 백성의 어버이? 세상에, 테스티도 저 인간보다는 낫겠어.”

“심지어 여섯 번째 비였대. 그래도 다니엘, 말을 조심하는 게 좋겠어. 잔인하지만, 마력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상 황제는 절대적이니까.”

“물론 알지. 아는데…….”

그가 아셰의 금발 머리를 쓰다듬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약소국은 서럽구나.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그런 생각이 무슨 소용이야.”

이제 들어가자는 의미로, 아셰가 다니엘의 팔짱을 끼면서 중얼거렸다.

“어차피 왕위에서 먼, 외국인과 결혼해야 할 우리가 개입할 문제는 아니잖아. 당장 제국인과 혼인할지도 모르는 운명인데.”

“그러게.”

다니엘이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동갑내기에, 어차피 왕위 싸움과 거리가 멀다는 공통점을 가진 두 오누이는 어렸을 때부터 친했다. 서로 부담 없이 함께 공부함은 물론,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없었으므로 서운함도 없었다. 다니엘은 동복형제인 윌리엄을 믿고 따랐지만 가끔은 배다른 여동생 아셰가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윌리엄은 어쨌든 왕이 될 태자였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났으니까.

그의 바람이 있다면 억울하게 죽은 그의 친모의 사망 유인을 밝혀내는 것뿐이고, 윌리엄이 왕위에 오르면 당연히 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와 아셰는 그냥 왕족의 방계로 잊힐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16세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거의 대다수의 사람이 그렇듯이, 결국엔 16세에 상상하던 자신의 모습과 아주 다른 삶을 살게 되는 법이다.

* * *

아셰는 왕족이 필수로 졸업해야 하는 교육 기관, 왕립마법대학에 들어가기 전 여러 가지 제왕 교육을 받았는데 약초학도 그중 하나였다. 각종 독살에 대비한 맞춤식 수업은 항상 그렇듯이 다니엘과 함께 받았고, 약초학 선생님이자 아메탄 왕국의 산하기관 약제국의 천재 연구원이었던 르엘라 하카트가 그 교육을 맡았다.

르엘라는 아셰의 ‘어디로 시집가서 괴로운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장 잘 이해해 준 최초의 어른이기도 했다. 아셰의 모친 샤틴은 전혀 그녀에게 보호자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어린 시절 르엘라에게 많이 의지했다. 르엘라는 아메탄 왕국이 낳은 전무후무한 약초학의 천재로 다른 사람은 상상하지도 못할 조합으로 여러 가지 시약을 만들어 내는, 왕조차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인재였다.

그녀는 외로움 때문에 르엘라를 종종 불렀는데, 보통 그녀가 연구한 비상을 보여 준다는 핑계를 댔다. 르엘라는 수업이 끝났는데도 왕족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불편해하면서도 그녀가 우려낸 차를 마시러 종종 놀러 왔다. 아셰의 차 우리는 솜씨는 아메탄 왕궁에서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조합이 독특하긴 하지만 평범한 비상이에요. 비슷한 약을 스무 개도 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아셰는 머리를 쿵 박고 절망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갖고 있을 거야.”

“왜요? 누구 죽이시게요? 완전 쉽게 들킬 텐데.”

“아니, 내가 먹으려고.”

그것은 진심이기도 했지만, 르엘라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며 최대한 연민을 이끌어 내려는 그녀 자체의 계산이기도 했다. 보통 왕족의 교육을 맡는 교사들은 부지불식간에 누군가의 편을 들게 될까 봐 몹시 조심하곤 한다. 그러나 아셰는 ‘왕위와 관계없는 불쌍한 여자애’의 위치를 영악하게 잘 선정하고 있었고, 그래서 르엘라는 아셰와 가까이 하는 것에 대해 심리적인 장벽이 낮았다.

“진짜, 삶이 너무 고달파질 때, 내가 먹을 거야. 어느 나라에 어느 남자랑 결혼할지 어떻게 알겠어? 죽는 게 더 나아질 때가 오면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죽어 버려야지.”

“왕녀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바마마는 나한테 애정이 조금도 없어. 정치적으로 유용하면 아마 광인한테라도 보낼걸? 난 정말 엄마처럼 사느니 죽어 버릴 거야.”

그녀가 조금 슬펐던 건, 그녀의 입장을 이해해 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유일한 왕녀로서, 알지 못하는 외국의 남자에게 보내진다는 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모친뿐이었다. 그녀는 드레스가 많지 않아도, 평민이라고 무시를 당하더라도 르엘라의 조카라는 리젠 같은 삶을 살았으면 했다.

그러나 어느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르엘라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들이닥쳤다. 그녀는 아셰를 진정으로 아끼긴 했는지 그 비상에 대하여 한 번 더 언급했다.

“이건 왕녀님만 알고 계세요.”

“응?”

“왕녀님이 만든 그 비상, 이런 재료들을 넣으면 해독할 수 있어요.”

“……아닐 것 같은데? 갈퀴나무랑 상성이 안 맞잖아.”

“여자랑 남자의 몸은 다르지요. 여자는 달거리를 하니까.”

“……아.”

“왕녀님은 여자잖아요.”

“어머나, 그러면…….”

“남자에게는 해독 작용을 못하지요.”

아셰는 그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르엘라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르엘라는 지금 여자에게만 해독이 되는 비상과 해독제의 짝을 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원래 왕족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은 절대 왕족들 모두가 공유할 수 없는 지식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공정한 상태에서 서로 경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르엘라는 아셰가 전혀 왕위에 관련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원칙을 깬 뒤 세상에 단둘만 아는 비밀을 알려 준 셈이었다.

“이런 해독은, 사실 아무도 몰라요. 이 세상에서, 왕녀님과 저만의 비밀이에요.”

남편과 차를 마실 때, 비상과 함께 해독제를 넣으면 남자에게만 효과를 발휘하는 셈이었다. 같은 찻주전자에서 차를 따라 마셔도, 심지어 바꿔 마시더라도, 아셰는 살아남을 수 있고 남편은 죽는다. 게다가 르엘라와 자신밖에 모른다고 하니 들킬 일도 없었다.

“왕녀님,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마세요. 어떤 미친놈이 왕녀님을 괴롭혀서 죽고 싶거든, 그놈을 죽이세요. 저는…… 왕녀님이 죽는 것을 정말로 원치 않아요.”

아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비상과 짝이 되는 해독제를 만들어 두고, 서랍 깊숙한 곳에 보관했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 르엘라는 갑자기 이유 없이 미쳤다가 조용히 죽었다. 아셰는 비상과 해독제가 생긴 뒤, 그 누구에게도 죽어 버리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왕녀님, 죽지 마세요.’라는 말을 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여 아셰는 르엘라의 장례식에서 참 많이 울었다.

그리고 아주 나중에서야, 절대 죽지 말고 차라리 상대를 죽이라던 사람이 한 명은 더 있음을 기억해 냈다. 이미 기억 속에서 흐릿해진 제국의 어떤 소년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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