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냥, 딱 정해진 자리가 있잖아. 난…… 그 어느 곳에도 내 자리가 없어. 내 인생의 선택권이 없다는 것이 불안해. 그래서 자꾸 외줄을 타는 기분이 들어.”
이단은 잠시 그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다가, 밤하늘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도 바라는 자리가 있을 것 아냐? 그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해 만나고자 하는 최상의 신랑감은 어떤 사람인데?”
“별거 없지만 상당히 어려워.”
그녀는 손가락을 접었다.
“너무 큰 나라는 안 돼. 내가 왕녀니까 하급 귀족한테 갈 리는 없고, 그렇다고 약소국 출신이 정실로 갈 리도 없으니 만일 제국 같은 나라에 오게 된다면 누군가의 첩실이겠지. 난 여자들끼리 질투하고 남편 한 명 가지고 싸우고, 이런 것 너무 싫어. 내가 지겹게 봤던 거니까.”
“음.”
“너무 부유한 나라도 안 돼. 내가 정실로 가더라도 분명 여유가 생기면 첩실을 둘 수도 있겠지. 정실도 피곤할 것 같아. 우리 선왕비 마마님도 정말 힘드셨어. 왠지 사고로 돌아가신 것도 현 왕비 마마가 꾸민 일 같은데 말이야.”
술김에 내뱉었다가 아셰는 너무 위험한 말을 한 것 같아 아차 싶어 살짝 이단을 곁눈질했지만,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아서 안심했다. 제국의 2황자는 기본적으로 단순하고 명쾌한 성격인 듯했다.
“부인이 너 하나였으면 하는 거구나.”
“그렇지. 그러니까 그냥 돈도 별로 없고 권력도 그저 그래서 여자는 하나만 들이는 남자였으면 좋겠어. 작은 공국이나, 한스팀처럼 국력이 아주 쇠한 곳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일관적이군.”
“세상에 즐거운 것은 하나도 없는데, 배우고 익히는 건 좋았어. 특히 난 약초학을 좋아해. 조용히 공부나 하고 연구나 하면서 평온하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해. 이 정도의 자유는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 약초학이라는 것이 독과 관련되어 있으니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 철저히 감시당하겠지. 아무도 안 죽여도 되고, 아무도 의심 안 해도 되는 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뭐, 이 정도?”
그녀가 생각하는 가장 필수적인 조건은 다 든 셈이다. 발그레한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단은 가만히 듣고 있더니 조용히 말했다.
“예전에 내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있었어. 배우자를 고를 때 중요하다 생각하는 세 가지를 말하면 참고하시겠다고 하더군. 그 당시 열 살이었던 나는 생각 없이 대답했지. 첫째, 대화가 통하는 교양 있는 여자일 것. 둘째, 그 집안이 탐욕스럽지 않아 고상할 것. 셋째, 신체가 동하는 외모일 것.”
“음.”
“어머님은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그렇다면 세 가지를 모두 똑같이 만족하는 여자 둘이 있다고 했을 때 둘 중 그 세 가지 말고 어느 차이점이 있는 여자를 고를 것이냐고 물으셨어.”
저 멀리서 음악 소리는 아련하게 들려오고, 화려한 불빛과 밝은 달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아셰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딸딸하게 올라오는 취기, 세상과 벗어나 있는 것 같은 몽롱함, 평소라면 눈도 못 마주칠 제국의 황자와 나누는 취중진담.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낮은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무 큰 권력이 없을 것, 첩실을 두지 않는 정실 자리일 것, 학업에 대한 자유가 있을 것. 세 가지를 모두 만족하는 똑같은 남자 둘이 있다고 했을 때 둘 중 그 세 가지 말고 어느 차이점이 있는 남자를 고를 거야?”
아셰는 그 물음에 키득키득 웃으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럼 당연히 어리고 잘생긴 남자지! 평생을 살 건데 나도 내 신체가 동해야 행복할 것 아냐?”
그녀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이단은 재미있다는 듯이 한참을 큭큭 하고 웃었다. 그가 너무 황당하다는 듯이 웃자, 아셰가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바마마뻘의 남자를 만난다고 생각해 봐. 키스하는 것도 끔찍할 거야. 우리 아바마마는 거의 나랑 40년이 차이 나는걸. 근데 그런 전례가 꽤 많다는 게 문제야.”
“나는 너처럼 어린 영애가 내 앞에서 신체가 동한다느니 키스를 한다느니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음전한 왕녀 노릇 하지 말라면서요, 위대하신 제국의 황자마마.”
아셰는 혀를 쏙 빼냈다. 물론 이것은 그녀 자체의 발랄한 매력이 아닌, 그녀가 아주 옛날부터 체득한 사람에게서 호감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보낸 그 수많은 시간은 절대 헛되지 않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들이 잠깐 함께 하는 여자에게 원하는 대화와 적절한 선을 정확하게 인지할 줄 알았으며, 그녀의 곁에 있는 이 소년이 지금 예의와 예법을 갖춘 영애보다 장난스럽고 털털한 술친구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게다가 제국의 황자라면 어차피 아셰와 이어질 가능성도 적었다. 황자의 정실이 되는 것은 당연히 언감생심이고, 첩실 자리도 힘들 것이다. 물론 그런 자리에 아셰도 가고 싶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냥 이 순간 서로 즐겁게 놀다가 헤어지면 된다는 뜻이었다. 그 모든 계산은 아이러니하게 아셰가 이 소년 앞에서 솔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메탄 왕국의 왕녀가 개차반이라는 소문이 나면 안 되니까 남들 다 가지는 애인을 만들 수도 없고……. 나중에 정말 오늘내일하는 노인과 결혼하게 되면 몰래 잘생긴 하인이라도 꼬셔서 키스라도 해 볼까…… 이런 생각을 하곤 해. 한 번 태어났는데, 나도 잘생기고 젊은 남자랑 해 볼 수 있는 건 해 보고 죽어야지. 그게 그렇게 좋다는데.”
“……전쟁터에서 연회가 열리면 그렇게 문란하고 환락적이라고 하던데.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남녀 모두 본능에 충실하다고 해. 비슷한 맥락 같군. 죽음을 가까이 생각하고 있나 봐.”
“당연하지. 내가 가장 관심 있는 것이 비상에 대한 연구야.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되면 바로 죽을 거야. 아직은 두려움뿐이고 딱히 그럴 이유는 없으니까 살아 있는 거지만.”
“어리석군.”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는 게 옳지. 일단 태어났으면 무조건 끝까지 가 보는 게 맞아. 버티고 버티더라도, 주변 사람들을 다 죽이더라도 네가 사는 것이 우선이야.”
“제왕 교육도 제국을 따라 했나 봐.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과 비슷하네. 일단은 좋은 건 다 해 보고 죽을 테니 걱정 마. 태어난 것도 억울한데 무서워만 하다가 죽을 순 없잖아? 다가올 불행이 무섭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걱정하는 데 쓸 수는 없으니까.”
아셰는 후, 하고 한숨을 쉬며 또다시 먼 곳을 응시했다. 너무 늦어지면 다니엘이 자신을 찾을 것이기 때문에 슬슬 내려갈 생각이었다. 술만 좀 깨고 가야겠다 싶어 그녀가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잠시 즐거웠던, 다시는 못 볼 술친구에게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럼, 2황자님, 각자의 위치에서 행복하게 잘 살아 보자. 미안하다는 사과는 끝까지 못 들었지만 술값으로 칠게. 사실 아직도 손목이 욱신거리거든.”
“……그래?”
아셰가 퍼렇게 멍이 들기 시작한 손목을 내밀자 이단의 표정에 그제야 미안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대화를 하며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잠시 고민하다가 거만하게 말했다.
“사과를 할 수는 없어.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할 테니까. 하지만 네 소원은 들어주지.”
“어?”
“어리고 잘생긴 남자와 키스 한 번은 해 보고 싶다면, 내가 해 줄게.”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모두 맞기는 한데, 상황 자체가 어이없어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우리 어머님이 말씀하시길, 세 가지 이후에 나온 그 조건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배우자감이라고 하셨어. 이성과 계산이 아닌 본능과 진심이 원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언제나 그 조건을 조심하라고. 그 앞에서는 언제나 마음이 약해져 정신을 잃게 될 수 있다고 하셨지. 넌 무조건 어리고 잘생기면 되는 것 같으니, 어느 시골짝 하인보다는 내가 낫지 않을까?”
“어…… 말은 다 맞는데……. 너, 키스해 본 적 있어?”
아셰의 미심쩍은 듯한 질문에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한 번도 없지만…… 별달리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지. 처음 술을 마시는 순간과 뭐가 달라?”
아셰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말은 모두 맞았고, 그녀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었다. 어차피 어디 팔려 갈지 모르는 신세, 눈앞의 이 소년보다 잘생긴 또래가 나타날 가능성은 적었다. 화려한 제국의 황궁은 발아래 펼쳐져 있고, 술기운에 볼은 붉어지고 심장이 뛰었다. 다시 만나지 못할 제국의 잘생긴 황자 정도면 첫키스 상대로 과분했다. 어차피 그녀는 그 어떤 남자도 진심으로 사랑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위치와 성격상 만일 사랑을 한다고 해도 딱히 인생의 커다란 변수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아셰는 길게 늘어뜨린 금발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심호흡을 했다.
“나도…… 한 번도 안 해 봤어. 소설에서만 읽었어. 나, 잘 못할 것 같은데…….”
“잘하고 못하고가 어디 있어? 그냥 하는 거지.”
그가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 아셰는 뱃속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아셰의 허리를 휘어 감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볼을 감싸며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꾹 눌렀다. 처음 느껴 보는 이상한 감각에 아셰는 눈을 꽉 감고,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그의 혀를 받아들이려고 살짝 입을 벌렸다.
만일 이게 키스라면 정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축축하고 부드러운,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지만 멈추고 싶지 않은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 생각보다 두꺼운 그의 혀도, 긴장한 티를 숨겼지만 어쩔 수 없이 전해지는 그의 떨리는 숨소리도, 그녀의 허리를 더 세게 휘감는 기분 좋은 그의 악력도. 척추를 타고 내려가는 것 같은 찌릿한 감각에 그녀는 발을 꽉 오므렸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그리고 밀착된 그의 가슴에서도 똑같이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안을 모두 헤집겠다는 듯이 점차 거칠게 움직였다.
그가 더 세게 그녀를 끌어안기 시작하자, 점점 더 허리가 꺾이며 뒤로 밀렸다. 몽롱하게 좋은 감정도 좋은 감정이지만, 더 깊이 혀를 밀어 넣는 그 때문에 숨이 막히기도 하고, 이러다가 못 버티고 쓰러질 것 같아서 그녀는 안간힘을 쓰고 그를 밀어냈다. 간신히 상체가 넘어가는 것을 버티고 있었지만 이미 몸이 반쯤 눕혀지다시피 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