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63/256)

4화.

소년의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왕족임을 밝혀도 전혀 놀라거나 기죽지 않는 태도가 오만했다. 아무리 허울뿐인 왕녀라도 누구나 겉으로는 그녀를 존중하는 문화에서 컸기에 아셰는 상당히 당황했다. 소년이 찬찬히 검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그래, 암살자라면 이렇게 허술하지는 않겠지.”

“……뭐?”

“언제든 제압 가능한 수준이니 일단 놓아는 주겠어.”

“저기.”

그의 무게가 천천히 사라졌다. 아셰는 몸을 일으키며 얼얼한 손목을 문질렀다.

“멋대로 사람의 목에 칼을 들이댔으면 사과부터 해야 하는 것 아냐? 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이 자리에 아메탄 왕국을 대표하여 온 왕족이니 나를 능멸하는 것은 아메탄 왕가 전체를 능멸하는 것…….”

“마실래?”

아셰의 서슬 퍼런 말이 전혀 안 들린다는 듯이, 핏빛 머리의 소년은 아셰의 옆에 앉아 와인 병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아셰는 그가 한참 전부터 여기 앉아 있었으며,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짙은 눈썹과 가무잡잡한 피부, 날렵한 눈매를 가진 소년은 상당히 잘생겼기 때문에 그녀는 살짝 할 말을 잃었다. 무도회에서 수많은 남자와 춤을 춰 본 그녀로서는 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다. 몸도 탄탄하고, 어깨도 넓고, 얼굴도 잘생기고, 심지어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난 병째 마시면 되니, 네가 이 컵을 쓰도록 해.”

“무슨 와인을 컵에다가…… 예의와 절차에 어긋나는 일인데.”

“예의와 절차? 아메탄의 예의와 절차라고 해 봤자 제국을 따른 것밖에 더 되나. 제국인이 괜찮다는데 웃기는 반응이군.”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소년이 건넨 나무 컵을 받아 들었다. 와인이 찰랑였다. 한 모금을 마신 아셰는 이 와인의 풍미가 상당히 좋으며 꽤 독하다는 것까지 알아차렸다. 그녀가 어쩔 수 없이 퍼지는 흡족한 웃음을 어쩌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어…….”

눈매가 낯이 익었다. 분명 처음 본 사람인데, 어디서 많이 본 눈매였다. 마치 짐승의 눈매처럼 날카롭고 거칠며 마주하기에 무언가 거리낌이 있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 눈매를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 내고 그대로 굳었다. 아까 제 첩실을 한칼에 베어 죽이던 황제의 눈매였다. 그러고 보니 아메탄 왕족을 무시하는 것 같은 저 말투와, 황궁의 비밀 통로를 알고 있다는 사실, 다짜고짜 암살을 의심했던 정황이 모두 하나의 가설을 지지하고 있었다.

황자들이 제 또래였다는 것을 기억해 낸 아셰의 목소리가 떨렸다.

“화, 화, 황자 전하?”

아셰가 입술을 달싹이며 속삭였다. 이렇게 보니 머릿속에 떠오른 둘의 얼굴이 너무나 닮아 있었다. 이어지는 그의 침묵으로, 스스로의 추측을 확신한 아셰는 재빨리 시선을 떨구며 덧붙였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미욱하여 알아보지 못한 저의 불찰…….”

“집어치워.”

그가 와인 병 주둥이에 그대로 입을 대고 꿀꺽꿀꺽 술을 삼켰다.

“이미 다 반말까지 써 버린 사이에 무슨. 어차피 다시는 볼 일 없는 사이이니 휴식처에서 뜻밖에 만난 하룻밤 술친구라고 해 두자. 술 잘 마셔?”

“어, 어느 정도? 그러나 황자 전하, 예법에…….”

“같은 말 또 해야 하나. 그 예법이 어디서 왔다고?”

그녀는 아무래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지 않아 보이는 그를 보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1황자라기에는 나이가 어려 보이고, 2황자가 아니라면 3황자일 것 같았다. 그가 그녀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피식 웃었다.

“2황자 이단 아르마스 엔리히야. 나도 연회장에서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여기에 올라와. 내 궁은 여기서 가까워서 음악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거든.”

“그, 그러시군요…….”

“야.”

그가 턱을 괴고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연회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대화나 하려고 귀한 술 내어 준 거 아니야. 죽을 각오로 올라온 네 기개가 마음에 들어 곁에 둔 것이니 음전한 왕녀의 가면을 쓰지 마라.”

아셰가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것이 있다면, 상대방의 호감을 사기 위한 방법을 빠르게 체득한다는 데에 있었다. 그것은 본능과 학습이 섞인 결과였는데, 예를 들어 제왕 교육을 해 주는 선생님들에게 어렵지 않게 호감과 동정을 사는 것과 비슷했다. 그녀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나무 컵에 든 와인을 꼴깍꼴깍 마시고는 캄캄한 밤하늘을 응시했다.

“알겠어. 목에 칼을 댄 채로 바락바락 소리까지 질렀는데 이제 와서 이러는 것도 웃기지.”

그제야 이단이 마음에 든다는 듯 씩 웃었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물컵과 술병을 부딪혔다. 여름 밤바람이 시원하게 그들을 감쌌다. 아셰는 술기운이 차차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구름이 없어서 별이 많네.”

그녀는 밤하늘에 보석같이 박힌 별을 응시하며 말했다.

“학자자리 별 8개가 이렇게 잘 보이는 건 드문 일인데. 보통 한두 개는 흐리잖아.”

“학자자리?”

“저기, 저렇게 별 8개.”

“음…….”

이단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별을 잇는 것 같은 손짓을 하며 말했다.

“제국에서는 저걸 목동자리라고 불러. 위의 별 세 개가 모자.”

“아, 정말? 이상하다. 별자리 이름 같은 것도 제국에서 왔을 텐데.”

아셰가 의아하다는 듯이 이어 중얼거렸다.

“아마도, 아메니티에는 평원이 얼마 없어서, 목동도 없어서 그랬나 봐. 옛날부터 아메탄은 학문을 장려하는 분위기였으니까. 제국처럼 드넓은 평원도, 풍부한 자원도, 넘치는 인구도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

아셰의 시무룩한 말에 이단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별은 그냥 별이야. 목동자리든, 학자자리든 다 괜한 의미 부여고, 어차피 별은 그냥 자기 자리에 있을 뿐인 거야. 자리가 중요하지, 이름이 뭐가 중요해?”

그의 말에 아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붕에서 누구랑 함께 앉아서 술 마시는 거 처음이야. 매일 혼자 앉아 있었는데.”

“나도 그래. 난 호위 무사들도 따돌리고 몰래 와.”

이단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래도 오늘은 류트의 생일이라, 끝까지 있으려고 했는데.”

류트라면 5황자의 이름이었다. 그녀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피를 보니까 기분이 나빠서 말이야.”

“불과 방금 전까지 내 목에 칼을 대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셰의 말에 이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실제로는 털 끝 하나도 안 베었어.”

“그래도 손목이 이렇게 얼얼한데. 발목에도 상처가 생겼다고.”

그녀가 드레스를 밀어 올리며 긁힌 상처를 보여 주었다. 이단이 고개를 갸웃했다.

“황궁의 비밀 장소에 무단 침입한 외국인에게 이 정도면 환대에 가까운 것 아닌가?”

“미안하다는 말은 못 듣겠네. 포기할게.”

“어차피 그 상황이 다시 와도 똑같이 행동할 테니 사과는 바라지 마라.”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아셰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를 싫어하나 봐?”

“그냥 그 상황이 싫은 거야.”

그가 또다시 술을 벌컥벌컥 마시기에, 아셰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따라서 나무 컵에 담긴 술을 단숨에 다 마셔 버렸다.

“너 술 잘하는구나. 꽤 독할 텐데.”

“그냥 뭐, 못 마시지는 않지. 근데 그 상황을 보고 안 싫을 사람이 있을까? 나부터도 기분이 확 나빠져서 더 이상 춤을 못 추겠던데.”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니까, 다들 익숙해진 거지.”

소년의 담담한 대답에 아셰는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어쩐지, 시체를 치우는 무사들부터 남은 분풀이로 이유 없이 맞았던 다른 여자들까지 모든 것에 망설임도, 당황도 없었다.

“넌 익숙해지지 않은 모양이구나.”

“우리 어머니가 저렇게 죽었으니까.”

이단은 술을 남김없이 다 마셔 버렸다. 그의 얼굴에도 취기가 올라 있었다. 아셰는 심장이 뛰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봐서 상당히 독주였음을 새삼 상기해 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버지의 손찌검을 무심결에 피했다는 이유로 연회에서 바로 베어졌어. 나는 춤을 추기엔 너무 어려서 유모의 곁에서 쿠키를 먹고 있었지. 마치 벌레를 죽이듯 어머니를 베어 밑으로 던지고, 순식간에 어머니의 시체는 이름 모를 자들이 치웠지. 난 그날 이후로 달달한 건 잘 못 먹어.”

“아…….”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안 되네.”

아셰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소년은 지금,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걸까? 괜히 동조했다가 잘못해서 모독죄로 잡혀가면 어쩌지 싶어 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이단의 얼굴에 드리워진 비참함이 너무 짙었기 때문에 이것이 연기면 너무 훌륭해서 속아 넘어가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역시 아까 황제의 모습에 충격을 적잖이 받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메탄의 왕족은 그렇게까지 개차반인 사람은 없었다. 황제처럼 마력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며 절대적인 권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귀족들의 견제도 받고 나름 산하기관의 조언도 받기 때문이었다. 마력이라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황제의 권력은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 모든 폭정을 용인 받는 것일까.

그가 우울한 얼굴로 턱을 괴어 먼 곳을 응시했다. 아셰는 남의 아픔을 알게 된 대가로 자신의 아픔도 하나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적을 원했다면 애초부터 아셰에게 나무 컵을 건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말이야, 아까 그 장면에서 내 미래를 본 것 같았어.”

“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를 너무 숨 막히게 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왕이 될 것 같은 형제에게 줄도 잘 서 보고, 이렇게 죽어라고 외국인들 오는 연회에서 수많은 사람과 춤추고 웃음을 흘려도…… 결국 잘될 가능성보다는 못 될 가능성이 높지.”

“무슨 소리야?”

“명색이 왕녀인데 호위 무사 하나 없는 처지를 보면 모르겠어?”

아셰는 무릎을 모아 앉은 뒤, 침울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메탄 왕국에서 왕위 계승에 실패한 모든 왕족은 외국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 권력도 뒷배도 없는 그녀가 갈 수 있는 혼처는 제 모친과 똑같은 어느 약소국 왕족의 첩실 자리나 나이 많은 귀족의 아내 자리라는 것, 일단 시집을 간 후에는 외로운 외국에서 아무도 지켜 주는 이 없이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것.

“별들은 좋겠다.”

그녀는 술에 취해서 애꿎은 별들을 바라보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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