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62/256)

  

3화.

대륙의 가장 강력한 국가, 이름도 없이 오로지 영원히 유일하다는 제국의 연회이니 외국의 유명 인사들이 모두 모일 것이 뻔했다. 그녀는 아메탄 왕국의 유일한 왕녀로 다니엘 왕자와 함께 참석했다. 그녀가 외국에 가는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고, 거대하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제국 황실의 무도회에서 그녀는 문득 멀미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메탄 왕국의 왕녀님이시지요? 아리땁다는 말은 들어왔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아메탄 왕국은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평소엔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다양한 곳에서 온 사람들을 보며 새삼 아셰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졌다. 만일 그녀가 어머니의 영향만 받지 않았더라도, 멋진 남자에게 시집가서 사랑받으며 살 수 있다는 달콤한 환상에 젖어 신랑감을 상상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그녀는 어릴 때부터 ‘불행하지만 않은 결혼 생활’을 꿈꿨기 때문에 모든 남자들이 지뢰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 아셰 사이나카라 아메탄입니다.”

그녀는 익숙하게 사뿐히 인사하면서도 어지러움에 머리가 빙빙 돌 것 같았다. 연회장은 지나치게 크고 무서울 정도로 화려했다. 국적이 다양한 남자들과 춤을 추고, 눈웃음을 치고,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보고, 호감에 민망해하는 척하면서도 속이 답답했다. 그중에는 아셰보다 10살 이상 나이가 많은 남자들도 있었고, 이에 음식물이 잔뜩 낀 채로 자꾸만 웃어 대는 남자들도 많았다.

8번째인가 춤을 추던 그녀가 깜짝 놀란 것은 저 멀리 황제의 자리에서 일어난 난동 때문이었다. 제국의 황제는 난폭하고 성정이 고약하며 여색을 밝힌다는 소문이 아메탄 왕족들 사이에도 퍼져 있었다. 아셰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황제가 칼을 빼 들고 어떤 여자를 베는 것을 보았다. 여자는 한번 저항도 못해 보고 피를 뿌리며 높은 곳에서 굴러떨어졌다.

“어, 어, 어머…….”

아셰는 너무 놀라 춤을 추고 있는 것도 잊어버렸다. 더 놀라운 것은 어디서 나타난 무사들이 그녀의 시체를 순식간에 치웠다는 점이었다. 아무 일도 없는 듯 연회는 계속 진행되었다. 그제야 아셰는 황제의 높은 자리를 볼 정신이 생겼는데, 황제는 분이 안 풀리는지 옆에서 교태를 부리던 여자의 뺨을 거세게 때렸다.

“보지 마세요. 왕녀님이 보실 광경이 아닙니다.”

그녀와 춤을 추던 파트너, 제국의 무슨 후작이라던 남자가 속삭였다.

“사, 사, 사람이 죽었는데…….”

“지금 돌아가신 분은 황제의 여섯 번째 첩실이십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여색을 좋아하시기도 하지만 조금 폭력적인 성향이 있으십니다. 흔히 일어나는 일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다만 괜히 눈이 마주치거나 했을 때 경을 칠 수 있으니 최대한 흥을 깨지 않아야 합니다.”

음악은 흥겨웠지만 그녀는 더 이상 춤을 출 기분이 아니었다. 다니엘을 찾았으나 연회장이 너무 넓어 그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려 찬바람을 쐬어야겠다 생각한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괜히 정원에 나가거나 테라스에 있다가는 남자들에게 위험한 짓을 당할 수도 있었다. 테라스나 정원은 본디 마음 맞는 남녀가 정사의 전초전을 치르는 곳 아니었던가. 가장 안전한 곳은 연회장이었으나 가만히 앉아 있다가 상대방의 춤 신청이 들어왔을 때 계속 거절하는 것도 난감했다.

‘아메탄 왕국은 제국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 뿌리가 제국이기 때문입니다. 마력을 압도적인 실력으로 운용할 수 있는 황족과 달리, 아메탄 왕국의 왕족은 황족의 인정으로 그 혈통의 정당성을 부여받습니다. 아메탄 왕국은 제국에게서 발전된 문명을 전수받은 동생과 같은 국가로, 늘 제국을 섬기고 예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 뿌리가 제국이라는 건 무슨 뜻인가요?’

‘조금 쉽게 설명해 볼까요. 아메탄 왕궁의 주조 역시 황궁을 기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황궁이 훨씬 더 복잡하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지요. 기본 구조나 형태는 물론이고 왕궁 안의 여러 가지 비밀 통로나 지하 미로 등까지 다 황궁을 본뜬 것들입니다.’

‘그래도 되나요? 군 기밀과 연관되어 있을 것 같은데요.’

‘건국 초기에 있었던 일종의 내선 일치와 같은 제국의 동일화 전략이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제국에서는 이 일을 침략이나 과도한 간섭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여 뒤늦게 자율권을 주었지만 이미 주조가 완료된 상태였죠. 그래서 비밀 통로가 황궁과 유사하다는 사실은 아메탄 왕족들에게만 알음알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럼 제국은 우리가 자신들과 같은 비밀 통로를 갖고 있다는 걸 모르지만, 우리는 제국의 비밀 통로를 아는 거네요?’

‘황궁과 왕궁을 비교하시면 안 됩니다. 훨씬 복잡하고 거대하여 많은 부분을 유추해야 합니다. 어차피 저희는 제국을 침략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제국에서 건국 초기에 그런 요구를 한 것이지요.’

황궁이 왕궁보다 복잡하다고 하지만, 아셰가 무슨 대단히 전략적인 곳에 가는 것도 아니고 도전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연회장과 지붕이 연결된 비밀 통로는 전혀 복잡하지 않고, 그저 계단을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걸! 가끔 연회에서 이렇게 어질어질한 증상이 나타나면, 도저히 속이 울렁거려 연회장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아셰는 화장실을 가는 것처럼 층계를 오르다가 익숙하게 아무도 없는 오른쪽 복도로 빠져서 가장 구석에 걸려 있는 정물화를 세게 옆으로 밀었다.

“어머, 열리네!”

예전에 다니엘과 함께 왕궁을 돌아다니며 발견한 비밀 통로 중 하나였다. 비밀 통로나 지하 미로에 대해서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았는데, 그 때 선생님들이 알려 주지 않은 길인 것을 봐서는 아주 오래 전에 잊힌 듯했다. 아셰는 흥분에 휩싸여 정물화가 걸려 있던 자리에 나타난 계단을 구두까지 벗어 들고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통로에 시원한 밤바람이 느껴지는 것을 볼 때 아메탄 왕궁에서 그녀가 연회 때마다 한 번씩 올라가던 그 길임이 분명했다.

끝이 없어 보이던 나선형 계단도 정신없이 오르다 보니, 드디어 끝이 나타났다. 아메탄 왕궁보다 계단이 훨씬 많아 아셰는 숨을 헉헉댈 수밖에 없었다. 유리창을 밀어 올라서자, 아셰는 드디어 자신이 황궁의 지붕에 올라왔음을 실감했다.

“아!”

그녀는 털썩 주저앉아 탄성을 질렀다. 넓은 황궁이 한눈에 보였다. 저 멀리 제국의 평원과 거대한 산맥들 사이로 별이 빛나고 있었다. 희열이 가슴속에 차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아셰는 무도회 도중 속이 답답할 때면 항상 이렇게 지붕에 올라와 잠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녀는 세상 참한 신부감인 척 최대한 많은 남자들 앞에서 연기를 하다가도, 결국 이상한 사람에게 시집을 가는 상황이 올까 봐 문득 두려움에 머리가 하얘지곤 했다. 그럴 때면 높은 곳에 올라 잠시 숨을 골랐다. 모든 것이 작아 보이는 곳에 혼자 있으면, 세상만사가 무슨 소용이며, 괴로워지면 그냥 몸을 던져 죽으면 된다는 담담한 체념이 생겨 마음속의 울컥거림이 잦아들곤 했던 것이다.

그녀가 멍하니 쏟아질 것같이 빛나는 별을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 생각하지도 못하게 거대한 힘이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나름 기본적인 체술도 배우고 숨겨진 인기척을 알아차리는 훈련도 많이 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는 지붕 위에 나동그라진 채 양팔과 다리가 거센 남자의 체중에 눌렸다. 그러나 그녀가 더욱 놀랐던 것은, 꼼짝도 못하게 된 그녀의 목 위로 단검의 날카로움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군데 황궁의 비밀 통로를 알고 있는 것이지?”

심장이 툭 하고 떨어졌다. 누군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셰는 두려움에 입술을 깨문 채 위에서 자신을 누르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시야를 가린 것이 검붉은 피가 쏟아지는 것이라고 판단해 겁에 질렸으나, 곧 그것은 핏빛에 가까운 머리카락임을 깨닫고 숨을 몰아쉬었다.

“나, 나는 아메탄 왕국의 4왕녀 아셰 사이나카라 아메탄이다. 당장 이 결박을 풀지 않으면 외교적 문제로 번질 수 있음을…….”

“아메탄?”

핏빛 머리카락의 소년은 아셰의 떨리는 목소리를 멋대로 끊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셰는 자신이 왕녀라고 하는데도 단검을 치우지 않는 그를 보며 아메탄이 아무리 약소국이어도 왕족의 핏줄을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고민해 보았다.

“아메탄 왕족이 이 길을 어떻게 알지?”

“아메탄 왕궁은 제국의 황궁을 본떠 지어졌으니 원래 알고 있는 길을 유추했을 뿐이다.”

“……그래?”

소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전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제국인들은 초기의 명령을 정정했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을 테니 비밀 통로의 유사성을 당연히 몰랐겠지만, 난생처음 겪어 본 원초적인 생명 위협은 깊은 생각을 본능적으로 막고 있었다. 일단 목에 칼이 들어오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말을 뱉었지만, 곧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더 생각하기도 전에 소년이 한 번 더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 해도, 황궁은 한낱 아메탄 왕궁과 비할 바 없이 복잡하고 거대한 곳이다. 어떤 위험이 있을 줄 알고 생전 처음 온 곳의 비밀 통로를 겁도 없이 유추해?”

“죽으면 죽는 거지!”

아셰는 카랑카랑하게 대답했다. 이제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왕녀임을 밝혔으니, 겁먹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아메탄 왕국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평소에 쓰지 않는 엄숙한 말투를 억지로 구사하며 대차게 말을 이었다.

“무도회에 있다 보면 심장이 갑갑해지고 어지러워져 모든 것을 게워 내고 싶을 때가 있다. 그 꼴을 남들에게 보여 주느니 휴식처를 찾다 죽는 게 나아.”

“휴식처?”

“아메탄 왕궁에서도 연회장과 이어지는 지붕은,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내 유일한 휴식처였으니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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