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무래도 연줄을 잘못 타고 태어난 것 같아. 불행한 인생이 날 위해 입을 벌리고 대기하고 있는 기분이란 말이지.”
약소국의 왕녀, 그것도 권력과는 전혀 관계가 먼 허울뿐인 왕녀로 산다는 건 딱히 좋을 것이 없었다. 아메탄 왕국보다도 훨씬 작고 가난한 리스 공국에서 온 첩실인 모친 샤틴은 몹시 예민했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아셰는 샤틴을 보며 어릴 때부터 자신의 미래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아메탄 왕족들은 왕위 계승의 싸움 과정에서 형제들끼리 죽고 죽이는 것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당연하다는 식으로 교육받았다. 무능력한 형제가 왕위를 물려받아 나라를 잘못 다스리는 것보다는 견제하여 살해하는 것이 이치에 맞으며, 형제끼리의 싸움도 이기지 못하는 자가 왕위에 앉아 봤자 누구를 이길 수 있겠냐는 논리에서였다. 다만 모든 것은 결국 승리한다는 전제하에 통하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적통 출신도 아닌 막내로 태어나, 별다른 끈도 없는 아셰가 왕위쟁탈전에 참여할 리는 없으므로 형제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것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의 혼인이었는데, 아메탄 왕국의 왕족들은 귀족들과 연합하여 내란을 일으키는 일을 막기 위해 왕위에 오르는 자가 아니면 모두 외국인과 결혼해야 했다. 즉, 아셰는 혼인을 할 나이가 되면 외국으로 나가는 정략혼 대상이 된다는 뜻이었다.
“오라버니는 좋은 왕이 될 거야.”
별일 없다면 왕위에 오를 적자이자 장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1왕자 윌리엄에게 아셰는 언제나 말하곤 했다.
“그러면 내 혼처를 꼭 좋은 사람으로 찾아 주어야 해.”
그녀의 친모, 샤틴은 왕의 총애도 받지 못했을 뿐더러, 지금 왕비 자리에 앉아 있는 테스티의 눈에 띌까 봐 궁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테스티는 샤틴처럼 첩실이었으나 윌리엄의 어머니였던 본디 왕비 스잔나가 사고로 죽은 뒤 바로 왕비 자리에 올랐다. 그녀가 유일한 첩인 샤틴을 곱게 볼 리가 없었고, 샤틴은 그렇게 모두에게서 잊힌 채 궁 한편에서 쓸쓸히 살았다. 외국이니 친구가 있을 리도 없고, 왕인 제펠탄은 그저 외교적인 목적으로 들인 외국 출신의 비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셰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히스테리와 우울증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샤틴이 그녀에게 끊임없이 말했던 건, ‘어미처럼 되지 마라’라는 분명하고도 처절한 진심이었다.
“저는 권력도 필요 없고, 부도 필요 없고, 명예도 필요 없어요.”
어차피 좋은 자리로 가지 못할 건 분명한 일이었다. 아메탄 왕국은 제국의 눈치를 보는 약소국이고, 아셰처럼 적통도 아닌 아무런 권력 없는 왕녀가 가게 될 자리란 뻔했다.
“부강한 국가가 아니어도 돼요. 아니, 오히려 작은 공국도 괜찮아요.”
그녀는 초경을 시작한 이후부터 끊임없이 아버지인 제펠탄에게 말했다. 정작 국왕 자리에 올라 있던 제펠탄은 별 관심이 없었을지언정 1왕자 윌리엄은 그 때마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첩실은 싫어요. 드레스가 몇 벌 없어도 좋으니, 그저 제 나이에 맞는 유순한 사람의 정실 자리로 보내 주세요. 작은 영지라도 좋으니 자유가 있는 곳, 지루해도 좋으니 암투가 없는 곳, 외져도 좋으니 외롭지 않은 곳으로요.”
그녀가 아메탄 왕가에서 왕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원칙에 따라 그녀는 다른 오라버니들과 함께 제왕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아메탄 왕족 특유의 반짝거리는 금발 머리와 푸른 눈을 타고 났고, 샤틴의 이국적인 맵시를 닮아 어렸을 때부터 아름다운 태가 났다. 아무리 권력이 없다고 해도 각종 회의와 연회, 공식 자리에 불려 나가는 유일한 왕녀였기 때문에 미모 치장이 하나의 무기가 된다는 것도 어렸을 때부터 학습했다.
“왕좌의 무게는 곧 그 국가이므로, 왕위 계승자들은 각종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같은 피를 타고 난 형제를 믿지 않음으로써 세상 만인을 경계하게 되고, 왕족끼리 의지하지 않음으로써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게 되고, 같은 제왕 교육을 받은 이를 내가 이용함으로써 모두를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셰는 아주 어릴 적부터 동갑내기인 3왕자 다니엘과 함께 제왕 교육을 받았다. 다니엘은 사망한 왕비 스잔나의 자식으로 윌리엄의 친동생이었다. 현 왕비 테스티의 아들인 2왕자 루벤은 1왕자 윌리엄과 치열하게 왕위를 다투고 있었으므로,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다니엘과 아셰는 원칙에 따라 제왕 교육을 착실히 받으면서도 왕위에 대한 욕심은 내지 않았다.
“기억하십시오. 왕족들은 아메탄 왕국의 앞날을 공동으로 책임져야 합니다. 그 책임은 왕위를 이을 계승자에 대한 판단으로, 만일 현명한 왕이 되지 못하고 폭정을 일삼을 것 같은 형제가 왕위 계승자라면 응당 처분하여 살해해야 합니다. 왕족은 왕국의 앞날을 위해 존재하며, 그러므로 왕족 살해는 왕가의 재판을 열어 따로 죄를 매기고 합당할 경우 무죄가 선언되기도 합니다. 다만, 실패 시에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대다수의 경우, 이긴 쪽이 정의이니까 말입니다.”
“선생님.”
어린 아셰는 호기심에 물었다.
“현명한 왕이 되지 못하고 폭정을 일삼을 것 같은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스스로 판단하셔야지요. 그러므로 왕족들은 끊임없이 배우고 연마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윌리엄 오라버니와 루벤 오라버니는 둘 다 폭정을 일삼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정치적 지향점이 달라 싸우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둘은 어떻게 서로가 현명한 왕이 되지 못하고 폭정을 일삼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대치하고 있는 걸까요?”
윌리엄과 루벤은 아마 방법만 있다면 서로를 애초에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왕위 계승자들은 동등하게 교육을 받고 매사에 신변을 조심하며 호위 무사들도 붙어 있기 때문에 으르렁대며 대치하는 것이 전부였다.
“음, 그건…….”
군주학을 가르치던 교사는 잠시 고민했으나, 일단 아셰가 너무 어린데다가 왕위 싸움과는 거리가 멀다고 판단하여 자세히 설명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서로를 해치려는 의도를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가만히 있으면 상대가 나를 해할 텐데 그대로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누군가 저를 해하려고 한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아도 되나요? 아무리 오라버니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죠. 하지만 누가 아셰 왕녀님을 해하겠습니까.”
교사는 어리고 예쁘며 영특한 아셰가 귀여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셰 왕녀님이 지금 생각대로 왕위 계승전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면, 그 어떤 왕자 마마께서 왕녀님을 해하겠습니까. 만일 그렇다 하여도 아셰 왕녀님께 당할 정도라면 어차피 그 나약함이 왕좌의 재목이 못 되니 뜻대로 하시옵소서.”
아셰는 그 말을 잊지 않았다.
아셰는 식물이 물을 흡수하듯 모든 배움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특히나 암살이나 독살에 대비한 약초학 공부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는데, 약초학 교사인 르엘라는 특히 그녀를 아껴 이런저런 지식들을 전수해 주었다. 교사들이 그녀에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단 왕위 계승에서 가장 먼 왕족이었기 때문에 무엇을 가르치는 데에 부담이 없었고, 게다가 자신이 어디로 팔려 갈지 모르는 불안함을 숨기지 않는 그녀에게 연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정말 폭군한테 보내져서 매일 맞으면 어떡하지요?”
그녀의 실질적이면서도 가장 큰 고민이었다.
“첩실로 보내져서, 정실에게 매일 괴롭힘을 당하고 방에서 갇혀 지내면요?”
그러나 그 불안함은 언제든지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셰는 자연스럽게 동갑내기 오라버니인 다니엘과 친해졌고, 다니엘의 친형인 윌리엄과 가까워졌으며, 그러면서 윌리엄과 거세게 왕위쟁탈전 중인 루벤과 멀어졌다. 루벤의 친어머니인 테스티가 샤틴을 쥐 잡듯이 잡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아셰도 딱히 루벤과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노인에게 보내지는 건 어떨까요? 수치스러울지, 오히려 자유가 되기 쉬울지 그건 판단이 서지 않아요. 이왕 그렇게 될 거라면, 어설프게 늙은 사람보다는 정말 오늘내일하는 사람이 좋을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윌리엄의 사람인 것이 확실해진 아셰는 공공연히 윌리엄을 지지하고 다녔으며, 그 속에는 어질다고 소문난 윌리엄이라면 자신의 혼처를 각별히 신경 써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만일 루벤이 왕이 된다면 자신을 어디로 보낼지 몰랐기 때문에, 어느 회의나 공식 자리에서도 점점 더 윌리엄의 편에 서게 되었다.
그녀 나름대로는 아주 어릴 때부터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일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어차피 그녀에게 뒷배는 없었으므로 귀족 영애들과 어울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목적은 괜찮은 신랑 찾기로, 적절히 구석진 어느 공국의 착한 남자를 골라 청혼을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어차피 그녀가 성년이 되고, 왕족들의 의무 교육 기관인 대학을 졸업하게 되면 여기저기서 혼처가 들어올 것이었다. 그 때에 윌리엄이 자신에게 선택권을 줄 수도 있으므로 그녀는 최선을 다해 외국의 손님들이 오는 모든 무도회에 참석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을 매력 있게 뽐내는 기술을 본능적으로 터득했고, 본디 영리한 그녀로서는 아름다움을 잘 이용할 줄도 알았다.
인생의 길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최선을 다해 볼 때까지는 다해 본다는 그녀의 지론에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던 16세 여름, 제국의 5황자 생일 연회가 열렸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