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159/256)

  

69화.

유진은 배를 기다리며 바닷가에 서 있었다. 또 꼬박 하루가 걸려 배를 타고 아메니티에 돌아가면 그녀의 휴가가 끝난다. 타르안의 공연을 본 순간부터 스타람 섬에 오고 싶었다. 움직이는 것이라면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녀가 외교국에 가겠다고 다짐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밟고 싶었던 땅인가. 살짝 비릿한 바닷바람이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유진은 귀찮다는 듯이 주머니를 뒤져 끈을 하나 꺼내 머리를 대충 묶었다.

삶도, 세상도 그녀의 인생에 비하면 너무나 거대하다. 그저 단순히 타르안이 멋있어서 좋았고, 호웰을 한 번쯤은 보고 싶었고, 그러다가 여기까지 왔다. 외교국에 문의했을 때 관광객 대우가 좋다고 했고, 리한 역시 괜찮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스타람 여행을 왔고 그게 다였다.

길지 않은 휴가는 끝났고 보고 싶은 건 대충 다 봤으며 별다른 커다란 사건도 없었다. 아메탄에 돌아간다면 또다시 행정국에 출근을 하고, 스타람에서 산 과자들을 선물로 돌리며, 린에게 생일이 언제냐고 물어보면 된다. 퇴근하면 리한이 기다리고 있을 테고 그가 그녀만을 보며 오늘 수고했다고 꼭 안아 주겠지. 잠이 안 온다고 칭얼거리면 그녀에게 팔베개를 해 주고서 낮은 자장가를 불러 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그녀의 곁에 서 있는 키 큰 남자를 올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리한.”

“응?”

“아메탄에 안 가도 돼요. 뒤처리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무슨 말이야?”

“이미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빈껍데기 같은 당신, 혹시나 알맹이가 여기 있다면 남아 있어도 된다고 말하는 거예요.”

“……여행 내내 우울해 보이더니, 빈트리가 한 말 때문이었구나.”

유진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베이가의 손을 잡고 높은 곳에 올라가 아카날을 죽이고 새로운 스타람을 만들면…….”

“…….”

“당신의 빛도 돌아오지 않을까요?”

리한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녀의 팔을 이끌어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유진은 그의 품 안에 파묻혀 그의 표정조차 볼 수 없었다. 그가 낮게 말했다.

“혼란도 돌아오겠지.”

“하지만…….”

파도치는 바다를 자꾸 바라보고 있으니 속이 울렁거렸다.

“부정하지는 않을게, 유진. 널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난 이미 많이 달라진 상태였어. 극도의 허무함 속에서 자기혐오만 남아 어쩔 줄 모르고 그저 숨만 쉬는 음울하고 매력 없는 회의주의자. 가지고 있는 건 빈트리가 말한 그럴듯한 껍데기뿐이었겠지.”

저 멀리서 그들을 아메니티에 데려갈 배가 보였다. 또 거하게 뱃멀미를 하고 쓰러지겠지. 유진은 바닷가 마을 출생이었지만 언제나 바다가 싫었다. 그녀는 고향에 그 어떤 것도 두고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함께 스타람에 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나라도 간직해 줄래?”

“……네?”

“네 말대로 나를 이루던 어떤 빛은 이미 빠져나간 지 오래야.”

이번 스타람 여행은 아마 유진보다는 리한에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호웰을 결국 보지 못했기 때문에 유진에게 이번 여행은 그다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다만 유진은 왜 리한이 그동안 이곳에 오기 싫어했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역시 한 번은 밟아야 하는 땅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남아 있는 게 아냐. 어디론가 흩어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난 3년 동안 전쟁터에 있었고, 그 어떤 싸움도 내겐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걸 절절하게 느꼈어.”

그는 혁명군을 자신의 발로 떠났고, ‘카드민주의’라는 말까지 있는 그의 고향을 또다시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품 안에 가두고도 공간이 남아 으스러지게 안을 수도 없는 작은 여자 하나만을 바라보면서.

“날 곁에 간직해 줘. 네가 가지고 싶어 했던 초콜릿 껍데기보다는 내가 더 예쁘지 않을까.”

베이가가 듣는다면 기함할 발언이었다. 유진은 그에게 몸을 기댔다. 호기롭게 여기 남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가 곁에 계속 있어 준다고 하니 자신도 모르게 안심된 탓이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자꾸 신경 쓰이니까.”

“신경 쓰라고 한 소리야.”

“대체 왜?”

“부디 나보다 오래 살라고.”

“…….”

“네가 내게 어떤 의미인가 늘 생각하고, 몸조심하라고.”

“누가 들으면 제가 수사국에 근무하는 줄 알겠어요. 행정국만큼 몸조심하는 곳이 어디 있다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배에 올라탈 준비를 하며, 리한은 그녀의 손을 잡고 짐짓 굳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온갖 사람들이 나와 빈트리를 바라보는데 혼자 거금을 배팅하며 도박을 하고 있지를 않나.”

“한 명 정도는 당신을 향한 모욕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있잖아요.”

“내가 호텔 방에서 안전하게 있으라는데 총까지 들고 광장에 당당히 나오지를 않나.”

“한 명 정도는 당신을 위해 총을 쏴 줄 수 있잖아요.”

“그렇게 세트리건 앞에서 말조심하라는데 천년만년 떠벌릴 소재를 주지 않나.”

“한 명 정도는 당신의 평판을 지켜 주려고 할 수 있잖아요.”

한마디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받아친 유진이 말문이 막힌 리한을 바라보며 태연하게 덧붙였다.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리한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정말로 자신이 껍데기만 남은 건 맞을까? 남들은 모두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이상하게 그 어느 때보다 완전해진 느낌인데.

유진은 리한의 무릎에 축 늘어져 있었다. 배를 탈 때부터 예상했던 그림이지만 리한은 차라리 자신이 뱃멀미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고통스러웠다. 먹은 것도 없는 속을 워낙에 많이 게워 내어 유진의 가뜩이나 하얀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했다. 얼른 아메니티에 돌아가 그녀를 익숙한 침대에 눕히고 싶다는 생각에 리한은 한숨을 쉬었다. 다시는 유진을 데리고 배를 타지 않을 것이다.

유진이 신음 소리를 흘리자 리한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자세 바꿀래?”

가까스로 머리를 드는 그녀의 게슴츠레 뜬 눈을 보고 그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혹시 팔 저려?”

“……괜찮아요.”

“속은 어때? 바깥바람 좀 쐴까?”

“아뇨.”

“머리가 울리지는 않아?”

“괜찮아요.”

“자장가라도 불러 줄까?”

“여기서요?”

“무슨 상관이야. 네가 듣고 싶다면.”

“듣고 싶지만 주목받는 건 싫어요.”

단호한 그녀의 말에 리한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왜 이 여자의 손은 아기처럼 작고, 바람이라도 불면 그대로 날아갈 것같이 팔은 가늘까. 정작 잘 웃지도 않는데 그 뚱한 얼굴만 보면 웃음이 난다. 싫은 것도 많고, 안 좋아하는 것도 확실하며, 단호하게 거절하는 데도 스스럼없는데 그게 왜 귀엽지. 바라보고만 있어도 그저 좋다.

‘제가 먼저 자빠트렸어요.’

웃음기 하나 없이 태연하게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말하는 것도 귀엽고.

‘더 해 줘요. 내 취향이야.’

가지 말라는 눈빛으로 그의 팔을 붙잡는 것도 귀엽고.

아메니티에 가서 유진이 몸을 회복하면, 이 말들을 가지고 몇 번이나 놀려 줄 것이다. 이번엔 먼저 자신이 자빠트리겠다고 하며 와락 끌어안고, 술을 마실 때마다 그때 못 맞춰 준 취향을 마저 맞춰 준다며 키스해야지.

언제나 이 작은 여자는 그에게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너무 많이 만들어 냈다. 분명 딱히 행복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잊고 싶지 않아 자꾸만 상기하고 싶은 여러 가지 빛나는 순간들을. 모두가 그에게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지만 빛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채울 것들이 너무 많다고 하면 유진마저도 민망하다며 작은 손으로 그의 입을 막겠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항상 예상하지도 못한 사소하면서도 대단한 일들을 해 줘서, 황제 앞에서 광대 짓을 하던 그 모욕적인 연회마저도 그에게는 소중한 추억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남들은 그가 스타람을 떠났을 때 이미 모든 매력을 잃었다고 하는데, 뒤를 돌아보면 이상하게 유진과 함께했던 순간만 빛나고 있다. 세상을 품었던 치기 어린 날의 순간들이 빠져나간 그의 어딘가를 차곡차곡 채워 주는 무뚝뚝한 여자가 있어서 그는 스타람을 떠나는 발걸음에 미련이 없었다.

유진이 더 오래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유는 없고, 자신보다는 유진이 더 강하니까.

리한이 과거를 추억하는 동안, 유진은 아주 가까운 미래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아…… 세상 끝났어.”

“응?”

“내일 출근이라니.”

휴일이 끝날 때마다 유진은 자신은 노래도 못하고 글도 못 쓰니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부루퉁하게 투덜거렸지만, 리한은 그녀가 정작 행정국을 그만둘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단 린한테 짜증 한번 내고…….”

“아, 맞아.”

잊고 있다가 불현듯 생각나서, 리한은 유진의 동그란 초록빛 눈을 보며 물었다.

“그 친구가 생일 선물 해 줬다고 하지 않았어? 안 풀어 봤지?”

“풀어 봤어요.”

“언제? 특별한 밤이 있었나?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저도 잊어버리고 있다가 어제 풀어 봤죠. 별것도 아닌데 혼자 들떠서 난리친 거였어요.”

“뭐였는데? 예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던 애였다면 안목이 좀 있지 않겠어?”

“그렇지도 않아요.”

유진은 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리한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렇겠지.”

“네?”

“네가 가진 것 중 가장 예쁜 건 나니까.”

유진은 황당하다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녀의 뺨에 입 맞추고 속삭였다.

“이 정도 자신감은 있는 액세서리라서 말이야.”

빤히 그를 바라보던 유진이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한 번 쉬었다가, 종내에는 키득거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힘없이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동그란 얼굴에 웃음이 잔뜩 감돌았다. 생각해 보니 스타람에서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아메탄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스타람의 고급 마차꾼인 롭은 기분이 좋았다. 리한 카드민과 그의 연인을 닷새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돈을 꽤나 벌었기 때문이다. 전혀 까다롭지 않은 손님들이었고 계약도 깔끔했으며 팁도 꽤 많이 주었다. 팁을 그렇게까지 많이 주지 않았다면 5분 정도는 조금 더 질질 끌며 승선 시간에 딱 맞춰 데려다줬을 것이다.

그는 일급이 상당한 고급 마차꾼답게 손님들의 사생활을 무조건 지켜 주었으며 가타부타 말을 붙이지도 않았다. 물론 일당이 높은 관계로 일이 끊기는 기간이 꽤 길기도 했다. 고급 마차와 적당한 무관심을 표명하는 마차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연달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리한 카드민과 그의 작은 연인과 헤어지자마자, 정확히는 그들의 경로에 있던 골목길을 뒤돌아 가자마자 롭은 다급히 그를 불러 세우는 귀엽게 생긴 남자를 마주쳤다.

“급해서 그래요, 혹시 손님이 안에 타고 있나요?”

롭은 한눈에 그 남자가 호웰 한니브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 무슨 이상한 일일까. 리한 카드민을 내려 주고 이 골목길에 돌아온 지 5분도 되지 않았다.

“아닙니다. 비어 있습니다.”

“아, 잘됐군요. 잠시 저 좀 태워 주실 수 있으실까요?”

“예, 타시지요. 행선지는요?”

“일단 가던 길 갑시다. 좀 생각해 볼게요.”

호웰이 귀여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방금 여자 하나랑 헤어졌는데, 죽이겠다고 자꾸 쫓아와서. 일단은 여기를 좀 빠져 나갑시다. 아, 그래. 데시잔에 갈 수 있습니까?”

갑자기 생각난 행선지에 호웰은 여자에게 들키기 전에 빨리 떠나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기대가 된다는 듯이 씩 웃었다. 데시잔에 두고 온 회중시계 때문에 간밤에 세트리건에게 비싼 돈을 들여 전화를 걸었다가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열다섯 살 어린 발랑 까진 여자애한테 아무래도 발목이 잡힌 것 같은 리한 카드민이 왔다 갔다고. 

호웰은 정치나 사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리한의 연애사는 처음 듣는 것이기 때문에 신이 났다. 게다가 세트리건이 직접 말해 준다니 얼마나 자극적일까! 롭이 마차의 문을 열어 주며 대답했다.

“예, 얼른 타시지요. 출발하겠습니다.”

닷새 동안 리한과 유진이 타고 다녔던 마차는 호웰을 태우고 경쾌하게 스타람의 길을 달렸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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