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158/256)

  

68화.

“하긴, 네가 어린애 취향이라고 했다면 다들 충격 받았을 거야.”

“진심으로 널 죽이기 전에 헛소리 그만해. 난 네게 듣고 싶은 얘기가 더 있으니까.”

리한이 더 욕을 하지 못한 것은 세트리건의 옆에 있는 네이지를 의식해서였다. 네이지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이 종종 말해 주었어요! 호웰과 리한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달랐다고. 그중 여자 취향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호웰이 좋다고 찾아오는 여자마다 리한은 별로라고 고개를 저었다면서요? 저따위 놈한테 매달리는 여자는 다 똑같이 생겼나, 내 취향인 여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이러면서요.”

네이지와 세트리건이 깔깔거리며 말을 이을 동안, 리한은 유진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속삭였다. ‘왜곡된 거야, 유진. 아까의 내 말을 잊지 마…….’ 세트리건이 가장 좋아하는 화제 두 개가 여자와 옛 이야기였는데, 둘 다 해당되는 대화가 이어지자 세트리건이 흥분해서 술잔을 비우고 가게에 있는 온갖 술통을 모두 가져와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유진은 한숨을 쉬며 세트리건이 따라 주는 술을 또 한 잔 마실 수밖에 없었다.

“우리 중에 여자를 숙소까지 불러들이는 놈은 호웰밖에 없었거든. 리한은 그 수많은 여자들을 볼 때마다 다 별로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아니, 그냥 계속 몰랐으면 좋겠는데. 굳이 네 이상한 깨달음을 입 밖에 내지 마. 제발.”

리한이 다급하게 말했지만 세트리건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넌 더 작고, 더 어려야 했구나! 이름이…… 유진이라고 했죠? 그래, 리한이 아무리 잘생겨도 그렇지 열다섯 살 위의 남자랑 연애할 생각을 하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리한이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서려는 것을 유진이 그의 허리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급하게 말렸다. 이대로 있으면 그는 정말 세트리건의 멱살을 잡고 한 대 칠 기세였다.

“여덟 살 위예요.” 

“에헤이, 거짓말. 그래도 저놈이 아가씨를 덮치지는 않았겠죠? 그건 범죄, 아니 왕정 국가에 망명한 겉과 속이 다른 놈이니 그럴 수도…….”

안 돼. 유진은 더 이상 생각할 틈이 없었다. 리한이 정말로 그에게 총이라도 겨누기 전에, 그녀는 뚱하니 그의 말을 잘랐다.

“제가 먼저 자빠트렸어요.”

그 말에는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깔깔거리며 박수를 치고 있던 네이지마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마 그를 껴안다시피 한 유진을 내칠 수 없어서 세트리건을 칠 수 없었던 리한마저도 황당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이잖아요.”

유진이 무표정으로 리한을 올려다보았다.

“전쟁터, 내 막사에서.”

“어…….”

리한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유진이 꺼내는 말들이 어떻게 각색될지 몰랐다. 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잘못하다가는 리한이 스타람 섬에서 어린애를 데리고 다니는 이상한 남자가 될 수도 있는데 소문을 어느 방식으로라도 중화시키기는 해야 했다. 그녀는 스타람 사람이 아니었고, 유명세도 없었으며 따라서 자신에 대해 어떤 소문이 뒤에서 돌든지 상관없었다. 게다가 일단 그녀의 충격적인 발언으로 인해 일촉즉발 같던 리한의 분노가 조금 사그라든 것 같았다. 어쨌든 최악의 상황을 막은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화장실 어디에요?”

속이 울렁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잠도 잘 못 잤고 마차를 오랫동안 타서 피곤한데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그것도 딱히 질이 좋은 것 같지도 않은 술을. 그녀는 일어나려다가 시야가 빙글 돌아 다시 주저앉았다. 리한이 그녀를 붙잡기도 전에, 그녀는 테이블에 그대로 엎어졌다.

“놔둬요. 좀 있다가 깰 거야.”

유진은 경고하듯 테이블에 엎드려 말했다.

“얘기 좀 나누고 있으면 정신 차릴게요.”

그녀는 주량을 넘기면 잠시 잠들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쩡해지는 것을 리한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숨을 쉬며 엎어진 그녀의 어깨에 그가 입고 있던 겉옷을 걸쳐 주었다. 그의 체취가 훅 끼쳐 와 유진은 포근함을 느꼈다. 잠이 올 듯 말 듯 하며 리한과 세트리건의 대화가 이어지는 것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리한은 스타람의 상황을 세트리건에게 묻고 있었다. 유진이 모르는 이름들이 끝없이 나왔다. 원래 그가 속해 있던 세계…… 그가 만든 세상. 어쩔 수 없이 그의 마음 한 자락이 머물고 있는, 그의 엉망이 된 고향. 제국의 내전 이야기가 나오고, 숙청된 이름들이 나오고, 과거 이야기가 나오고……. 그녀는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이어지는 그들의 목소리를 흘려들었다.

“리한, 아까 말했지만.”

여행 가기 전에 만난 마지막 아메탄 사람이 린이어서 그런가.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린, 네 말은 다 틀렸어. 하나도 로맨틱하지 않은 여행이야.

“넌 사람이 아예 달라진 것 같아. 네가 스타람을 떠났을 때부터 계속.”

물론 나도 틀렸어. 호웰을 만날 수도 있다는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거든.

“망가진 전구 같아. 말만 할 줄 아는 인형 같다고. 세상에, 리한 카드민이 이런 세상 다 산 얼굴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담배 한 대 할래? 뭐? 아메탄에서는 안 피운다고? 여긴 아메탄이 아니잖아.”

나는 원래 사람에게 기대를 하는 성격이 아냐. 그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상상한 적조차 없어. 하지만 이 남자가 내 곁에서 모든 빛을 잃고 껍데기처럼 존재하기만 하고 있다면, 정말 나는 그에게 어울리는 짝일까?

“세상에, 이 여자애 옆이니까 안 피울 거라고? 거짓말, 네가 골초였던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너 진짜 어떻게 된 거 아냐?”

말끝마다 평민이라고 무시하던 못되어 처먹은 귀족이랑 사귀면서도 이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는데.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눈동자는 텅 비어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아무리 가볍기 그지없는 나라도 네가 예전과 완전히 다르다는 건 알겠어. 우리 다섯 중 가장 변한 건 너야. 네가 이렇게 될 줄은 상상조차도 못 했어. 베이가의 자리에 서서 숙청에 앞장서든가, 사브르처럼 새로운 낙원을 개척하겠다며 떠나거나, 아니면 레랄디아처럼 아카날이 잘못했다고 펄펄 뛰거나 할 줄 알았지. 그런데 이 이상한 차분함은 뭐야? 어린애 하나 데리고 다니는 방랑자처럼.”

왜 세상 다정한 나의 연인을 곁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너, 대륙에서 꽤 공을 많이 세웠다며. 이단 황자의 혈통은 대단하지만 꽤 어리다는 단점이 있으니까, 네가 야심을 품었다면 통령이 되었을 수도 있지. 너는 공화주의의 창시자고, 이 땅을 이렇게 만든 최초의 공화주의자야. 너 몰라? 처음에 네가 책을 냈을 때, 다들 ‘공화주의’라는 말이 어려워 ‘카드민주의’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리한은 눈을 감은 채 엎어져 있는 유진의 머리카락을 쓸며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진, 일어날 수 있겠어?’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혔지만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 기분이 우울하면 더 취하는구나. 네이지가 오늘 밤은 자신의 집에서 머물고 가라며 다정하게 청했다. 어차피 여관도 멀고 한밤중에 호텔을 찾아 헤매기도 좀 난감하여 리한은 승낙하는 모양이었다.

그다음부터는 정말로 기억이 없었다. 유진이 눈을 떴을 때에는 낯선 방이었다. 창문 밖을 바라보니 캄캄한 밤이었다. 리한의 목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리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고, 리한은 아직 세트리건과 대화 중인 것 같았다. 그녀가 모르는 시대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들. 그녀는 옷이라도 갈아입고 싶어 리한이 가져다 놓은 것 같은 그녀의 가방을 열었다. 성의 없는 손으로 갈아입을 옷을 꺼내는데 무언가가 손가락에 걸렸다.

‘정말 특별한 밤에 풀어 봐.’

린이 건넨 생일 선물이었다. 예쁘게 포장지에 둘러싸인 작은 선물. 그동안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딱히 특별한 밤은 아니었지만, 내일 돌아가는데 더 이상 기다릴 밤도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포장지를 뜯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유진, 혹시 일어났어요? 물이라도 한잔 줄게요.”

“네, 감사합니다.”

네이지의 목소리에 유진은 포장지를 뜯다가 고개를 들었다. 네이지가 물병을 가지고 와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유진은 예의상 일어나다가 들고 있던 선물을 툭, 하고 떨어트렸다. 바닥에 한 번 구르다가 리본이 풀린 선물의 내용물을 보고 유진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어머.”

린 아시에, 돌아가면 가만두지 않겠어.

“예쁘네요.”

네이지의 흥미롭다는 얼굴을 보며 유진은 한숨을 쉬었다. 린이 선물한 것은 보기에도 민망한 끈과 망사로 이루어진 속옷이었다. 손수건 정도의 부피여서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잘못 짚었다. 특별한 밤? 로맨틱한 여행? 대체 린은 이런 걸 또 어디에서 구해 와 생일 선물이라고…….

“대륙에서는 이런 걸 입는구나…….”

유진은 다시 안 볼 사이에 딱히 부정도 하지 않고 바닥에서 속옷을 주워 들었다. 아마 떠들기 좋아하는 이 부부는 앞으로 평생 동안 ‘리한을 자빠트린 발랑 까진 어린 여자애’에 대해 몇 배의 살을 붙여 떠들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러거나 말거나, 피곤한 표정으로 감사하는 말과 함께 네이지를 밖으로 내보냈다.

잠시 열린 문틈 사이로 세트리건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와, 리한. 널 따를 사람들이 한가득이야. 아카날에게 돌아가. 아카날이야말로 우리의 사상적 배경이잖아. 카드민주의가 어떻게 생겼는데.”

스타람에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다. 카드민주의라니, 그런 말은 혁명군 사이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3년간 그녀의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대의도 없고 신념도 없었던 일상적인 기다림이었는데.

문이 닫히며 리한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난 카드민주의자가 아냐.”1)

유진은 사회와 정치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문득 이 모든 결말이 서럽다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 계속....]

1)칼 마르크스의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발언 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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