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157/256)

  

67화.

“다 우리랑 합의 없이 한 말들이야. 헛소리도 많아서 뒷수습하느라 힘들었던 적이 얼마나 많은데.”

“다들 약간 입에 발린 말만 하는데, 종종 자극적인 얘기도 잘 해 주고.”

“그래서 팬이 가장 없지 않았나? 무례하고 가벼워서.”

“그래도 팬에게는 가장 친절한 사람이라던데.”

“아무나 붙잡고 입을 나불대길 좋아해서 그런 거지. 뇌에 멀쩡한 생각이라고는 없는 놈이야. 오죽하면 아카날도 포기했을까.”

“네?”

“군 비밀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는 건 물론, 이 소대 저 소대 쑤시고 다니며 별것도 아닌데 논란거리를 만드니까 아카날이 군대에서 쫓아내 버렸어.”

“세상에, 완전 몰랐는데요.”

“괴롭혔다간 몇 배로 부풀려서 온 섬에 떠들고 다닐 놈이라 그저 내팽개친 거지. 그렇게 말하는 걸 좋아하는 놈이니 우리가 처음 결성했던 술집을 인수해서 그럭저럭 잘 산대. 타르안 팬들에게 추억 팔이나 하면서 말이야.”

“손님 많겠어요.”

“타르안은 과거야.”

리한은 표정을 알 수 없는 텅 빈 눈으로 창가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변했지.”

유진은 가만히 그를 눈에 담았다.

“여하튼 말을 조심하도록 해. 순식간에 휘말리니까.”

“평소처럼 있으면 되겠네요.”

뚱한 말투로 유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전 이제껏 살면서 말조심하라는 충고는 들어 본 적이 없거든요.”

“세상에, 리한 카드민 아냐? 이게 몇 년 만이야?”

유진이 상상하던 세트리건의 모습 그대로였다. 옅은 붉은 머리카락과 쌍꺼풀이 깊게 진 동그란 눈,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다소 높은 목소리까지. 적어도 빈트리나 베이가를 마주할 때의 위화감은 없었기 때문에 유진은 살짝 마음을 놓았다가, 세트리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자 살짝 기분이 상했다.

“애를 데려왔네? 조카야?”

세트리건은 정말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인 듯했다. 리한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재빨리 말했던 것이다.

“여긴 술집이라 미성년에게 술을 팔지 않아. 삼촌하고 이야기를 좀 나눌 테니 과자라도 하나 사 올래? 네가 먹을 만한 게 여기 없거든.”

“넌 여전하구나. 입 좀 다물고 사과부터 해. 내 연인이야.”

리한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세트리건은 호들갑을 떨며 말을 이었다.

“너 이런 취향이었구나! 어쩐지 여자들한테 별로 관심이 없던 것 같더라니……. 근데 정말로 아이가 먹을 만한 음식이 없…….”

유진은 아카날이라는 사람에게 조금도 좋은 감정이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왜 아카날이 그를 군대에서 쫓아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리한 역시 빠르게 그의 말을 막았다.

“나 총 가지고 있어. 지금 당장 네 입에 쑤셔 박기 전에 제발 닥쳐. 그리고 20대 중반이야. 사과하라니까.”

“……뭐, 그렇다고 해 주지. 아가씨, 들어와요.”

리한의 예상대로 술집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니, 저녁 즈음에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손님은 그들뿐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는데,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유진이라고 해도 후한 평가를 내려 줄 수가 없을 만큼 술맛이 형편없었고 요리라며 내온 것들은 위생 상태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리한은 그녀에게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왜곡될 것이니 주의해라’라는 말과 동시에, ‘저 자식이 어떤 말을 해도 열 배쯤 과장된 것이니 흘려들어라’라는 조언을 했다.

“이나마도 내게 말해 줄 사람이 저 자식뿐이라는 게 슬프군.”

유진은 생선의 희멀건 눈이 그대로 보이는 접시를 슬그머니 밀며 맛없는 술만 조심스럽게 홀짝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리한과 세트리건의 사이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리한 역시 변해 버린 다른 멤버와는 다르게 예전과 똑같은 세트리건이 가장 편한 것 같은 눈치였다.

“내일부터 스타람에 이상한 소문이 돌겠지만.”

“무슨 소문요?”

“내가 열다섯 살은 어린 애랑 사귄다고.”

“네? 아니라고 했잖아요.”

“저놈은 내가 잘 알아. 듣고 있는 표정이 아니었어.”

세트리건과 그의 부인인 네이지는 그들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네이지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음식은 마음에 들어요?”

“아, 네.”

유진은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비워지지 않은 접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이 네이지가 깔깔거리며 생선 요리법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세트리건이 합류하여 생선의 종류와 낚시의 역사까지 읊기 시작하자 리한이 한숨을 쉬며 그들의 말을 끊었다. 네이지가 아니었다면 한참 전에 입을 다물게 했을 것이라는 표정이었다.

“코넬에 다녀오는 길이야.”

“코넬? 세상에, 엄청 시끄러운 곳인데 거길 왜 갔어? 조만간 숙청 명령이 떨어질 거라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숙청?”

“레랄디아가 요새 사사건건 아카날 총통님의 말에 반대했거든. 심지어 아카날 총통님의 아드님에 대한 재투표를 제안했어. 미친 거지. 대체 왜 이미 결정된 사안에 토를 다는 건지 모르겠어. 이미 97%가 찬성한 사안에.”

“찬성하지 않으면 레랄디아처럼 되니까 그랬겠지.”

“책임감이 없는 거야. 아니, 나라를 망하게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체제를 좀 더 확실히 해서 공화정의 사상을 지키겠다는데 왜 반기를 들어? 이 작은 섬이 쪼개져 내란이라도 벌어졌으면 하는 건가? 이해가 안 가. 여기까지 온 게 누구 덕인데.”

“거기서 베이가도 만났어.”

“아, 베이가.”

세트리건이 코를 훌쩍이며 단숨에 술을 마셨다.

“우리 막내가 네 자리에 오르게 될 줄은 몰랐지. 너도 외국으로 달아나 버리고, 사브르도 대륙에서 돌아오지 않으니 결국엔 베이가뿐이었다고.”

“…….”

“베이가가 널 친형처럼 따르던 건 기억하지? 네가 아메탄에 갈 때 끝까지 널 옹호하던 애야. 분명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 말이야. 한 달 동안 널 그리워하며 울었다고. 아, 뭐, 그래, 보름 정도. 음, 그래. 일주일? 여하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혁명군에 합류했을 때 네 귀환만 기다렸어. 아마 지금도 기다릴 거야.”

베이가의 이야기가 나오자 네이지마저도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진은 단숨에 맛없는 술을 모두 삼켜 버렸다.

“지금은 군의 꼭대기에 있지.”

“내국인에게 총질하는?”

“체제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리한, 넌 좀 이상해진 것 같다. 아니, 달라진 것 같아. 아예 다른 사람인 것처럼.”

세트리건은 미간을 찌푸리며 리한을 살펴보았다. 네이지는 유진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주며, ‘어린데 술을 참 잘하네’라고 속삭였다.

“난 한참 전에 쫓겨났고, 빈트리는 워낙에 문제를 많이 일으켜서…….”

“문제를 많이 일으키다니?”

“자꾸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꿈에 나온다고 난리를 쳤어. 세상에, 군인이 그게 할 소리야? 술을 퍼마시고, 자꾸만 카나엠으로 도망가고, 오밤중에 난동을 부려서 억지로 제대시켰지. 지금도 카나엠의 폐인으로 살고 있을걸. 몇 년이나 갈지 모르겠다. 그 자식은 언제나 마음이 약해서 문제였어.”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하고 쫓겨난 네가 할 말은 아냐.”

“여하튼 나도 빈트리를 본 지는 오래됐어. 카나엠에 갈 정도로 돈이 많지 않거든. 비싸게 주고 인수했는데 술집 사정이 좋지 않아. 베이가도 오랫동안 못 봤지. 우습게도 우리 막내 베이가는 그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권력자가 되었으니까.”

“……숙청을 책임지는 권력자겠지.”

그의 목소리에 담긴 씁쓸함을 눈치챘는지 세트리건은 진지하게 말했다.

“스타람은 좁아, 리한. 제국처럼 내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찢어져 살 수 있는 곳이 아냐. 정말로 내란이 일어난다면 우린 우리끼리 싸우다 전멸이야. 바다에 막혀 도망갈 곳도 없지. 괜한 분란 종자는 없애는 게 맞아. 레랄디아가 죽었으니 이제 좀 평화롭겠군.”

유진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술만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베이가의 자리가 원래 리한의 자리라고……. 만일 그가 아메탄에 오지 않았다면 그런 모습으로 냉정하게 민간인들을 죽이고 있었을 것이다. 유진은 전쟁터에서의 그의 모습을 본 적 있었다. 묻지 않았지만 수도 없이 사람을 죽였을 것이다. 그것도 그가 어디엔가 놓고 와 유진에게 보여 주지 않는 자아 중 하나일까? 

세트리건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베이가는 심지어 아카날 총통의 딸과 결혼할지도 몰라. 우리 모두 그렇게 예상하고 있어. 세상에, 베이가가 말이야! 우리 중 막내잖아. 코찔찔이 십 대 꼬마가 결혼이라고! 나 다음으로 베이가가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빈트리는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못할 듯하고, 호웰은…….”

유진은 술을 마시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흠칫하는 것을 눈치챈 리한이 테이블 밑에서 그녀의 발을 툭 쳤다.

“……워낙에 난봉꾼이니 말이야. 안 그래도 말인데 어제 새로운 애인과 왔다 갔어. 하루 사이에 네가 올 줄은 몰랐지만. 내가 헛소리할까 봐 술 한 잔도 안 하고 술집만 보여 준 뒤 줄행랑치더군. 그 와중에 회중시계까지 두고 갔어, 나 참.”

“어제요?”

유진은 넋이 나간 듯 반문했다. 세트리건은 헹,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걘 여자를 너무 좋아해. 빈트리만 중독은 아냐. 여자 중독, 뭐 이런 건 없나? 한 달에 한 번씩 곁에 있는 여자가 바뀌는 것 같아. 지금은 자유로워서 그런지 더해. 군대에서도 그 문제로 쫓겨났으면서 여전히 똑같지. 사단장 딸을 둘이나 건드려서 쫓겨났으면 자제라는 걸 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냐?”

리한은 피식 웃으며 유진의 눈치를 한번 살폈다. 사단장 딸을 둘이나 건드렸다고……. 유진은 충격 받은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어제 왔으면 호웰과 그의 애인을 마주칠 수 있었던 건가……. 그녀는 자신도 애인과 여행을 온 주제에 양가적인 감정이 들어 눈을 깜빡였다.

“근데 그 자식 은근히 취향이 한결같아. 내가 그놈 여자만 스무 명도 넘게 봤잖아? 키가 작고, 긴 생머리에, 눈이 동그랗고, 볼살이 귀엽게 오른…….”

“세트.”

유진이 입까지 벌리며 세트리건의 말을 듣는데, 리한이 재빨리 그의 말을 막았다.

“호웰 얘기는 안 궁금해.”

“왜? 재밌지 않아? 너랑 호웰은 항상 모든 게 달랐잖아. 여자 취향을 얘기할 때에도 넌 언제나 성숙한 매력이 있는 키 큰 여자가 좋다면서…… 아……. 거짓말이었나?”

세트리건은 유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유진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리한을 올려다보았다. 리한은 세트리건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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