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156/256)

  

66화.

“제가 아는 장군님은 언제나 사람들을 끄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따랐던 이유를 의심해 본 적 없습니다.”

스타람에서 가장 화려한 군복을 입은 베이가 앞에서, 어두운 후드를 둘러쓴 리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사라지셨군요.”

횃불이 일렁이며 시체 속에 이질적으로 서 있는 그들을 비추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지금 그곳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유진은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베이가가 이곳에서 사람들의 학살을 명령할 동안 그녀는 그를 보낼 수 없다며 붙잡았다. 과연 리한은 소시민인 그녀의 옆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정말로 그래서 리한의 빛이 옛 동료의 눈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걸까?

“돌아오십시오.”

“…….”

“스타람의 부흥, 번영, 평화, 그리고 이상을 위해서.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옛날 혁명군에 합류하셨듯이, 또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 거라고.”

“그럴 일 없어.”

“기다리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유진은 리한이 단번에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 어떤 대답이 나와도 기운이 빠질 것 같았다. 호기롭게 총을 들고 뛰쳐나온 보람도 없이, 그녀는 단번에 자신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광장 아래 숨죽이고 있는 민간인 중 하나였고, 리한과 베이가는 그들이 모두 아는 유명인이었다.

“베이가 카드민.”

그가 어조를 바꾸어 낮게 말했다.

“…….”

“내게 이 군대를 모두 주고 나를 따라.”

횃불이 그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고, 그의 푸른 눈동자가 붉은 불빛을 머금어 섬뜩하게 번득였다. 그의 한마디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군인들이 긴장했다.

“이대로 수도로 진격하여.”

유진의 몸이 덜덜 떨렸다.

“아카날을 죽이고 내가 그 자리에 앉지.”

지금 리한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어두운 후드로 가렸어도 순식간에 존재감을 뽐낸 그가 나른한 눈으로 베이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때?”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베이가의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베이가가 가까스로 말했다.

“……농담이라고 말해 주시지 않으면 당신을 지금 처형해야 합니다. 아무리 국적이 아메탄이라고 할지라도…….”

“그럴 생각이 없다면, 날 기다리겠다는 말은 하지 마.”

“장군님, 제발.”

리한은 가만히 베이가를 노려보고 있다가, 그에게 딜레마를 안겨 주기 싫다는 듯 툭 말을 던졌다.

“실없는 소리였다. 긴장 풀어.”

그가 그대로 베이가의 곁을 떠나 정적이 흐르고 있는 광장을 가로질렀다. 베이가의 위치가 위치다보니 아무도 그가 경어를 쓴 리한에게 차마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마치 물이 갈라지는 것처럼 길을 터 주는 사람들 사이로 걷던 그가 못 박힌 듯 서 있던 유진의 팔을 잡고 싱긋 웃었다. 아까부터 그녀의 소재를 파악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오지 말랬지, 내가.”

“…….”

“아직 취하지 않은 건 사실인가 봐. 다행히 멀쩡하네.”

리한은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유진은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떠날 수 있겠어?”

아까 베이가를 대할 때처럼 딱딱한 어조가 아닌, 마치 아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더 이상 머물기가 좀 그래서.”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급히 마차꾼을 깨워 마차에 탄 유진의 마음이 극도로 무거웠다. 침울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마차꾼이 초콜릿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아까 저녁을 포장해 왔던 식당에서 떠날 때 드시라고 선물로 준 겁니다.”

리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서비스가 원래 있었던가?”

“어제 호웰 한니브가 왔다 갔다고 하더군요. 워낙에 호웰 한니브가 자주 들르는 식당으로 유명세를 타서 이제 호웰 한니브에게 식사값을 받지 않습니다. 그 보답으로 호웰은 늘 초콜릿 한 박스를 선물하고, 식당에서는 그 이후 방문하는 고객들에게 그 초콜릿을 하나씩 서비스로 줍니다. 식당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경영 전략인 셈이죠. 호웰이 왔다 가면 그의 팬들이 우르르 식당을 찾으니. 호웰 입장에서도 일종의 팬서비스겠죠.”

유진은 침울한 와중에도 기가 차서 눈을 깜빡거렸다. 또 하루 차이? 뱃멀미 때문에 하루 동안 일정이 밀렸을 뿐인데 두 번이나 그를 하루 차이로 놓쳤다고? 그러나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유진에게 리한이 싱긋 웃으며 자신이 초콜릿을 받아 포장을 벗겨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 후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잠이 오지 않아 유진은 어두운 창가만 바라보았다. 리한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유진, 미안하지만…….”

“……네.”

리한을 둘러싼 분위기가 워낙에 음울하여 유진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던 차였다.

“마지막으로 혹시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들러도 될까.”

“그럼요. 아티올 산맥이요?”

그는 아티올 산맥의 보육원에서 자랐다. 그때 베이가와 의형제를 맺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리한은 고개를 저으며 약간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쯤 되니 상황을 좀 알고 싶은데. 세트리건에게 가야겠어.”

세트리건이라면 타르안의 또 다른 멤버였다. 리한과 동갑인 밝고 명랑하며 수다스러운 남자라는 사실을 유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결성했던 작은 술집을 인수해 장사를 하고 있다고 들었거든.”

“아, 어차피 가기로 한 곳이잖아요?”

“조용히 너만 들여보내려고 했어. 세트리건을 마주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만일 세트리건까지 만난다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호웰만 빼고 모든 타르안의 멤버들을 보고 가는 셈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만난 두 멤버의 모습이 상당히 충격적이어서 그녀는 힘이 빠질 지경이었다. 한 명은 폐인이 되고, 한 명은 학살자가 되다니.

“세트리건은 말이 너무 많고 과장하는 걸 좋아해서 딱히 만나고 싶지 않았어. 솔직히 말하면 다른 넷 중 가장 만나기 싫었는데. 상당히 무례한 인간이야.”

“음…….”

“여기서 내게 상황 설명을 해 줄 단 한 명의 사람이라 어쩔 수 없군.”

세트리건이 결혼을 했다는 건 제국의 내란에 참전했을 때 사브르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사브르의 말에 따르면 세트리건과 똑같은 성격의 여자라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그들이 운영하는 술집은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소 기운이 빠진 유진의 표정을 보며, 어쩌면 그들에게는 분위기를 전환할 수다스러운 사람이 필요한 걸지도 몰랐다. 유진도 리한도 딱히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기.”

유진은 우울한 와중에도 리한의 맞은편에 앉아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초콜릿…… 껍데기…….”

“왜?”

리한이 꾸며 낸 미소를 지으며 순진한 척 반문했다.

“그래도 호웰이 준 건데…….”

“아까 버렸어.”

“……네?”

“맛있게 먹었잖아. 그럼 된 거 아냐?”

“하지만, 먹으면 없어지는 건데!”

“그 초콜릿을 먹었다는 추억이 있지.”

“하지만 실물이 없는데!”

“껍데기를 뭐 어쩌겠다는 거야? 아무 쓸모없는 건데.”

“간직해야죠, 당연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신경질을 냈다. 일부러 그녀에게 직접 먹이고 포장지를 버린 그의 의도를 알아챈 것이다. 왕년에 스타였던 그가 팬들의 심리를 모를 리 없다. 손짓 한 번 닿았던 물건이라도 보물처럼 간직하는데, 그가 직접 남기고 간 팬서비스 개념의 선물이었다. 당연히 두고두고 모셔 두어야 했다.

“뭐, 다른 놈의 팬인 건 넓은 아량으로 인정해도…….”

리한은 그녀가 씩씩거릴 것까지 예상했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네가 간직할 실물은 나 하나면 돼.”

유진이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한 것은, 그를 두고 ‘껍데기’라고 말한 빈트리의 말이 다시 떠올라서였다. 그런 건 아무 쓸모없는 거라고 리한이 지금 직접 말했다.

‘내게 이 군대를 모두 주고 나를 따라. 이대로 수도로 진격하여, 아카날을 죽이고 내가 그 자리에 앉지.’ 

그게 정말로 리한을 이루고 있는 본질일까? 그 말을 뱉을 때 리한의 주변을 둘러싼 분위기조차도 달랐다. 감정이 없어 보이던 베이가마저 긴장할 정도로. 그녀를 만나기 전에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그에게는 추억으로만 남고 실체가 아주 예전에 없어진, 남들이 보기에 빛나던 그의 과거가 그런 종류의 내면일까? 그렇다면 그녀의 곁에 있는 건 정말로 그의 쓸모없는 껍데기일 뿐일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그의 옆모습만 바라보았다.

“세트리건을 만나면…… 말에 휘말리지 않게 주의해.”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데시잔이라는 지역이었다. 그들의 마지막 일정이기도 했다. 데시잔에서 하룻밤을 지내면 다시 항구로 돌아가 아메탄에 귀국해야 했다. 앞에 이틀을 뱃멀미로 앓아누웠기 때문에 막상 스타람에 있을 날들이 많지 않았다.

“비슷한 여자랑 결혼까지 했다니 얼마나 시끄러울지 상상조차 안 되는군.”

“그래도 세트리건 인터뷰집 읽는 게 제일 재미있었어요.”

데시잔까지 가느라 꼬박 하루를 달려야만 했다. 한곳에 머무는 것보다 이동하는 시간이 훨씬 더 길어 조금 피곤했다. 여행이 처음이니 알지 못했다. 다음번에 여행을 떠난다면 절대로 이곳저곳 다 보겠다고 욕심 부리지 않으리라. 아니, 다음에는 어지간하면 여행 같은 건 가지 말아야지.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황당해했던 린의 표정을 잊지 않았다. 린이 현명했구나……. 

유진은 눈을 굴리며 말했다.

“다른 멤버들 얘기도 진짜 많이 해 주고…….”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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