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155/256)

  

65화.

“아카날 총통님의 직권 명령이다! 스타람 공화국의 이름으로 공화국에 혼란을 일으킨 자에 대한…….”

유진은 손을 떨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던 리한은 어느새 옷을 모두 갖춰 입은 상태였다. 리한은 천천히 유진에게 다가와 그녀를 한 번 꼭 끌어안고 아직 와인 향이 남아 있는 그녀의 입술에 한 번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유진, 너는 일단 여기에 꼼짝하지 말고…….”

“싫어요.”

리한의 침착한 말에 유진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술 더 마시고 싶어요.”

“…….”

“더 해 줘요. 내 취향이야.”

그녀가 간절하게 덧붙였다.

“유진.”

“얼른, 한 모금 더.”

그의 품에 자리 잡고 있을 총의 존재가 불안했다. 유진은 그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이 재빨리 말했다.

“나 안 취했어요. 취하려면 한참 남았어.”

“여기서 너와 내가 함께 있는 걸 본 사람은 없어. 누가 묻거든 혼자 온 여행객이라고 말해.”

“우리랑 상관없을 수도 있잖아요.”

그녀가 그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국적은 아메탄이에요. 안전하다고 생각하니 여기까지 온 거잖아. 관광객들은 해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상관없을 수도 있지. 하지만 저들이 누군가를 찾고 있고, 나는 이곳을 버리고 떠난 유명인이야.”

“혹시나 다른 사람을 찾고 있는데, 당신이 나가서 괜히 긁어 부스럼이라도 만들면…….”

“상황이라도 파악해야 해. 유진, 우린 이곳에 대해서 잘 몰라. 군인들이 마음껏 민간인을 죽일 수 있을 지경이라면 네 안전조차 보장할 수 없어. 봤겠지만 여기서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야.”

“나는…….”

유진은 단호하게 속삭였다.

“당신을 혼자 저기 보내느니, 함께 여기서 입 맞추다 죽고 싶어요.”

“나는 싫어.”

그는 진심으로 유진과 자신이 함께 있다가 분노한 군인에 의해 그녀까지 죽을까 봐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단호한 그의 대답에, 유진은 함께 있자고 더 이상 떼를 쓸 수가 없어서 마냥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스타람으로 여행을 가자는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외교국에 있는 동기에게 물어보았을 때 관광객들은 안전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러나 카나엠에서 리한을 향해 쏟아지던 적의 가득한 눈빛을 생각하니 불안해졌다. 이제는 그를 보호할 수 있는 외교국 협업 징표도 반납해 버려서 없다.

“혹시 모를 상황이 닥치면 넌 아티올에 있는 아메탄 주재관에 가서 신변 보호를 요청해.”

리한이 총을 꺼내 장전을 하더니, 유진에게 건넸다.

“쏘는 법은 알지? 많이 봤을 것 아냐.”

“당신이 가져가요.”

“하지만 정말 최악의 상황에서만 써.”

“네?”

“오로지 너를 위해서만 써야 해.”

“무슨 말이에요?”

총을 받아 들지 않는 그녀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며, 그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사랑한다는 말이야.”

리한은 그대로 후드를 뒤집어쓴 채 조용히 광장이 보이는 골목에 몸을 숨겼다. 유진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스타람의 사병 출신인 그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군복만 얼핏 봐도 보통 군인이 아닌, 중앙에서 파견된 높은 지위의 군인이다. 벌써 몇 년 전이지만,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카날이 장악한 군의 상부에서 직접 왔다면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직접 그를 죽이러 왔거나, 아니면 더 심각한 일을 도모하러 왔거나. 전자라면 괜히 유진을 끌어들일 수 없었고, 후자라면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다음 행동을 걱정하기도 전에, 군인들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끌고 와 광장에 있는 무대에 세웠다. 리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50대를 막 넘긴 여인이 고고한 표정을 지으며 무대 중앙에 섰다. 오랫동안 코넬을 다스린 영주, 레랄디아 코넬이었다.

“공화국의 질서를 혼잡하게 한 죄를 물어 레랄디아 코넬을 즉시 처형한다.”

한편, 초조하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유진 역시 리한만큼 놀라 입을 벌렸다. 그녀는 스타람 군인들의 위계는 전혀 몰랐지만, 레랄디아 코넬의 죄를 광장에서 울림 좋은 목소리로 읊으며 총살을 명령하고 있는, 가장 높은 지위인 듯한 남자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타르안의 멤버 중 하나였던 베이가였다.

“마, 말도 안 돼.”

유진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레랄디아 코넬을 비롯하여 열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대로 총살을 당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모습에 오열하고 있는 민간인들도 그대로 붙잡아 군인들이 무대로 끌어 올렸다는 사실이었다. 한번 무대로 끌려 올라가면 그대로 총살당했고, 민간인들의 사체가 순식간에 쌓이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지옥이야……. 세상에…….”

물론 후방에만 있었지만, 전쟁터에서도 이토록 사람을 쉽게 죽이지는 않았다. 유진은 토할 것같이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키다가, 리한이 베이가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미쳤어, 리한 카드민! 지금 이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내? 그러나 놀랍게도, 광장을 지켜보며 냉정한 눈으로 학살을 명령한 베이가가 리한을 향해 목례했다.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베이가는 리한과 오랫동안 함께 지낸 같은 보육원 출신으로, 다섯 명의 멤버 중 가장 돈독하다고 인터뷰집에서 읽은 바 있었다. 실제로 베이가는 리한과 같은 성을 쓰기도 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저 군인들 사이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스타람 사람들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리한답지 않게! 유진은 덜덜 떨며 자신의 손에 쥐어진 총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지만, 이 낯선 스타람 땅에서 리한을 위해 총을 쏴 줄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자신뿐이었다. 이미 이곳에서는 사람의 목숨이 가벼웠다.

‘이 세상에 아무 미련이 없는 내가.’

유진은 마음먹고 손에 힘을 주어 총을 꽉 쥐었다.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지. 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고?

‘나보다 오래 살아.’

진정으로 그가 유진을 위해 산다면 하루라도 그녀보다 더 살아야 하는 게 맞았다. 이 세상에 그녀를 홀로 두지 말아야지. 그가 말한 대로, 그건 이기적인 부탁이 맞았다. 애초부터 삶에 대한 아무런 미련 없이 아메탄 왕국에 건너온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껍데기만 존재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정말 유진의 액세서리 같은 위치로 곁에 있을 뿐이라면……. 그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하게 더 서글펐다.

‘오로지 너를 위해서만 써야 해.’

유진은 옷을 추스른 뒤 심호흡을 하고 방문을 열고 나섰다. 리한이 나간 바로 그 길을 따라서. 남의 나라 일에 대단히 나설 생각은 없었지만, 리한이 혹시라도 위험해진다면 그를 위해 베이가라도 죽일 것이다.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 없는 유진의 손에 땀이 배었다.

“무슨 짓이야.”

상대가 베이가라면 리한은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다는 판단을 내렸다. 과연 짐작대로 베이가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낮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리한 장군님.”

“호칭은 집어치우고.”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민간인 학살이라니, 이게 말이 돼?”

“숙청 명령이 내렸습니다. 레랄디아 코넬은 체제의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라면 공화주의에 위협이 되는 존재일 것입니다.”

“멈춰. 알다시피 레랄디아는 좋은 영주였고 인간적으로 눈물을 흘릴 수도 있잖아.”

“혼돈을 꿈꾼 이상 좋은 영주가 아닙니다.”

리한은 베이가와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을 짐작했다. 베이가의 군복에 붙은 별의 개수가 다섯 개임을 확인한 리한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도 사브르도 없는 스타람 군부에서 결국 가장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모양이었다. 리한이 그와 대화하고 있는 와중에도 민간인들은 끊임없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베이가.”

가족이 죽은 영지 사람들은 더 울고, 슬퍼서 우는 사람들은 다시 죽고, 결국 가족이 죽어도 울지 못한 채 입을 다물며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리한이 참담하게 말했다.

“이게 옳다고 생각해?”

“군인은 가치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코넬은 오랜 역사가 있는 영지였고, 레랄디아는 리한조차도 알고 있는 꽤 꼿꼿한 영주였다. 스타람 왕조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설 때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리한은 그제야 코넬에 떠돌고 있던 묘하게 불안한 공기와 큰 영지답지 않은 무기력함의 이유를 알아챘다. 레랄디아는 오랫동안 아카날과 반목했음이 틀림없었다. 설마 코넬 영주가 숙청당할까 두려워하던 사람들의 불안함이 불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원인이었다. 그런데 말로만 듣던 숙청이 이렇게 잔인할 줄이야.

“아카날 총통님은 스타람을 여기까지 키웠습니다. 또다시 제국의 손짓 한 번에 무너지던 100년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제국은 이제 없어.”

“혼란이 생기면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마치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원래 베이가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러니 한 번 상관이었던 리한에게도 지금까지 경어를 쓰고 있는 것일 테다. 그를 보자마자 왕정 국가에 두 번이나 망명한 그에게 여전히 똑같은 눈빛으로 목례했다. 그러니 아카날이 어떤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의 명령에 따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군인의 미덕이라고 여기는 남자기도 했다.

그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비명과 울음소리로 가득했던 광장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리한은 푸른 눈으로 그들이 맨 처음 섰던 무대를 바라보았다. 그 작은 무대에 처음 다섯 명의 소년들이 올라서고, 사람들이 환호했던 기억이 눈에 선했다. 지금 그 무대에는 셀 수 없는 시체들이 쌓여 있었고 탄환의 연기 사이로 피가 흘러 넘쳤다. 어린 날, 이 무대에서 그는 아카날을 지지하는 연설까지 했다.

“장군님.”

“……그렇게 부르지 마.”

“돌아오십시오.”

“이 무고한 사람들의 피바다로?”

“당신에게서 늘 보이던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쥔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유진의 숨이 그대로 멎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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