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154/256)

  

64화.

그다음 그들의 행선지는 타르안의 첫 무대 장소가 있는 지역인 코넬이었다. 리한은 코넬에 가는 길에 음습한 뒷골목에 들러 권총을 하나 사 왔다. 총기 소지는 불법이라고 들었는데, 유진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리한은 ‘여기서는 돈이면 다 돼’라는 말로 대답했을 뿐이었다. 두 개까지는 구하지 못했다며 그는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리한이 이유 없이 총을 사지는 않았을 것 같아 그녀는 다소 불안한 마음이 되었다. 여기서 그녀의 산하기관 직원 신분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데다가 마법도 쓰지 못했다.

“여기서 당신의 짐짝이 된 것 같은 기분인데.”

“네 액세서리인 나보다 낫지 않을까?”

리한의 블랙유머에는 어딘가 달관한 느낌이 있어서 유진은 속으로 몰래 한숨을 쉬었다. 아메탄에서 리한은 그저 잘생긴 한량 같았는데, 여기서는 불쾌한 느낌의 시선을 끄는 안 좋은 의미의 유명인 같았다.

코넬은 카나엠과는 달리 평범한 곳이어서 유진은 다소 마음을 놓았다. 그들은 마차 안에서 마을 중앙에 놓인 무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광장의 무대였다. 리한은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첫 무대의 추억을 나른하게 속삭여 주었다. 

아카날이 그들을 위해 마련해 준 첫 번째 무대였으며,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 나가 스타람 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는 소소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일화들. 유진은 별다를 것 없는 무대를 눈에 담으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이상하게 폐인이 된 빈트리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보고 싶으면 혼자 갔다 와. 내가 함께 가는 게 현명할 것 같지는 않아.”

“괜찮아요. 여기서 보면 되지.”

하지만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유진을 보며 리한은 무대가 한눈에 보이는 광장 근처의 호텔에 묵기로 결정했다. 카나엠에서와는 달리 후드까지 둘러쓴 그는 괜히 남의 시선을 끌까 봐 몹시 조심하는 것 같았다. 이곳은 너무 평범한 영지라 자본으로 자유를 살 수 없기 때문이겠지.

“여기엔 호웰이 가장 좋아하는 식당도 있지만…… 왠지 영지 분위기도 심상치 않고 해서 난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 마부와 함께 다녀올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뇨?”

“…….”

리한은 별다르게 대답하지 않았다. 유진은 천천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품에 권총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그녀를 직접 지키고 싶어 할 그가, 그 제국의 전쟁터에서도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던 그가 혼자 다녀오라고 할 지경이라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는 뜻이었다. 분명 유진이 나가는 것을 원치 않겠지만 여행의 즐거움을 포기시키고 싶지 않아 내적인 갈등 끝에 말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유진은 뚱하니 말했다.

“저 좀 지쳤어요. 알잖아요, 체력 별로인 거. 나가고 싶지 않아요.”

“그래?”

리한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쓸고, 마부에게 식당 이름을 가르쳐 준 뒤 몇 가지 음식을 사 오라고 지시했다. 식당에 직접 갈 수는 없지만 호웰이 좋아했던 음식 정도는 맛보게 해 주겠다며 그가 다정하게 웃었다.

카나엠에서처럼 호화로운 식당에서 남들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할 수는 없었지만, 작은 무대가 창 밖에 보이는 호텔 방에서 소소하게 식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난생처음 먹어 보는 스타람 음식은 입에 잘 맞지도, 그렇다고 못 먹을 맛인 것도 아니라 그럭저럭 한 끼를 때울 만했다. 슬프게도 호웰이 왜 이 음식을 그렇게 좋아했는지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유진은 원래 식탐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대충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식사를 마무리한 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기 전 마부가 식사와 함께 가져온 와인을 보면서 눈을 빛냈다.

“스타람 와인은 처음이네. 카나엠에서는 이상한 술만 마셨으니까.”

유진은 그녀를 끌어안는 그에게 무덤덤하게 말했다.

“호텔에 이렇게 일찍 들어왔으니 오늘 밤은 술이나 실컷 마셔야지. 그동안 실컷 마시지도 못했는데.”

씻고 나온 리한의 살결에서 평소와 다른 비누 냄새가 났다. 유진은 그의 살결에 얼굴을 묻고 씩 웃었다.

“횟수 제한은 지켜. 널 빈트리처럼 알코올 중독으로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왜요, 그렇게 뚱뚱해질까 봐?”

“그것도 귀엽겠네. 만질 곳도 많아지고.”

그가 그녀의 흰 목에 입술을 댄 채로 속삭였다.

“그럼, 행정국도 안 나가고 도박장에만 나갈까 봐?”

“네가 돈을 잃을 때마다 누구보다도 크게 웃어 줘야겠어.”

반항하지 않는 그녀의 옷 속으로 그의 커다란 손이 천천히 들어왔다.

“그러다가 전 재산을 다 잃으면?”

“거기서 노래라도 부르며 네 다음 판돈을 구걸해 줄게.”

“그럼 왜 술 많이 마시지 말라고 매일 잔소리예요?”

“……네가 일찍 죽을까 봐. 말했잖아. 이 세상에 아무 미련이 없는 내가 두려워하는 유일한 것.”

유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이 세상에 아무 미련이 없다……. 그래서 빈트리에게 껍데기 같다는 말이나 듣고……. 막상 리한은 아무 생각 없을지라도 유진은 그의 텅 빈 표정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왜 이렇게 모든 게 작을까, 넌.”

그가 그녀를 안은 채 속삭였다. 그녀와 그의 키는 30cm 가까이 차이가 났다. 품 안에 쏙 들어오고도 공간이 남았다. 리한은 언제나 조금만 힘을 주어도 그녀가 그대로 부서질 것 같다며 조심스러워했다.

“나…… 와인 마실 거예요.”

“나중에.”

리한이 그녀를 품에 가둔 채 입을 맞췄다.

유진은 정사가 한 번 끝나면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침대에 축 늘어져 있곤 했다. 그녀가 지친 눈으로 리한을 원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와인 마셔야 하는데.”

“마셔.”

“술잔 들 힘도 없어요.”

“스타람 방식으로 술을 먹여 줄까?”

“네?”

“호웰이 좋아하던 방식이긴 한데.”

리한은 나른하게 웃으며 일어나, 와인과 술잔을 가져온 뒤 그녀에게 무릎베개를 해 주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유진의 눈을 바라보며 리한이 씩 웃었다.

“스타람 섬을 처음으로 통일한 사람은 메리란 여왕이야. 그녀는 전쟁 후유증으로 늘 술을 달고 살았고, 보다 못한 그녀의 남편 오키엘은 이런 방식으로 그녀의 주량을 조절했다고 해.”

“어…….”

리한이 와인을 직접 입에 머금어 그녀의 입을 통해 전달해 주었다. 연인들 사이에 가끔 하는 행동이라고 들어 알고 있었지만 유진은 한 번도 시도해 볼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음주는 성적인 것과 섞일 수 없는 오롯한 취미 생활이었던 것이다.

“메리란과 오키엘은, 아메탄의 카를과 이브나만큼이나 신격화되어 있는 연인들이지. 공화정부가 들어선 뒤 스타람 왕조의 흔적들을 아카날이 모두 없애 버렸지만, 전해지는 이야기만큼은 금지할 수 없으니.”

스타람에서 가장 ‘로맨틱한 이야기’를 뜻하는 메리란 여왕과 그의 남편 오키엘 장군의 일화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난 뒤 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호웰이 좋아하는 방식이라고? 다소 충격받은 것 같은 그녀의 입에 다시 한 번 와인을 넣어 주며 리한은 다정하게 속삭였다.

“꽤 괜찮은데.”

“…….”

“호웰이 좋아할 만하군.”

“굳이 얘기 안 해 줘도 돼요.”

유진의 뚱한 표정을 바라보며 리한이 태연하게 말했다.

“100쌍의 커플이 있으면 100개의 로맨틱한 장면이 있는 법이지. 남들의 취향을 따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제 취향이 아니라는 건 알겠네요.”

유진은 질색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리한은 이미 와인 한 모금을 머금은 상태였다. 외국 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을 다짐하며 유진은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스타람의 연인들이 하는 방식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의 부드러운 입술을 통해 풍미가 좋은 와인이 밀려 들어왔다.

“와인 자체는 네 취향인가 봐?”

그녀의 표정만 보고도 만족스러웠다는 것을 알아챈 리한의 입술이 다시 다가왔다. 그의 혀가 살짝 그녀의 아랫입술을 훑을 때에는 이상하게 온몸이 긴장되기도 했다.

“……당신 취향이기도 한가 보죠?”

못 참겠다는 듯이 밀고 들어오는 그의 부드러운 입맞춤을 짧게 받아들인 뒤 달아오른 얼굴로 유진이 가까스로 말했다. 그가 싱긋 웃었다.

“난 너무 좋은데.”

“스타람인은 맞나 보네.”

향긋한 와인 사이로 그의 입술이 몇 번이고 다가왔다. 어느새 그의 한쪽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의 입맞춤이 점차 거칠어지자 유진은 부끄러워져 자신도 모르게 속삭였다.

“그만해요. 이상하게 부끄러워.”

“한 번만 더.”

“취기도 올라오는 것 같은데.”

“거짓말.”

그가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대며 씩 웃었다. 그가 또다시 와인 한 모금과 함께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정사를 끝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러다가 자신의 몸이 더 달아오를 것 같아서 유진은 다음부터는 무조건 거절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더 깊숙하게 감싸 안을 때였다.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희미한 전깃불 대신 횃불이 일렁이며 바깥이 놀랄 정도로 환해졌다.

탕! 탕! 탕!

“악!”

설상가상으로 전쟁터에서 지겹게 들었던 총소리까지 나기 시작했다.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전에 리한이 벌떡 일어섰다. 밖에서 알 수 없는 소동이 일어난 것 같았다.

“찾아! 찾으라고!”

“샅샅이 모두 뒤져서라도 데리고 나와!”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연달아 소름끼치는 총소리가 들려서,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마을 광장에 갑자기 군인들이 빼곡하게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탕! 탕!

“민간인은 협조하라! 협조하지 않으면 즉결 처분한다!”

탕!

여러 가지 소음과 함께 어렴풋하게 알아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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