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아, 유진…….”
“이대로 끝이에요?”
“역시 네 감은 형편없어……. 예상했지만 재미있네.”
그가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한동안 웃었다. 그대로 긴장이 풀려 버린 유진이 흥,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를 놓아주지 않은 채로 리한이 말을 이었다.
“한 번 더 하자. 어디에 걸까?”
“정한 바 있으면 그대로 가야죠. 홀수요.”
리한은 이번엔 그녀의 손을 이끌지 않고, 그가 직접 동전을 두 개 집어 ‘짝수’ 칸에 놓았다. 유진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여자가 주사위를 한 번 더 던졌다. 이번엔 주사위 눈이 3, 3이 나왔다. 여자가 또다시 무표정으로 ‘짝수’ 칸에 두 개의 동전을 더 얹었다. 처음에 걸었던 두 개의 동전까지 합쳐 네 개를 가져온 그가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듯이 또 한참을 웃었다.
“네 말의 반대로만 하면 큰 부자가 되겠는데.”
유진은 그를 잠시 흘겨보았다. 이대로 멈출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을 읽었는지 그가 그대로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다시 옆에 앉고,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술잔을 든 채 싱긋 웃어 보였다.
“네가 직접 해 봐.”
오기가 생긴 그녀가 다시 동전을 집어 ‘홀수’에 걸고 한 번 더 잃는 순간, 리한에게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이번에는 ‘짝수’에 동전을 넣을까 고민하던 유진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리한에게 다가온 술 취한 남자를 알아본 탓이었다. 정작 리한은 놀라지 않았는지 나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술을 한 잔 더 시켰을 뿐이었다.
“이런 박쥐 같은 새끼.”
유진은 자신이 욕먹은 것도 아닌데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가 널 다시 볼 날이 오다니.”
타르안의 멤버 중 하나, 빈트리였다. 살이 많이 찌고 혈색도 별로 좋지 않았지만 유진은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해 혀가 이미 꼬인 빈트리가 리한을 바라보는 눈은 분명 곱지 않았다.
“왕국에 망명했다가, 제국의 혁명군에는 합류하고, 또다시 왕정주의자? 스타람에서 네놈 낯짝을 보게 되다니, 이번엔 공화주의 차례인가 보지?”
빈트리의 공격적인 표정을 바라본 유진은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타르안의 멤버들끼리 반목하고 있다는 건 리한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까 서글퍼진 탓이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흑백 사진의 젊은 그들은 어디에서나 환히 웃으며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예상치도 못했지 뭐야. 우리의 리한 카드민이 제국의 황제 앞에서 광대 짓까지 할 줄이야.”
리한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받아쳤다.
“넌 내 예상하고 똑같아서 놀랍지도 않군. 왠지 카나엠의 폐인이 되어 있을 것 같더라니.”
주사위를 굴리던 무표정의 여자마저도 그들의 대화에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을 유진은 눈치챘다. 그녀는 그 긴장감이 싫어서 보란 듯이 동전을 ‘홀수’에 올려놓았다. 잠시 흔들렸지만 한 번 마음먹은 바 있으면 그대로 가야지. 주사위 눈이 4, 4가 나와 유진은 그대로 또 돈을 잃었다.
“뻔하지.”
리한은 피식 웃으며 시비를 걸기 위해 잔뜩 씩씩거리고 있는 빈트리의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히기까지 했다.
“여기서 도박이나 하다가, 술에 취해 위층에서 잠이 들고, 심심하면 온갖 물건을 사들이고, 그것마저 질리면 다시 도박판에 기어 들어와 술을 마시고. 몇 년째지?”
“네놈이 이 섬을 뒤집고 떠나간 이후부터 계속이지. 그래, 왕 앞에서 시키는 대로 광대놀음 하니까 좋았냐?”
“도박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보다야 낫지.”
유진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시 고집스럽게 동전을 ‘홀수’에 올렸다. 그들의 근처에 있는 사람들 중 리한과 빈트리의 대화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은 유진 외에 없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유진을 놀리듯이 주사위의 눈은 1, 3이 나왔다. 이쯤 되면 유진은 자신의 운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만일 리한이 빈트리와 얘기하지 않았다면 그녀를 보고 숨 막힐 것같이 웃어 주었을 텐데. 그렇다면 자신은 또 짜증을 내고, 그 짜증을 내는 모습이 귀엽다며 리한은 그녀에게 몇 번이고 입 맞추어 주었을 텐데. 그러나 리한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예쁘게 꾸며진 뇌쇄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빈트리에게 말했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좀 마음이 아픈데.”
“지랄하지 마.”
그가 벌떡 일어나 리한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지만, 리한은 물 흐르듯 피한 뒤 간단하게 그의 팔을 제압했다. 너무 쉽게 무너지는 그의 몸에 리한의 눈에 순간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빈트리 역시 사병 출신이었고,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쉽게 앉아 있는 리한에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한이 그를 다시 놓아주자, 빈트리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낮게 말했다.
“네 꼴도 만만치 않아.”
유진은 꿋꿋하게 동전을 올려놓았다. 이번에도 ‘홀수’에.
“내 눈에 넌 더 이상 예전의 리한 카드민이 아냐.”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지.”
리한은 나른하게 대답했다. 딱히 이기고 싶어서 하는 대화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유진은 괜히 자신이 상처받는 느낌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사람 같지도 않아. 텅 빈 껍데기가 되었군.”
“껍데기라도 멀쩡하니 다행이군. 내가 가진 가장 괜찮은 건데.”
“넌 말이야, 네가 가진 모든 걸 잃어버린 채, 지금 꼭 마치…….”
주사위가 던져지고 유진은 또다시 돈을 잃었다. 속으로 욕을 지껄이며 그녀는 남은 동전을 모두 ‘홀수’에 올려놓았다. 그래, 될 대로 되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목하고 있다 해도, 단 한 명 정도는 모르는 척해 줄 수 있는 거잖아. 긴장감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다른 긴장감, 도박판에서 긴장감을 키우는 건 판돈을 키우는 거겠지. 여자가 또다시 주사위를 던졌다. 빈트리가 유진을 손가락질하며 큰 소리로 소리쳤다.
“저 여자의 액세서리 수준이라고!”
그 넓은 도박장에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유진의 테이블에서는 거짓말처럼 주사위의 눈이 3, 6이 나왔다. 그녀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고, 왠지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난생처음 본 이상한 동전 하나가 유진의 한 달 월급쯤 되는 돈의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다음 날 아침에야 알게 된 유진은 뒤늦게 숨이 막히는 증상을 경험해야 했다. 만일 그 정도로 대단한 금액인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돈을 걸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판돈을 다 걸 줄은 몰랐네, 그렇게 꾸준하게 잃다가 말이야. 그런 플레이는 빈트리조차도 못할 텐데.”
“잃고 있던 건 봤어요?”
“빈트리가 귀찮게 말만 안 걸었어도 잃을 때마다 놀려 줬을 텐데 말이야. 안타까웠지.”
“…….”
“마지막에 본전을 다 찾다니 이젠 놀릴 수도 없겠어.”
“……하루 더 있을까요? 여기서 며칠 있으면 은퇴가 몇 년 빨라질 수도 있겠는데.”
“너같이 어설픈 한탕을 한 사람들이 이곳의 가장 큰 고객이야. 빈트리처럼 되거든. 아무리 타르안 시절에 벌어 둔 돈이 많아도 저렇게 살다간 몇 년 내에 파산할 거야.”
유진은 리한의 말에 서글프게 입을 다물었다. 타르안의 팬인 그녀는 빈트리의 변한 모습에 살짝 슬퍼졌다. 호웰에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불같은 성미의 화끈한 매력을 가진 빈트리 역시 좋아했다. 굳이 따지자면 다섯 명 중에서 리한보다는 더 좋아했다. 그런데 그는 살이 쪄서 비대해진 것은 물론, 손을 떨고 눈에 초점이 없는 전형적인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는데다가 리한의 말마따나 이 환락의 도시에서 소비만을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도시는…….”
유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리한은 유진의 머리카락을 손에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도박은 사람들이 삶의 불만을 잊게 만드는 좋은 수단이지. 우리가 거쳐 온 빈민가에도, 평범한 마을에도 정도만 다를 뿐이지 이 정도 도박장은 하나씩 있는데, 특히 이곳은 자본가들을 대상으로 한 극도의 기형적인 도시야. 빈트리 같은 사람들을 입 다물리고 삶을 망가트리기에 딱 좋은.”
“음…….”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인간을 홀리는 건 없으니까.”
리한의 단호한 말에, 유진은 그에게 여기 며칠 더 머물자고 해도 리한은 들어줄 생각이 없었음을 눈치챘다. 리한은 여기서 유진에게 눈이 돌아갈 정도의 비싼 옷을 입히고 예쁜 보석을 걸어 준 뒤 말도 안 되는 금액의 도박을 시켜 주었지만 그것은 하룻밤일 뿐이었다. 그녀는 리한이 언젠가 제국의 연회에서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그 당시에는 뭐라도 된 것 같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 이 도시엔 아마도 리한이 그녀에게 보여 주지 않은 더 많은 쾌락이 남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젊은 날 겪었을 그가 텅 빈 눈으로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가자.”
사람 같지 않고, 껍데기 같다고. 그와 오랜 시간 함께 한 동료가 그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마치 그녀의 액세서리 같다고. 그녀는 물끄러미 마차에 오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몰려드는 스타람 사람들의 시선이 빈트리처럼 말하고 있었다. 공화정의 사상을 만들고 혁명군에도 합류했으면서 왕정으로 돌아간 박쥐 같은 새끼. 그가 걷는 길의 끝에 그녀가 있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었을까?
마차에 올랐을 때, 그 모든 착잡한 생각을 지우는 놀라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호텔 지배인이 호텔의 홍보 때문인지 직접 리한에게 사인을 청하러 온 뒤 건넨 말 때문이었다.
“혹시 타르안에게 무슨 일 있습니까? 재결성 논의라도…….”
리한의 의아한 눈빛을 보고 호텔 지배인은 콧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얼마 전에 호웰 한니브가 왔었거든요. 변한 건 알지만 오랜만에 고향에 오고 싶었다면서. 그저께 그가 떠나자마자 리한 카드민이 왔다는 소식에 여기 머물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
유진은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하루? 하루 차이? 만일 그녀가 뱃멀미로 앓아눕지만 않았어도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리한은 마부에게 다음 행선지를 말한 다음 씩 웃으며 유진의 충격 받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진.”
그녀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 말 없이 마차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리한이 문득 말을 걸었다.
“넌 정말 대단한 능력이 있어.”
“……뭐가요.”
“아무것도 안 하는데 나를 재미있게 해 주는 능력.”
“네?”
“아무 말 없이도 상대를 외롭지 않게 하는 능력.”
“무슨 소리예요?”
“그저 가만히 도박을 하고 있는데도 위로가 되는 능력.”
“지금 돌려 까는 거예요?”
“아니.”
그가 푸른 눈에 그녀를 가득 담으며 말했다. 이 볼 것 많고 요란한 도시에서도 눈에 둘 것은 오로지 그녀뿐이라는 듯이.
“사랑한다는 말이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