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152/256)

  

62화.

유진이 아팠던 그 밤의 대가로 리한은 3년간 전쟁에 매여 있었다. 유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체온이 부드럽게 그녀를 감쌌고, 그녀는 왠지 목이 메어 대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아메탄이라는 연고 없는 땅에 그를 두고 혼자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아픈 와중에도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정말 마력이 하나도 없네요.”

“그런 게 느껴져?”

“제국에서 황제가 마력을 고갈시켰던 것이랑은 또 다른 느낌이에요. 정말 단 하나도 없는……. 요샌 아메니티에서도 마력이 많이 줄었지만, 이렇게 무력한 기분은 처음이에요.”

리한은 살짝 웃으며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옅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너무 무력한데요. 전 가뜩이나 체술도 아예 못하는데, 마법도 전혀 못 쓴다니.”

“좀 무력해도 돼.”

그가 씩 웃었다.

“……네?”

“카나엠에서는 내가 아메탄의 왕녀보다도 귀하게 모셔 줄 테니까.”

“무슨 소리예요? 빈말이라도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

“유진, 여기는.”

그가 그녀의 눈 밑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핏줄이 아닌, 자본과 당원과 군인이 지배하는 곳이야.”

“어…….”

“내가 엉망으로 만들고 떠난 땅에 온 것을 환영해.”

마력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곳, 작은 여관에조차 전깃불이 들어오는 곳, 침대 시트의 재질과 무늬부터가 아메니티와 다른 곳. 유진은 그제야 자신이 정말로 낯선 곳에 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연인이 태어나고 자라 대다수의 인생을 보낸 곳이자, 그에게는 아메니티보다 훨씬 더 익숙할 땅이었다.

언젠가 제국의 전쟁터에서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이곳은 그의 영역이었다. 아무리 그가 버린 땅이고, 그를 버린 땅이라고 해도. 그것을 지금까지 실감하지 못했다니 유진은 자신의 무심함을 잠시 후회했다.

“진짜 미쳤어요?”

유진은 표정 관리를 못하며 속삭였다.

“전용 마차를 쓴다는 게 말이 돼요? 게다가 이렇게 호화로울 것까지는 없잖아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뱃멀미 때문에 이틀을 항구 주변 여관에 머무는 동안, 리한은 남은 기간 동안 그들을 태우고 다닐 고급 마차를 가진 일급이 상당히 높은 마차꾼을 고용했다. 그가 눈꼬리를 휘어 보이며 그녀의 뺨에 입 맞추고 살짝 음울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모든 건 너 때문은 아니고, 나 때문이야.”

“네?”

“어지간히 비밀리에 다니지 않으면 내가 너무 유명한 사람이라 서로 괴로워져.”

리한이 하는 모든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진은 자신이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는 창가를 바라보며 짙푸른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래 봤자 사람들의 눈에 띌 테지만 조금이라도 시선을 피하고 싶었는지 그는 안경까지 쓴 상태였다.

“카나엠은 적절한 곳이지. 날 마주친 뒤 속으로는 경멸해도 소동을 일으킬 수 없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곳이니까.”

“그게 가능해요?”

“유명인을 보고 놀라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로만 다니면. 카나엠에서는 자본이 신분이야.”

유진은 그 누구에게도 캐묻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소리를 들을 땐 계속해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옛날에 리한이 그녀에게 마법에 대해서 자꾸만 물었던 것처럼, 그녀가 또다시 그게 가능하냐고 반복해서 묻자 리한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자유 역시 자본으로 사야 해, 담당자님.”

여행 경비에 대해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어차피 리한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아서 준비하겠거니 했는데, 이토록 많은 경비를 예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리고 짐작해 보건대 고급 마차는 시작에 불과한 것 같았다. 왜냐하면 창밖에 보이는 풍경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빈민지대를 지나, 보통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 같은 평범한 마을을 지나, 온갖 것이 반짝이는 황금빛 도시로.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대리석 문을 지날 때, 마부는 유진이 알 수 없는 단위의 통행료를 냈는데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 도시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여, 여기가 카나엠이에요?”

“응. 호웰의 고향이지만 너무 많이 바뀌어서 의미는 없지.”

리한은 마부에게 또 뭐라고 지시했다. 유진은 창밖에 보이는 풍경에 위화감마저 느끼며 몸을 한 번 떨었다. 번영했다고 일컬어지는 도시 아메니티와도 전혀 느낌이 달랐다. 모든 건물이 너무 화려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적은 데에 비해 길이 지나치게 넓었다. 그리고 이 도시를 거닐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고급스러운 옷차림과 액세서리를 착용한 채 세상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상해.’

유진은 한참 동안이나 이 위화감이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해야만 했다. 리한이 어느 가게 앞에서 마차를 세워 그녀와 함께 내렸다. 그녀는 얼떨떨하게 리한이 사 주는 고급스러운 옷과 반짝거리는 액세서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런 것들을 받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나, 도시가 주는 위압감 때문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인형처럼 자신을 꾸며 주는 손길에 익숙해져야 했다. 좋아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리한을 난감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여기서 자신의 수수한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가는 오히려 남들의 이목을 모두 끌 것 같았다.

소재부터가 남다른 옷을 산 건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리한은 분위기마저 달라 보였다. 조금 놀라운 것은 돌아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리한을 알아본 것 같았으나 별달리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진은 이 이상한 분위기가 적응이 되지 않아 초록색 눈동자를 굴리며 침묵을 지켰다.

‘아, 알겠다. 이 도시의 이상한 점.’

리한은 유진을 데리고 다시 마차에 올라탔고, 거대한 호텔 앞에서 내렸다. 마치 귀족의 저택 같은 화려함을 지닌 곳이라 유진은 살짝 주눅이 들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점은 이런 호화로운 호텔이 주변에 한두 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차를 타고 오면서 본 스타람의 대다수 땅은 그저 시골 같았는데 대리석 문을 하나 통과했다고 이런 별세계라니?

‘가치를 생산하는 곳이 없어. 모든 것이 소비를 위한 곳이네.’

마차를 타고 몇 군데 들렀을 뿐인데 이미 다 본 것 같은 작은 규모의 화려한 이 도시에는 온갖 고급 상점과 호텔, 정체를 알 수 없는 화려한 건물이 들어차 있었지만 모두가 그저 돈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곳이었다.

“감상은 나중에 말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당황해하는 표정이 역력한 유진의 볼에 입을 맞춘 뒤, 리한은 그녀의 손목을 이끌었다.

“아직 카나엠을 절반도 못 봤으니.”

리한이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호텔의 지하였다. 아메탄에서는 사행성 도박이 불법이었지만 종종 시장판 같은 곳에서 낮은 판돈의 단순한 게임이 이루어지곤 했기 때문에 유진은 단번에 이곳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화려하고 요란한 도박장이었다. 유진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리한을 따라 가장 큰 테이블에 앉았다. 리한이 익숙하게 유진은 이름조차 모르는 술 두 잔을 주문했고, 예쁜 과일 조각들이 올라간 오색 빛깔의 술잔이 유진 앞에 놓였다.

“소금을 살짝 핥고…….”

리한은 아무 말도 없는 유진에게 몸을 기울이고 낮게 속삭였다.

“한 모금 마시면 돼. 하지만 천천히 마셔. 도수가 높아.”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은 술이 미각을 자극하며 넘어갔다. 유진은 놀라운 맛의 술도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는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게 그들에게 몰려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주목받는 것을 예전부터 극도로 싫어했던 그녀는 이 이상한 감각이 불쾌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편치 못한 표정을 눈치챈 리한은 구리로 만든 난생처음 본 커다란 동전을 몇 개 그녀에게 건넸다. 그가 한쪽 손을 들자 호텔의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유진, 이런 것 해 본 적 있어?”

“……도박이요?”

“간단해.”

일하는 여자가 상당히 복잡하게 생긴 기계에서 몇 가지 스위치를 차례로 누르는 조작을 하자 테이블 한쪽이 환하게 빛났다. 리한은 천천히 뒤에서 그녀를 안다시피 하며 팔을 감싸 손을 잡았다. 그에게 안긴 게 처음도 아닌데 온몸이 긴장되었다. 그를 모르는 척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리한은 그 시선을 완벽하게 무시한 채,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여자가 주사위 두 개를 던질 거야.”

이상하게 퇴폐적인 분위기의 도박장에서, 그녀의 팔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리한의 체온이 낯설었다. 그녀의 손을 감싼 그의 손이 아까 그가 주었던 이상하게 큰 동전을 집었다. 그가 유진의 귓불에 살짝 입 맞추고 말을 이었다.

“여러 가지에 걸 수 있어. 기본적으로는 주사위 눈의 합을 생각해. 짝수? 홀수? 합 그 자체? 아예 숫자를 조합하는 것도 가능하지. 배당은 저기를 참조하고.”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지? 유진은 아주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을 감싼 리한의 체온은 이상하게 평소보다도 감각적이고, 그의 커다란 손에 잡힌 그녀의 손은 너무 작았으며, 모든 사람들이 침묵한 채 그들을 힐끗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난생처음 해 보는 도박의 미묘한 긴장감 때문에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우물우물 중얼거렸다.

“……홀수?”

그녀의 손을 잡은 그가 천천히 테이블에서 ‘홀수’라고 빛나고 있는 칸에 그녀가 쥐고 있던 동전을 놓았다. 빈손이 된 그녀의 손에 천천히 깍지를 끼고 손을 함께 물린 그가 일하는 여자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무표정의 여자가 그대로 주사위를 두 개 던졌다. 눈이 2, 4가 나왔다. 여자는 그대로 테이블에 놓인 그녀의 동전을 가져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유진이 눈을 깜빡이자 리한이 풋, 하고 웃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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