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외전 5. 스타람 여행기
휴가지로 원래 유진의 고향을 가기로 한 뒤 그녀는 그날 밤부터 온갖 상황을 걱정하며 투덜거림을 쏟아 내었다.
“절대, 절대, 절대 가족은 만나면 안 돼요.”
“왜?”
“이것저것 물어볼 게 뻔한데 귀찮아요. 게다가 만약 아빠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분명히 당신을 데리고 새벽 배부터 탈 거예요.”
“그게 뭐 어때서? 네 몸통만 한 물고기라도 잡으면 점수 좀 따겠군.”
“우리 부모님께 점수를 왜 따요?”
“잃는 것보단 낫잖아?”
유진이 그를 데리고 고향에 가기 싫은 100가지 이유를 대는 족족 리한은 그게 뭐 대수냐는 듯이 그녀의 속을 뒤집는 발언을 하곤 했다.
“엄마랑 만난다면…… 아마 자랑하고 싶어서 온 동네를 데리고 다닐 것 같은데 원숭이 취급 받을 수도 있어요.”
“그래? 림프 가져갈까?”
리한은 태연하게 대꾸했지만, 유진은 리한이 여동생에서부터 학교 선생님, 동네의 의원을 마주치는 상상까지 하며 한숨을 쉬느라 그를 노려보지도 못했다.
“만일 의원에서 찾아와 스타람 사람을 처음 본다며, 마력을 좀 집어넣어 봐도 되냐고 조르기라도 한다면…….”
“그건 의료국에서도 못해 본 거잖아. 의료국 징표를 받아 와. 네가 관찰 결과를 보고하면 추가 수당을 좀 받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다음 날까지 유진이 설레기는커녕 벌을 받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자 리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고향이 싫다면 스타람에 같이 가 주겠다고 선심 쓰듯 내뱉었다. 유진은 사양하지 않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재미있다는 표정을 본 뒤에야 유진은 처음부터 리한이 자신의 뜻에 따라 줄 예정이었고 그녀의 고향 운운한 것은 하루 동안 그녀를 놀리기 위해서였음을 깨달았다.
“재밌었어요? 내가 괴로워하는 걸 보는 게?”
“어.”
그는 부루퉁한 유진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씩 웃었다.
“재미있다기보다는 귀여웠지.”
유진은 자신과 한 달 이상 지내고 나서 귀엽다고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리한뿐임을 다시 한 번 더 주지시켜 줘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걱정하는 것도 귀엽고 짜증내는 것도 귀여우니 넌 참 좋겠다.”
“그 이상한 취향을 누구한테 좀 빌려주면 안 될까요? 아주 일부라도.”
“미쳤어? 어떤 빌어먹을 놈한테?”
“아린스한테요.”
물론 유진이 그에게 더 이상 짜증을 내지 않은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오랫동안 꿈꿔 왔던 소망이 이루어질 것 같다는 기대에 가슴이 울렁거렸기 때문이다. 리한과 함께 간다면, 어쩌면 호웰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그런 사심을 품고 가고 싶은 여행지도 잔뜩 적어 놓았는데…….
눈을 빛내며 스타람 섬의 지도를 가져오는 유진을 보고, 그녀의 속을 다 안다는 듯이 리한이 피식 웃었다.
“내일부터 휴가라며?”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일을 처리하고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벌떡 일어난 유진을 행정국 앞까지 찾아온 사람은 그녀의 대학 동기이자 룸메이트 린이었다. 린은 퇴근 시간을 어지간하면 무조건 지키는 유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랴부랴 시간을 맞춰 행정국까지 달려왔다.
“좀 늦었지만 네 생일 선물이야. 네 생일 전에 주문했는데, 이제야 받아 볼 수 있었거든. 수입품이라서.”
“응?”
유진은 고급 천으로 둘러싸인 포장에 금박으로 덧댄 리본이 예쁘게 묶여 있는 선물을 떨떠름하게 받아 들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유진은 린의 생일이 언제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살짝 미안해져서였다.
“우리 원래 생일 챙기던 사이 아니잖아. 내 생일은 어떻게 알았어?”
“음, 유진……. 이럴 땐 기대하지 않았는데 정말 고맙다, 이렇게 말해도 되는데.”
“고맙지, 당연히.”
린이 머쓱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딱히 엄청나게 친하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지만, 노엘이 고향으로 내려가고 나서 그나마 자주 만나는 동기였다. 예전에 룸메이트이기도 했었고 또 그러다 보니 주제넘게 몇 마디 충고도 하는 사이인 적도 있었으니까……. 항상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미소를 띠고 있는 린은 눈을 깜빡거리며 걱정스레 물었다.
“연차를 꽤 오래 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어디서 들었어?”
“식당에서, 아린스 선배님이.”
꼭 남의 휴가를 여기저기 소문내는 사람들이 있다. 유진은 한숨을 한 번 쉬고, 어깨를 으쓱한 뒤 말했다.
“여행 가려고.”
“뭐? 네가? 여행을? 진짜? 왜? 자의로?”
“……스타람에.”
“아…… 리한이랑?”
“어.”
“와, 로맨틱해! 연인의 고향에 같이 가고!”
린이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유진은 슬그머니 딴청을 부렸다.
“…….”
“잠깐.”
가만히 시선을 피하는 유진을 눈치챈 린은 기가 찬다는 듯이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
“설마 호웰 보러 가는 건 아니지?”
“……기대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냐?”
린은 잠시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유진이 얼마나 호웰을 좋아했는지는 예전 룸메이트로서 넘치도록 잘 알고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잘생긴 연인이 생겨도 그녀의 취향은 변함이 없는 듯했다. 물론 그 연인은 딱히 그 사실을 달가워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린은 눈을 한 번 굴리고, 악의 없이 말했다.
“호웰이 리한보다 좋은 사람일 것 같지는 않은데. 너 남자 보는 눈 없잖아.”
“웃기지 마, 너보다는 나아.”
“결과로 말하자. 이아크와 류스카 중 누가 덜 좋은 사람인지.”
다 대학 다닐 때 일이었다. 린은 유진과 이아크가 교제했었던 것을 아는 단 하나의 대학 동기였다. 간단하게 유진의 말문을 막아 버린 린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이거 선물 부피도 작은데 여행에 들고 가라.”
“응?”
“정말 특별한 밤에 풀어 봐.”
린이 건넨 선물은 딱히 부피가 크지 않고 심지어 흐느적거리기까지 했다.
“네 애인이 문 상단에서 가져온 거라면 딱히 기대는 안 되는데.”
“류스카를 통한 게 아니니 그런 건 걱정하지 마.”
“그럼 대체 뭔데?”
“있어.”
린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리한은 절대 선물하지 못할 것. 하지만 나한테 둘 다 감사하게 될걸?”
유진은 전혀 기대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린의 선물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짐을 싸면서 성의 없게 가방 속에 던져두었다. 리한이 그건 뭔데 포장도 풀지 않고 챙기느냐 묻자 그녀는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린 아시에라고, 몇 번 말한 적 있는 내 옛 룸메이트가 줬어요.”,
“포장도 안 풀어 봐? 안 궁금해?”
“특별한 밤에 풀어 보라기에. 걘 원래 가끔씩 어딘가 꿈꾸는 것처럼 사는 면이 좀 있어요.”
“네가 그런 부탁을 들어주다니 놀라운데.”
“어차피 별로 안 궁금하니까 안 들어줄 이유가 없죠.”
오히려 리한이 조금 궁금해하는 것 같아 유진은 새침하게 대답했다. 애초부터 자신의 뜻에 따라 줄 거였으면서 하루 동안 걱정하게 한 것에 대한 작은 복수가 되길 바라며.
“얘가 대학 때부터 부잣집 상단 아들이랑 연애질해서 사치품들을 매일 방에 가져다 날랐거든요. 그 덕분에 문 상단의 물건은 지겹도록 봐서 궁금하지도 않아요. 뭐, 고급 수입 손수건 같은 거겠지.”
“……부러웠을 수도 있겠네.”
“그다지. 난 류스카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게다가 꼭 갖고 싶을 정도로 예쁜 것도 없었어요.”
* * *
리한은 유진이 내민 ‘가고 싶은 곳’ 목록을 하나하나 재구성하며 여행 경로를 지정했다. 스타람에서 살던 사람이니 그보다 더 좋은 여행 동료가 없었다. 그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갈 첫 번째 목적지는 호웰이 태어난 곳, 카나엠이었다. 유진은 리한이 툴툴대면서도 그녀가 처음에 말한 곳들을 모두 경로에 넣었다는 것이 감동스러웠다. 그러나 리한은 나른한 눈으로 기대하지 말라는 듯이 덧붙였다.
“호웰의 생가는 못 가. 한참 전에 철거당했을걸. 카나엠은 완전히 다 뒤바뀌었거든. 이제 더 이상 가난하고 한적한 시골 영지가 아냐.”
“그럼요?”
“환락과 소비의 도시지.”
“네?”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나을 거야.”
유진은 더 이상 캐묻지 못했는데, 배에 탄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심한 멀미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스타람 섬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몸이 축 늘어져 거의 리한에게 업히다시피 하며 더 이상 이동하지 못하고 항구 근처의 여관에 묵어야 했다.
한 끼도 먹지 못한 채 여관 침대에 쓰러진 유진은 걱정이 가득한 리한의 눈을 보며 기운이 다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으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난 네가 아프면 겁나.”
“어릴 때부터 뱃멀미는 일상이었어요. 하루만 좀 쉬었다 가면 돼요. 일정이 하루씩 밀려서 어쩌지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리한은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감쌌다. 유진이 그의 팔을 이끄는 바람에 그는 옅은 한숨을 쉬며 유진의 옆에 누워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진은 속이 메슥거리는 와중에도 그의 날렵하게 뻗은 눈매가 나른하니 예쁘다고 생각했다.
“유진.”
그가 낮게 속삭였다.
“부탁 하나만 하자.”
“뭔데요?”
“엄청 이기적인 부탁.”
이렇게 갑자기? 이런 상황에? 유진은 그가 무슨 말을 할까 싶어서 눈을 깜빡였다. 그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리한이 그를 여러모로 성가시게 하는 아메탄 왕국에 자리 잡은 것은 전적으로 유진 때문이었다. 공화국에 자리를 잡았다면 분명 혁명 동지로 높은 자리에 올라 영지라도 하나 받았을 텐데, 그는 작은 아메탄 왕국에서 왕명에 따르며 조용히 살고 있었다. 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된 사람이 외국의 왕에게 충성하고 있다니. 그는 유진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뭐든지 상관없다며 늘 대수롭지 않게 웃곤 했다.
“나보다 오래 살아.”
그의 입에서 너무나 뜻밖의 말이 튀어나와서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
“넌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리니까, 아주 비합리적인 부탁은 아닌 것 같은데.”
“…….”
“네가 아픈 걸 보고 있는 게 내게는 너무 힘든 일이라.”
리한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정말로 네가 죽을까 봐 걱정했던 밤이 생각나기도 하고. 내게 단 하나 자신 없는 일은, 네가 없는 세상에서 사는 거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