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제가 유진과 막역한 사이라서 매일같이 만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더 좋은 조언을 해 줄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유진에게 그런 친구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하나 있던 중학교 친구도 고향으로 내려간 걸로 알아요. 다만 제가 유진을 좀 아는 입장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죠.
“유진은 타르안밖에 좋아하는 게 없어요.”
유진을 아주 가끔가다 식당에서 만나면 이런저런 대화를 가볍게 나눌 뿐이지만 유진은 사실 대학 1학년 때부터 거의 바뀌지 않았거든요. 유진은 뭐랄까, 이미 아주 옛날부터 많이 늙어 있는 느낌이었어요.
“봉쇄령이 풀렸으니 어지간한 물건들은 다 갖고 있을 테고…….”
제 말이 사실인지, 리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하긴, 예전에 밀수업자에게도 그 돈을 줘 가면서 온갖 타르안의 물품들을 사 모으던 애인데 봉쇄령이 풀린 이상 현존하는 모든 것들을 갖고 있겠죠.
“아, 그 애의 꿈은 타르안 다섯 명의 공연을 다시 한 번 보는 거예요!”
“그건 유진에게도 말했지만, 지금은 불가능해요.”
리한은 단호하게 말했어요. 제국의 멸망 뒤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봉쇄령도 자연스럽게 풀렸지만 타르안은 재결성되지 않았어요. 리더였던 리한의 탈퇴 이후 멤버들이 흩어질 대로 흩어졌기 때문이라던데요. 애초부터 성격도 다르고 원하는 바도 달랐대요. 리한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기술국장님인 체스트만큼 늙어서 성깔머리가 다 죽고 옛날 추억이나 팔아먹으며 살고 싶어질 때가 와야 한 번 정도 무대에 같이 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눈을 한 번 굴리고 다시 말했어요.
“그럼 타르안의 이야기들을 해 주는 건 어때요? 저희는 사실 스타의 삶을 모르잖아요. 유진은 작은 에피소드라도 즐거워할 거예요.”
“그건 매일 해 주고 있어서.”
“편지는 어때요? 직접 쓴 손 편지요!”
“제가 전쟁터에 있을 때 매일 써서…… 집에 편지 상자만 두 상자예요.”
“아니면 직접 만든 노래를 불러 주세요. 와, 생각만 해도 로맨틱하다. 리한의 자작곡을 받는 게 소원이라는 귀족들의 명단만 읊어도 밤을 새울 텐데.”
“……그것도 거의 매일.”
“아, 음…… 그럼…… 음식을 해 주는 건 어때요? 유진은 손을 쓰는 건 다 못하거든요. 식자재 다듬는 것도 비위가 약해서 싫어하고.”
“식사 담당이 접니다. 린 말대로 제가 요리를 훨씬 잘해서.”
“아, 유진은 술을 좋아해요. 걘 술을 마시면 횡설수설하는데, 그 주정을 다 들어 주고 꼭 안아 주면 좋아할 거예요. 특히나 어린 시절 얘기 나올 때! 뱃멀미가 심해서 배를 못 탔다는 얘기, 비위가 약해서 물고기 손질하다 토한 얘기, 그물을 끌어 올리다가 기절한 얘기 같은 거요.”
“알코올 중독 될까 봐, 제가 횟수를 제한하긴 했지만…… 술을 마실 땐 꼭 옆에 있어 주죠.”
리한의 눈에 차차 좌절이 덧씌워지는 것을 보면서 저는 다급해졌어요. 적어도 그는 제가 유진을 가장 잘 아는 동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뻔한데, 이렇게 아무 도움이 못 되는 건 제 자존심에도 금이 가는 일이었거든요.
하지만 정말로 그다음은 생각나지 않았답니다. 아니, 타르안을 가장 좋아하는 애의 애인이 타르안 출신이면 대체 그 애인은 존재 이외에 뭘 해 줄 수 있나요? 유진이야 참 좋겠지만, 리한은 이럴 때 난감하겠다 싶더군요. 하지만 동시에 유진이 굉장히 부러워졌어요. 저희 여자 동기들끼리 모이면 가끔 ‘결국 승자는 유진’이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그 말이 가슴에 와닿더군요. 난다 긴다 하는 귀족들도 아주 가끔밖에 듣지 못하는 리한의 노래를 매일 밤 듣다니요.
“혹시 좋아하는 물건은 없나요?”
“음, 유진은 호웰을 정말로 좋아했어요. 리한이 스타람 섬 출신이니, 호웰이 입던 옷이라던가 뭐 그런 걸 구해서 선물하는 건 어떨까요?”
“……그건 끔찍하게 싫군요.”
상상만 해도 싫다는 리한의 얼굴에 저는 잘못 짚었다는 걸 알았죠. 리한은 한숨을 쉬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중얼거렸어요.
“지금까지 받았던 생일 선물 중 가장 좋았던 게, 노엘 하이트라는 중학교 동창이 선물해 준 타르안의 LP들이었대요. 최초로 받은 생일 선물도 노엘이 준 타르안 사진이라던데요. 어떻게 해야 제가 유진의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생일 선물을 줄 수 있을까요?”
“……제 기억으로는, 유진은 옷이나 장신구에는 흥미가 없어요. 공부를 잘했지만, 또 공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요. 입도 짧아서 먹는 것에도 큰 감흥이 없고.”
“그건 알죠.”
리한은 차분하게 대답하더니, 하소연할 사람이 없었다는 듯 제게 놀라운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예전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리한의 집에 들어오게 되면서 목걸이를 돌려주었다고 하더군요. 평생 하숙비 대신이라고, 지닌 것 중 가장 값나가는 것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니 이걸로 지불하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저는 너무 유진다운 행동이라 할 말을 잃었어요. 일단 받은 선물은 자신의 것이고, 공짜로 얹혀살긴 싫으니 그 선물을 다시 돌려주는 건 어느 나라 상도덕이죠? 어이없어하는 리한에게 자신은 리한만 있으면 된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나.
“그러면 유진은 아마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거예요.”
결국 아무 도움이 못 된 저는 시무룩하게 말했지만, 그래도 유진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 흡족했어요. 아주 옛날부터 인생 다 산 노인 같았던 그 애가 세상을 좀 살 만하다 느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매일같이 ‘그냥 사는 거지, 뭐.’라며 무뚝뚝한 얼굴로 권태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던 게 아직도 기억나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리한의 웃음에 행복이 엿보여서 저도 좋았답니다. 행복한 사람들을 보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잖아요. 결국 리한은 그녀와 아메니티에 한 곳밖에 없는 사진관에 가서 흑백 사진이나 한 장 찍고, 그가 곧 다녀와야 할 제국의 출장을 대비해서 LP판을 하나 녹음해 줘야겠다는 말을 하고 일어났어요. 리한은 처음으로 그녀의 생일을 챙겨 주는데 딱히 특별한 게 없다며 시무룩해했지만, 저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리한이 그녀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일상은 매일매일이 가장 행복한 생일 같을 거예요!
외전4. 일상
산하기관은 복지가 좋은 편이어서, 연차를 꽤 자유롭게 낼 수 있었다. 유진은 리한에게 여름휴가 계획을 세워 보자고 이미 제안한 상태였다. 유진이야 원래 휴가에 대해서라면 여행을 떠나기보다는 집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늘어지게 잠을 자는 것이 취향이었다.
리한은 요즈음 책을 한 권 쓰고 있었다. 그는 스타람의 독재가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의미에서 공화정의 실패인지 찬찬히 서술하기 시작했다. ‘나의 공화주의’가 그의 이상에 대한 글이었다면, 그가 훨씬 더 공들여서 쓰고 있는 책은 그의 현실적인 실패를 담은 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유진은 어떤 의미에서, 그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나중에 공화주의자들에게 ‘나의 공화주의’보다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거의 매일 집의 작은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있는 리한의 기분 전환이라도 해 줄 겸, 유진과 리한은 이번 휴가엔 어딘가 가기로 의견을 모았고 서로 보내고 싶은 휴가 계획을 세워 함께 의논해 보기로 했다. 퇴근하고 돌아온 그녀에게 내민 리한의 휴가 계획에 유진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대체 왜?”
리한은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씩 웃으며 말했다. 유진이 얄밉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꼈다.
“제가 싫으니까요.”
“난 가고 싶은데.”
“제 휴가예요.”
“내 데이트인걸.”
리한이 휴가 계획이라고 짜 놓은 목록은 다음과 같았다. 태풍이 올 때마다 유진의 가족이 몸을 피했던 동굴, 유진이 다녔던 초등학교, 유진이 태어났다는 바닷가의 작은 집, 유진이 처음으로 타르안의 무대를 보았던 렌토의 시내…… 유진은 절대 갈 수 없다는 듯이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번엔 제 의견을 좀 봐 주실래요?”
그녀가 내민 계획표를 본 리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안 돼.”
“대체 왜?”
“내가 싫으니까.”
“난 가고 싶은데.”
“난 별로야. 아카날이 있는 땅은 밟고 싶지도 않아. 게다가…….”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뭐야? 타르안의 첫 무대 장소, 타르안이 결성되었던 아카날의 영지, 게다가 호웰의 생가, 호웰이 다닌 학교, 호웰이 좋아하던 식당? 난 네 역사가 궁금한데, 넌 호웰의 역사가 궁금한가 보지?”
“뭐가 어때서요? 전 정말 가고 싶어요.”
“나도 렌토가 정말 가고 싶어.”
리한이 돌아오고, 유진과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체스트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둘 다 고집이 대단한데 누가 져 주겠냐는 나름 통찰력 있는 조언도 했다.
“그럼 동전 던지기를 하자. 공평하게.”
서로가 가장 끔찍하게 싫어하는 휴가지를 절대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리한의 손이 동전을 던졌다. 유진은 앞, 리한은 뒤에 걸었다. 동전이 테이블에 떨어지자마자 그가 잽싸게 동전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싱긋 웃었다.
“마지막으로 조건 하나씩만 걸까?”
“들어 보죠.”
“앞면이면…… 그래. 스타람에는 가지만, 호웰은 만나지 않는다.”
유진이 피식 웃었다. 그녀가 받아들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뒷면이면…… 제 고향에는 가지만, 우리 가족은 만나지 않는다.”
그들의 눈이 마주치고, 리한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거래가 성립되고, 리한이 천천히 손을 치우려는 찰나 유진이 재빨리 그의 손을 잡았다.
“잠시!”
“응.”
“바꿔도 돼요? 내가 뒷면! 뒷면일 것 같아.”
“그래.”
리한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뒷면이면 스타람에 가는 대신 호웰은 만나지 않고, 앞면이면 유진의 고향에 가는 대신 유진의 가족을 만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빠르게 완성한 유진은 각자의 서명까지 받은 뒤 심호흡을 했다. 리한이 천천히 손을 들자, 이브나 왕비가 자애롭게 웃고 있는 모습이 새겨진 동전의 앞면이 얄밉게도 빛나고 있었다.
“…….”
유진은 맥없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리한은 숨이 막힐 듯이 킬킬거리며 웃느라 그녀의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놀랍지도 않네요.”
그녀가 동전을 던지며 신경질을 냈다.
“제 감은 언제나 틀리더라고요.”
“한두 번이야?”
리한이 놀리듯이 말했다.
“네가, 내가 아닌 호웰을 좋아했다는 점에서부터 육감이 형편없다는 걸 알 수 있지.”
제복을 벗으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젓는 유진의 입술에 그가 짧게 입 맞추며 그녀의 은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따가 림프 쳐 줄게. 우울한 일이 생겼으니까.”
작정하고 긴 눈꼬리를 휘며 웃어 보이는 그의 매력적인 얼굴을 바라보다가, 유진은 어쩔 수 없이 피식 웃고 그를 꼭 끌어안고 말았다. 그가 돌아오고 나서 늘 그랬듯이, 좋은 저녁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