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149/256)

  

59화.

“너무 큰판이긴 한데…….”

노엘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동안, 마담이 키득대며 웃었다.

“이번 판에 잘 끼면, 그 열등감이라는 게 사라질 것 같은데.”

그는 정신없이 그 작전에 힘을 보탰다. 리한 카드민이 곧 입국할 것이고, 인파 중 몰래 2황자가 들어올 것이고, 아메니티의 마력을 없앨 것이다…… 마력이 사라지면 마법에 기반하고 있던 신분제가 들썩일 테고, 한몫 크게 잡아 걷잡을 수 없는 재력의 차이를 만들자…… 킹이 하는 말은 노엘을 포함한 거상들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물론 결국 나중에 그들은 산하기관 연구원 자리에 모두가 타협했다.

그즈음 노엘은 아마, 유진과의 틈을 메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을 것이다. 당당하게 유진의 곁에 있어도 되는 위치가 되기 위해서 그는 홀린 듯이 최선을 다했다.

다만 유진이 타르안의 해체에 상당히 동요한다는 것이 불안했는데, 그는 타르안을 맨 처음 봤을 때 유진을 빼앗겼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리한과 최대한 마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논리가 없는 불안함이었다. 일부러 리한의 얼굴이라도 보겠다는 그녀를 데리고 엉뚱한 곳으로 향했지만 일은 꼬이고 꼬여 결국 그녀는 리한의 담당까지 하게 되었다.

* * *

“사표?”

체스트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노엘은 쭈뼛대며 대답했다.

“뭐, 이제 더 이상 제가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고…… 대충 참고할 만한 물건은 다 모인 것 같으니까…….”

“아니,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사실 출근해서 아무것도 안 하는데 월급 받기도 미안하고, 그래서요.”

기술국의 연구는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원리를 파악해 낸 직원들이 스스로 이런저런 것들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엘은 자신이 없어도 괜찮다는 것을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다.

심심풀이로 연구원들이 매일 들여다보는 기계들을 공부한 적도 있었지만, 딱히 재미가 느껴지지 않아 금방 때려치웠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그는 아무래도 돈이 직접 왔다 갔다 하지 않으면 도무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토록 원하던 지위도 생겼고, 기회를 잘 타서 렌토 지역에 영지도 샀는데 그 이후 목표가 사라져 버리자 인생이 붕 뜬 느낌이었다. 잃을 것이 생기니 예전처럼 거대한 밀수판에도 못 끼겠고, 술과 마약도 조심스러웠다.

“옛날엔 유진이 왜 그렇게 재미없게 사나,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물론 그 모습이 좋았지만.”

노엘은 종종 체스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곤 했다. 가끔 밀수한 새로운 스타람 전기용품을 들고 갈 때 독대를 했는데,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노인의 표정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체스트는 부모가 거상이어서 그런지 장사판이 돌아가는 것도 자세히 알고 있었고, 유진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근데 이제는 알겠어요. 잃을 것이 많아서 그랬나 봐요. 유진은 매일 일하기 싫다고 투덜댔지만 사실 자기 일상이 좋았던 거예요. 전 그렇게 오랜 시간 옆에 있으면서도 몰랐어요.”

“시간은 공평하지 않지. 하지만 유진은 정말 널 많이 아꼈단다.”

체스트는 노엘이 건넨 사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수사국에 쫓길 때, 진심으로 걱정했어. 심지어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도망치라고 소리 질렀지 않니. 아마 그때 리한이 널 제압하지 않은 건, 유진이 결국 네 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서였을 거야. 나도 그때 느껴지던데. 유진은 나보다 노엘을 더 걱정한다는걸.”

“아…… 그땐 죄송했어요…….”

노엘은 몇 번이나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체스트는 괜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네 오랜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의미야. 사람이 사람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알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매몰차게 말했겠죠. 마음 접으라고.”

유진이 노엘에게 자신을 포기하라고 말한 지 2년이 흘렀다. 노엘은 그동안 네가 리한을 기다린다면 나도 널 기다리겠다며 버텼다. 하지만 유진은 가망 없는 것에 힘쓰지 말라며 언제나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대신 갚아 주겠다고 나선 아버지의 빚도 정색을 하며 거절했고, 식당에서 마주칠 때에도 간단한 인사만 할 뿐이었다.

“외모 때문일까요? 근데 그건 그 자식이 너무 잘생긴 거지, 저도 뭐 나쁘지는 않잖아요. 춤하고 노래?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타르안이기 때문에? 대체 왜, 왜 그 자식이죠? 이제는 제가 유진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지 않나요?”

“……아마도 모두 다 정답은 아닐 게다…….”

체스트가 한숨을 쉬었다. 노엘은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는 듯 쓸쓸한 얼굴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가 다시 한 번 사표를 내밀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여기는 제 자리가 아니에요. 받아 주세요.”

“…….”

“생각해 보면 여기까지 절 올라오게 한 건 그냥 열등감이었어요.”

그는 어느 기억도 안 나는 밤, 술집 마담에게 들었던 단어를 상기하며 말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유진에 대한 열등감…… 그녀 옆에 당당하게 서고 싶다는 마음…… 그러다 보니 자꾸 해 줄 것을 찾고,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일들을 존중하지 않았나 봐요. 자꾸만 내가 그녀보다 많이 가진 유일한 것, 돈에 더 집착하게 되고…… 비뚤어진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다시 돌아가야죠.”

체스트는 벌떡 일어나 노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노엘.”

노엘은 민망해하면서도 늙은 기술국장의 아쉬움을 이해했기 때문에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난 네가 좋았다. 왜냐하면…….”

체스트의 주름진 손이 한 번 더 그의 손을 쓸었다.

“나도 그 열등감으로,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지.”

“…….”

“마력을 남들보다 터무니없이 갈무리 못 한다는 열등감…… 자꾸만 다른 것으로 덮고 싶었어. 너는 돈이었겠지만 나는 명예였단다. 그 명예를 좇아서 여기까지 온 거지. 물론 도착점에서 느낀 감정이 너와 내가 다르겠지만, 그래도 난 널 이해해.”

“……감사합니다.”

체스트가 다시 자리로 돌아가, 노엘의 간단한 사표를 펼쳤다.

“받아들이마. 이제는 그럼 뭘 할 거니? 다시 밀수판으로 돌아가나?”

“아뇨. 그냥, 저는 유진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니,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가려고요.”

“처음 그 자리?”

“렌토에 돌아갈 거예요. 어차피 처음부터 아메니티에 올 생각은 없었거든요. 거기에 영지를 사 두었으니 이것저것 해 보려고 해요. 상단을 꾸리든, 관광 사업을 하든. 유진 말고, 제 인생을 걸 만한 것을 찾아보려고요. 그동안은 유진만 보며 살아서, 제 자신을 보지 못했거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노엘은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유진을 잊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온하게 사는 유진의 삶을 더 흔들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마음을 전하고, 거절도 당했는데. 2년이면 충분히 기다렸다고 그는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의미 없이 그녀만을 맴돌며 살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보면 중학생 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갈 길을 홀로 가고 있었다. 노엘은 리한을 기다린다면서, 예전과 다를 것이 없게 일상을 사는 유진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을 다 걸고, 인생을 바쳐야 사랑은 아닌 것 같으니까.”

“…….”

체스트는 언제나 응원한다는 듯이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노엘은 별일 없이 사는 유진의 곁을 맴돌던 2년 동안, 자신이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유진에게서 벗어난 일상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그녀를 놓을 수 있는지 없는지도 고민하지 않고 살아왔다.

“이제 저를 바라보고, 제 일상을 좀 찾아보면…… 혹시 모르죠. 렌토에서 어떤 귀여운 중학교 선생님이랑 아이를 둘 정도 낳고 그럭저럭 살 수 있을지.”

노엘의 표정에 홀가분함이 내려앉았다.

외전3. 생일 선물

제 이름은 린 아시에, 아메탄 왕국의 산하기관 직원이에요. 저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와 단둘이 차를 마시고 있어요. 제 예비 신랑이 알면 난리날 것 같네요. 물론 제 잘못이라고는, 출장 중인 예비 신랑을 대신해 혼자서 왕립마법대학 연구홀에 결혼식을 예약하러 왔다가 리한 카드민을 마주친 것밖에 없어요. 아, 또 하나 잘못이 있다면 제가 너무나 반갑게 말을 걸었다는 거죠.

“앗, 리한 카드민 씨 아니세요? 저는 린 아시에라고, 유진의 동기예요. 유진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곧 여기서 저희 축가도 불러 주실 텐데 잘 부탁드립니다!”

리한은 저를 처음 본 거겠지만, 그래도 너무 반가워서 말이죠. 유진의 애인이면서, 또 저희 결혼식 축가도 불러 줄 사람인데 어떻게 그냥 지나치겠어요? 그런데 리한은 제 이름을 듣자마자, 거의 은인을 보는 것처럼 저를 바라보지 않겠어요?

“린 아시에…… 대학 시절, 유진의 룸메이트 아니던가요?”

“맞아요. 2인실을 쓰던 1학년 때 방을 같이 썼어요.”

유진이 그런 얘기까지 리한에게 했을 줄은 몰랐어요. 사실 저희는 룸메이트긴 했지만, 그래서 서로 여러 가지 일을 함께 겪긴 했지만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유진은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친하게 지내기 어려운 사람이었답니다. 저요? 저는 그래도 유진이 언제나 좋았어요. 저랑 유진은 성격이 정반대니까요!

“유진이 제 얘기를 하던가요? 하긴, 유진과는 꽤 인연이 깊어서…… 무슨 얘기를 했어요? 제 예비 신랑이나…… 제 여동생?”

“그냥 룸메이트였다고요.”

제가 너무 좋아하니 리한은 조금 미안한 눈치였어요. 짧은 대답에 제가 다소 실망하는 것 같아 보이자 그가 천천히 말했죠.

“그래도 유진이 동기에 대해 그나마라도 말한 건 당신밖에 없어요.”

“어머, 정말요?”

그 말에 저는 또 감동하고 말았지 뭐예요. 그 때였어요. 순식간에 바뀌는 제 표정이 재미있는지 저를 웃으며 바라보던 리한이 제게 차 한잔하자며, 유진에 대해 부탁할 것이 있다는 말을 한 것은요. 그 부탁을 거절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

연구홀 바로 옆에 있는 찻집에 들어가 마주 앉으면서 저는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다소 민망했답니다. 제 예비 신랑한테는 너무 미안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잘생겨서요. 물론 모르는 얼굴은 아니었어요. 예전에 유진이 제게 보여 주던 타르안의 흑백 사진 중 늘 가운데에 있던 남자니까요. 유진은 조금 더 키가 작은 호웰이라는 멤버를 좋아했지만, 전 그때부터도 리한이 제일 잘생겼다고 생각했답니다. 리한은 앉자마자 용건을 말했어요.

“다음 주가 유진의 생일이라서요.”

“아, 네. 그렇군요.”

“좋은 걸 해 주고 싶은데 도저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동기분의 조언을 듣고자 합니다. 유진은 뭘 해 주면 좋아할까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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