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널 움직이는 건 타르안이고…….’
그는 가방에서 LP판 하나를 꺼냈다.
‘날 움직이는 건 너구나.’
그녀는,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 아메니티까지 올라온 내 사정을 알기나 할까. 노엘은 LP판을 건네며 씩 웃었다.
“입학 축하해. 선물이야.”
“뭐 이런 걸…… 노엘, 난 누군가에게 뭘 받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건 너 아니면 받을 수가 없잖아.”
“어렵게 구했어. 지금 안 받으면 넌 평생 구경도 못해. 1집 LP라고.”
“조금만 기다려.”
그녀가 한숨을 쉬며 LP판을 받아 들었다.
“돈만 벌면, 정말 네게 엄청난 돈줄이 되어 줄게.”
노엘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그가 하루에 만지는 돈이 그녀가 벌게 될 월급보다 많다는 걸 알게 되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해 보았다. 여전히 공부만 하고 있는 그녀는 아직 그와는 비교할 수 없게 순진했다.
“기대할게.”
그는 동그란 안경을 밀어 올리며 LP판을 꼭 끌어안고 있는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등학교 입시 시험을 치러 간 날,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자각한 뒤 그의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입시 때문에 언제나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산하기관 입사가 확정된 대학에 입학했으니, 어느 정도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 아닐까…….
그때만 해도 노엘은 언제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할까 고민 중이었다. 아메니티에서 자리를 좀 잡고, 이번에 크게 들어간 마약 건만 좀 마무리 지으면…… 제대로 된 집 한 칸은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가 뭐라도 먹으러 가자고 말하려는 찰나, 유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아, 노엘. 아무한테도 말할 사람이 없어서…… 나, 남자 친구 생겼어.”
노엘은 순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유진은 타르안의 LP판을 다시 보느라 그의 굳은 표정을 발견하지 못했다.
“근데 여기는 이성 교제 금지거든.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어.”
“……금지인데 왜.”
“신입생 환영식 이후에, 어떤 선배가 따라왔어. 한눈에 반했다나. 내가 이상형이래. 졸업 학년이신데,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몰래 연애하는 애들이 꽤 된대. 들키면 징계이기는 하지만…….”
“…….”
“……나도 내가 좋다고 하는 남자는 처음이라. 외교국 지망이래. 나중에 외교국 얘기도 들을 수 있겠지? 귀족 출신이라는데, 난 귀족하고 처음 말해 봤어.”
노엘은 그제야 교복을 입은 유진이 더 이상 고사리손으로 우편물을 분류하던 중학생 꼬마가 아님을 느꼈다. 왕립마법대학의 교복을 입고, 산하기관 입사가 결정된 그녀는 이제 그와 다른 세상에 살게 된 것이었다. 원칙에 따르면 이제 그녀는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그녀는 나랏일을 하게 될 테고, 이성 교제만 해도 징계를 받을 정도로 빡빡한 도덕 기준을 요구받을 것이다. 노엘은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불법행위를 손으로 셀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그 귀족 출신의 선배를 떠나 자신에게 오라고 할 수 있는 어떠한 명분도 없음을 알았다. 치기 어린 마음으로 무작정 아메니티에 올라온 자신 역시 뭘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내려갈 수는 없었다. 그는 유진의 곁에 계속 있으려면 친구라는 이름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오래된 친구의 위치를 지키며, 그는 유진이 사귀는 남자 친구가 몰락 귀족 출신인 이아크 텔시라는 것을 알았고, 어쩔 수 없는 호기심에 사람을 붙여 뒷조사를 한 결과 딱히 별 볼 일 없는 놈인 것도 알았다.
유진과 이아크는 거의 1년을 비밀 연애에 성공했다. 노엘은 그 기간 동안, 아메니티 상단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밀수업계에서 탄탄하게 입지를 쌓았다. 그는 술과 담배는 물론 가끔 마약도 했는데, 유진을 만날 때면 중학생 때의 최대한 단정한 모습을 연기하곤 했다. 유진은 근로장학금을 아껴 종종 노엘에게 타르안의 사진 같은 것을 사러 왔고, 그러는 동안 이아크와도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둘은 서로를 싫어하게 되었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에게는 유진이 그랬다. 유진이 다른 남자와 연인 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그들의 삶이 갈라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유진을 떠날 수 없었다. 그건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던 건, 우편물을 배달하러 갔던 어느 날 타르안의 공연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주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미 없는 상상이었다. 가끔 지하의 갱들과 어울리며 뒷골목의 여자들을 끼고 술과 마약을 할 때에도 그의 생각은 항상 중학생의 어느 날로 돌아갔다. 유진은 그냥 렌토 지역에서 중학교 선생을 하고, 그는 잡화점이나 하면서 아이를 둘쯤 낳지 않았을까. 평민치고는 나쁘지 않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그 여자 생각이야?”
그와 가깝게 지내던 술집의 마담만이 그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 마담은 그가 유진을 만나고 와서 독한 술을 마실 때마다 10살이나 어린 그에게 안겨 키득거렸다.
“대체 왜 고백을 못해? 너 때문에 미칠 것 같다고 무릎이라도 꿇어 봐. 밑져야 본전이잖아?”
“……두려워서.”
노엘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중얼거렸다.
“뭐가?”
“몰라.”
* * *
“거지같은 학칙 때문에 한창 나이 때 여자 손 한번 못 잡는 게 말이 되냐?”
어느 날, 술집에서 거래를 하나 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노엘은 뒤를 돌아보았다.
“난 곧 졸업이니, 마지막으로 연애 한번 했지. 신입생 중에 완전 내 스타일이 있었거든. 정말 한눈에 반했다. 어차피 결혼할 것도 아닌데, 귀엽고 예쁘장한 게 제일이잖아? 사근사근한 맛은 없는데, 또 그 툴툴거리는 매력이 있어.”
이아크가 술에 취해 누군가와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당연히 산하기관 입사하면 다시 생각해 봐야지.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데…… 게다가 평민은 평민이라서, 좀 취향이 천박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엘은 자신도 모르게 그 술집에서 이아크의 멱살을 잡고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이아크 역시 버둥댔지만, 뒷골목에서 별꼴 다 본 노엘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유진한테 상처 입히기만 해 봐…….”
그는 원 없이 그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넌 내 손에 죽어…….”
이아크는 피가 섞인 침을 그에게 뱉으며 욕을 지껄였다.
“너, 유진 유니트 좋아하지? 남자는 남자를 알지. 주말마다 핑계 대고 만나자고 할 때마다 얼마나 같잖던지…… 밀수꾼 주제에 어디 감히 주제도 모르고…….”
노엘이 마음에 걸려 하는 바로 그 지점을, 이아크는 아프게 꼬집었다. 노엘은 부정하려고 했지만, 그가 두려워했던 막연한 것들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남자의 입에서 나와 비수처럼 박혔다.
“넌 유진 앞길에 방해나 돼! 밀수가 들키면 바로 벌금형이야. 잘못해서 범죄랑 얽히기라도 한다면 바로 징역이라고. 산하기관 직원들은 너희보다 훨씬 더 징계가 세. 언제까지 네가 유진과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아?”
“…….”
“걜 생각한다면 당장 꺼져. 걘 어쨌든 너와 사는 세상이 달라. 너 같은 놈이 계속 주변을 맴도니 평민 취향에서 벗어나질 않는 거야. 그러다 보면 나 같은 귀족한테도 천박하다고 버림받는 거고. 걔 하나라면 내가 모든 걸 감수하겠지만…… 진흙탕 같은 그 애 가족과 곁에 맴도는 너 같은 놈 때문에 내가 걔랑 끝까지 갈 수가 없는 거야.”
이아크가 내뱉은 그 말들은, 노엘이 귀족들에 대해 평생 이를 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 *
이아크가 결국 외교국에 들어갔을 때, 유진과 이아크는 헤어지고 말았다. 비밀 연애였기 때문에 유진은 학교의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대신 노엘을 불러 가끔 술을 마셨다.
안 좋게 헤어진 전 남자 친구가 외교국에 있으니 유진은 애초의 계획대로 외교국에 지원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 이후 결정한 진로는 행정국이었다.
“난 그냥 시키는 일 하는 게 좋아. 다른 어느 곳도 가고 싶지 않아. 뭘 만들어 내고, 추론하고, 이런 건 딱 질색이야.”
유진은 술을 마시면서 마음을 털어놓곤 했다. 그녀는 무뚝뚝했지만 은근히 속마음을 잘 털어놓는 편이었다. 딱히 숨기는 것도 없고, 자신을 억지로 부풀리지도 않았다. 노엘은 아주 어릴 때부터 그녀를 좋아했지만, 거짓말과 술수가 판치는 밀수판에서 놀다 보니 점점 더 그런 그녀가 좋았다. 그녀를 만나면 아무것도 모르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청소나 하던 남자아이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남부 지역에서는 내가 되게 공부를 잘하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아니더라고.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돼. 죽어라고 달달 외우는 과목만 성적이 좋고, A+은 나와도 1등하는 건 거의 없어. 생각보다 내가 별것 아닌 사람이더라.”
원하는 대로 행정국에 입사한 후, 그녀는 정말로 그에게 타르안의 밀수품들을 꾸준히 사러 왔다. 노엘은 이아크가 했던 말이 떠올라, 그녀에게 파는 밀수품들은 철저히 검수하고 연결고리를 모두 끊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공을 들여 흔적을 지웠다. 리한 카드민이 쓴 ‘나의 공화주의’같이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을 만한 것은 아예 주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유진은 타르안에 대해서 자신은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노엘에 의해 한 번 검수된 안전한 물품만 받은 셈이었다.
이아크와의 연애에서 완전히 덴 유진은 이제 더 이상 남자는 안 만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도 그럴 것이, 늦게 돈을 벌기 시작한 그녀는 이제 가족들의 부양에도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작은 하숙집에 살면서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지 못하는 그녀를 노엘은 쓸쓸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쨌든 산하기관의 직원이었고, 그와는 이미 신분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이아크의 말에 노엘은 스스로가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유진을 만날 때 가장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고 단정한 모습으로 자신을 꾸며 봐도 사라지지 않는 찝찝함이었다.
“열등감이네.”
마담은 그런 노엘의 말에 명료하게 답을 주었다.
“네가 아무리 돈이 많고, 이 바닥에서 유명하다고 하지만 넌 이미 너를 걔보다 아래로 보고 있는 거야. 그러니 쓸데없는 치장으로 꾸며도 늘 괴롭지.”
“……어쩔 수 없잖아.”
그는 태어나길 귀족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며, 이제 와서 고등학교에 갈 수도 없었다. 이미 틈은 벌어졌고, 그 틈에 대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괴로울 뿐이었다. 마담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킹……이라는 사람 알아?”
“얘기만 들어 봤어.”
“킹이 이번에 새로운 판을 짜고 있어. 엄청나게 큰판.”
마담은 노엘에게 킹이 전하라는 말을 달콤하게 속삭였다. 불공정한 체제를 전복하고 귀족들과의 신분 차이를 자본으로 대체하자…… 실로 귀가 솔깃한 주장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