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147/256)

  

57화.

하지만 이런 나도 내게는 소중한 사람이야

내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결국엔 살아낼 거야

그녀는 마치 넋이 나간 것 같았다. 무대가 끝나고, 그들이 환호를 받으며 내려가는 모습까지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노엘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유진?”

“어?”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꼼짝도 않고 무대를 바라보고 있던 유진이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노엘은 좋은 구경 한 번 한 정도의 마음가짐이었는데, 유진에게는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길을 걷다가, 길거리 노점상들이 팔고 있는 타르안 멤버들의 흑백 사진을 보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머뭇거렸다.

“살까?”

“……비싼데. 돈도 없잖아.”

“돌아갈 때 차비 쓰면 되지.”

노엘이 호기롭게 말했지만, 유진은 그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노엘은 돌아갈 차비를 모두 털어 유진에게 타르안의 흑백 사진을 사 주었다. 유진은 그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세상 소중한 것을 간직하듯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었다.

“고마워, 노엘.”

그녀가 정말로 감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노엘은 또다시 귀가 달아올랐다. 공연 내내 잡고 있었던 손이 새삼스럽게 뜨거웠다. 그날 저녁, 학교까지 터벅터벅 걸어오는 길에 유진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노엘.”

“어?”

“나, 꼭 공부를 열심히 해서 왕립마법대학에 갈 거야.”

고등학교까지만 나와서 중학교 교사가 되겠다던 그녀는 한순간에 진로를 바꾼 듯했다.

“그래서 아메니티로 갈 거야.”

아메탄 왕국의 수도, 아메니티는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땅값이 비싸기 때문에 지방에서 상경하려면 정말로 돈이 많거나, 아니면 왕립마법대학에 입학해서 산하기관에라도 취직해야 했다. 대학에 입학하려면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함은 물론 대학 입학시험에서도 엄청난 경쟁률을 뚫어야 했다. 게다가 보통 아메니티의 왕립고등학교의 강사진들이 좋아 거의 대다수의 합격생들은 왕립고등학교에서 나왔다. 그래서 돈이 많은 지방 귀족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아메니티로 올라가지만, 그럴 돈이 없는 유진은 아무런 정보 없이 지방에서 공부를 열심히 한 뒤 입학시험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수밖에 없었다.

“아메니티로 가면, 타르안의 공연을 더 볼 수 있을 거고, 이런 사진을 살 수 있는 가게도 더 많을 거고, 외교국에라도 들어가게 되면 함께 일하게 될 수도 있을 거고…… 적어도 산하기관은 월급이 많으니까 스타람 섬에 여행을 갈 수라도 있겠지.”

“뭐?”

“다시 볼 거야. 아니, 어떻게 해서든 쫓아다닐 거야. 아까 멀리서 온 관중들처럼.”

노엘은 그때 그녀의 표정을 잊지 못했다. 그녀는 그동안, 어린 나이에도 삶에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유진은 난생처음으로 찾은 삶의 의미에 커다란 초록색 눈을 반짝이며 숨까지 몰아쉬고 있었다.

* * *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유진은 정말로 자신의 진로를 정해 버린 듯했다. 노엘이 옆에서 꾸준히 불가능함을 이야기해도 소용없었다. 일단 고등학교 학비는 큰오빠가 대주기로 했고, 왕립마법대학의 학비는 무료이므로 생활비 정도만 받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시험에 떨어질 수도 있지만, 노력도 안 하고 포기할 수는 없잖아.”

“유진, 공연 한 번 보고 그런 걸 결정한다는 게 말이 돼?”

유진은 자신이 정한 것에 대해서는 남의 의견을 듣지 않는 성격이었다.

“난생처음 느껴 본 기분이야. 난 사실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어. 맨날 괜히 태어나서 고생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냥 무대를 보고 있으니까 너무 행복했어. 행복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걸 볼 수 있다니 나는 너무 행운아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노엘은 그날 그 공연을 함께 본 것이 슬슬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쉬는 날마다 렌토의 가게에 가서 타르안의 사진이나 가사집, 프로필 등을 구경하곤 했다. 그녀가 특히나 꽂힌 멤버는 고음 부분을 담당하던 키가 작은 남자, 호웰 한니브라는 사람이었는데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쁘고 인터뷰집을 보면 말하는 것이 사근사근하다는 이유였다.

“유진.”

유진의 삶이 그날 이후로 완벽히 바뀐 것을 본 노엘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몇 번을 말했다.

“그 사람들은 네가 존재하는지도 몰라. 이렇게까지 해야 해?”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행복한데.”

시들해지겠지, 저러다 말겠지, 조금 지나면 잊겠지 싶었던 유진의 타르안에 대한 열정은 중학교 졸업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녀는 렌토 지역 전체 시험에서 1등을 하며 높은 성적으로 고등학교 입시에 성공했다. 노엘은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아예 치지 않았는데, 어차피 학비를 마련할 수 없어서였다.

유진이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간 날, 노엘은 혼자 남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자신이 이제 유진과 떨어진 삶을 산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자각했다. 그녀가 타르안을 마음에 품기 시작하자 느꼈던 불안감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었다. 유진은 그를 돌아보지 않고 아메니티로 가겠다고 했고, 노엘은 어쨌든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아메니티는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아메니티에 가려면…… 왕립마법대학에 가거나 돈이 아주 많아야 했다. 그리고 노엘이 아는, 평민이 돈을 아주 많이 버는 방법은 한 가지였다. 그의 육촌 아저씨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던 소리였다. 밀수업자들은 돈이 넘쳐나는데 재무국의 감사가 두려워 영지를 사지 못한다고…… 그는 유진이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끝나기 전, 지역 상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 * *

유진은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다. 그녀는 공부하느라 언제나 바빴는데, 고등학교 입시와는 달리 왕립마법대학 입학시험은 전국에서 치르는 것이라 상당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공부를 잘했어도 남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기출 문제를 보면서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외우는 것은 어떻게든 하겠는데, 무언가를 창조적으로 만들어 내는 건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나 고등학생 때부터 배우는 마법 과목은 흥미로웠지만 그만큼 까다로웠다.

“생일 축하해.”

노엘은 그녀의 유일한 중학교 친구로, 가끔 그녀를 보러 기숙사에 찾아왔다. 그가 고등학교 입시를 결국 포기하고 지역 상단에 이름을 올렸을 때 유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아메니티의 꿈은 버리지 않은 거야?”

“당연한 거 아냐?”

“봉쇄령이 내렸는데도? 이제 타르안은 대륙에 발걸음도 못해.”

“뭐, 언젠가는 풀리겠지. 기다리면 돼. 그게 뭐 어렵다고.”

유진은 담담히 대답했다.

“다만, 이럴 줄 알았으면 빚이라도 끌어다가 가게에서 타르안 물품들을 좀 사 놓을 걸 그랬어. 다 폐기 처분 하셨다던데…….”

그렇게 타르안을 좋아했지만, 정작 그녀가 가진 것은 그날 차비로 산 흑백 사진뿐이었다. 속상해하는 유진을 바라보며 노엘이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생일 선물이야.”

“어?”

유진의 눈이 커졌다. 타르안의 사진 몇 장과 가사집이었다.

“야, 이거…….”

“거의 10배 가격으로 팔리고 있는 거야. 나중엔 더 좋은 걸로 줄게.”

“이거 어디서 났어? 이거 이제 유통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

“너…… 밀수해?”

노엘은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생각보다 상단의 일은 그의 적성에 맞았고, 돈과 물건이 움직이는 흐름을 좇는 것이 학교 공부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돈에 욕심이 나서 손댔던 밀수는 짜릿하기까지 했고, 불과 1년도 안 되어 그는 남부 지역에서 유명한 밀수업자가 되어 있었다. 

노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유진을 바라보았지만, 유진은 딱히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그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고마워, 노엘.”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노엘은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 고마워. 나 생일 선물 처음 받아 봐. 평생 간직할게.”

“뭐…… 매년 해 줄게. 난 너랑 달라서, 돈을 버니까 말이야.”

그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딴청을 부렸다. 유진은 이미 그보다는 타르안의 사진에 정신 팔려 있었지만, 노엘은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구할 수 있는 거면 구해 보고.”

“우리 오랫동안 친구하자.”

유진이 좋아서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며 말했다.

“내가 산하기관에 들어가서 돈 벌기 시작하면…… 정말 네 가장 큰 고객이 되어 줄게.”

유진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노엘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래. 네가 대학 가면…… 나도 아메니티로 갈 테니까.”

“어? 왜?”

“왜긴 왜야.”

그는 뒤통수를 긁으며 괜스레 툴툴거렸다.

“이왕 이쪽으로 길을 튼 거, 거하게 한번 놀아 볼 거야. 렌토는 너무 좁아. 정말로 큰 상단은 아메니티에 다 몰려 있다고.”

유진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더니,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 네 인생이니.”

그 무덤덤한 말에 노엘은 살짝 서운했다. 서로를 대하는 온도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는 충동적으로, 내 인생은 네 인생에 달려 있다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 * *

유진은 어렵지 않게 왕립마법대학에 입학했고, 오로지 타르안을 만날 기회를 어떻게든 얻어 보겠다는 의지로 아메니티에 상경했다. 물론 산하기관의 월급이 상당히 높고 평민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라는 것 때문에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꽤 무심했던 그녀의 가족들도 마을에서 잔치를 벌였다고 했다.

그즈음 노엘은 밀수에 깊숙하게 손을 댔고 불법 마법 약물 등을 거래하며 상당히 위험한 삶을 살고 있을 때였다. 거대한 일을 하나 마무리하고 나니 꽤나 많은 돈이 쌓였기 때문에, 아메니티에서 충분히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렌토에서의 큰 사건 몇 개를 마무리 짓고, 아메니티의 상단과 연락을 취해 유진보다 조금 늦게 아메니티로 상경했다. 아메니티로 올라가면서, 그녀의 입학 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노엘! 오랜만이야.”

유진은 그를 처음 보았던 그때처럼 무덤덤하게 인사했다. 그녀의 목표는 여전히 타르안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외교국이었고, 이미 밑바닥에서 구를 대로 구른 노엘은 그녀의 순진한 바람이 귀여울 지경이었다. 봉쇄령은 언젠가 해제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노엘은 피식 웃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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