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다른 나라들처럼 부싯깃으로 촛불이나 겨우 켜면서 우왕좌왕할 시기에 안정된 치세가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야. 아셰 그 애도, 정말 다니엘을 생각해서 산하기관을 만들라느니 새로운 카를 왕이 되라느니 하는 말을 속삭이지는 않았겠지. 어떻게든 국왕의 눈에 들어 살길을 모색해야 하니까 한 입에 발린 소리일걸. 뭐, 물론 난 경고했어. 피를 나눈 형제라고 해서 완벽하게 믿으면 안 된다고 말이야.”
어릴 때부터 제대로 정치적 노선을 타 보지 못한 다니엘은 재위 초기에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왕궁에 보호를 요청한 2황자를 자비롭게 받아 주었더니 아메니티에 큰 혼란을 가져왔고, 자신의 나라가 좋다며 망명한 공화주의자 리한은 보란 듯이 혁명군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친형제인 루벤과 아셰에게 지나치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난 긴 여행을 떠날 거야. 다니엘은 이제 잘 할 거고 더 이상 내 의견을 필요로 하지도 않겠지. 나도 다니엘이 필요 없고. 그래도 내년 네 기일까지는 아메니티에 돌아올게.”
하지만 이단의 배신을 알아챈 날, 다니엘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루벤은 금방 눈치챘다. 이제 다니엘은 루벤과 아셰를 포함한 그 누구도 믿지 않게 될 것이다. 원래 위기가 없으면 사람은 성장하지 않는다. 역사 앞에서는 영원한 선악이 없고, 인생 앞에서는 영원한 은원이 없는 법이다.
그가 거드름을 피우는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물론…… 모든 건 그 애의 업적으로 남겠지. 마력이 사라지는 적절한 시기에 전기를 들여오는 선구안을 가져 위기를 벗어났다고.”
그의 목소리는 살짝 쓸쓸했지만, 어딘가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난 왕위쟁탈전에 패배한 후 역사 속에서는 사라지겠지만…… 뭐, 괜찮아. 내가 하고 싶었던 건 다 했어. 그깟 이름 남기지 못하는 게 뭐 어때서. 나머지는 다니엘이 잘 하겠지.”
어스름이 지기 시작했는데도, 루벤은 무덤 앞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정하고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도 그 애가 어설프게 베푼 자비 덕분에 행복한 사람들이 있어. 리한 카드민? 그 기름칠한 것처럼 잘생긴 가수도 돌아왔거든. 행정국의 제 담당자랑 눈이 맞았다던데. 이 정도면 누군가에겐 해피엔딩이지.”
외전2. 노엘
평민 집안에는 늘 그렇듯이 ‘우리 집안에도 산하기관 직원 하나는 나와야 하지 않겠냐!’라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부잣집 친척이 있기 마련이고, 그 친척은 문어발 같이 많은 식구들을 뒤져 공부에 재능이 있는 아이를 찾아내고야 만다. 노엘은 일하느라 바쁜 부모의 무관심 속에 어영부영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그의 영특함을 발견해 낸 육촌 아저씨의 눈에 들어 중학교에 등록하게 되었다.
“재무국에만 들어가면 돼.”
육촌 아저씨는 금니를 번쩍이며 신신당부했다. 그가 학비를 내 주는 조건이었다.
“그곳에만 들어가면…… 확실히 몇 탕이든 당겨 줄 테니까.”
중학교 성적이 꽤 잘 나오자, 희망이 생긴 육촌 아저씨는 그토록 재무국 타령을 하는 이유를 알려 주기 시작했다. 평민들 중 좀 잘산다 싶은 사람들은 대다수가 상인이었고, 그 역시 큰 상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중 정말로 큰돈을 만지는 건 밀수업자들이었다. 그러나 평민의 신분으로 출처가 떳떳하지 않은 큰돈이 생겼을 때 안전하게 지키는 법이 많지 않았다.
“몰락한 귀족들의 영지를 사는 게 제일 좋은데 말이야…… 재무국에서 바로 감사가 나오거든. 평민들이 그만한 돈을 얻는 게 어려운 걸 아는 거지.”
육촌 아저씨는 노엘을 볼 때마다 강조했다.
“재무국에 들어가서, 몇 건만 눈감아 주면 된다. 물론 대가는 크게 치를 거야.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쌓여 있어.”
노엘은 성적표를 보여 주고 학비를 받아 올 때마다 육촌 아저씨가 어떻게 장사를 하는지, 밀수업계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 있게 보았다. 육촌 아저씨는 딱히 엄청나게 성공한 상인은 아니어서, 노엘을 어떻게든 잘 키운 뒤 잘나가는 밀수업자들과 연계시키고 그 수수료를 먹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육촌 아저씨가 예상하지 못하게 마차에 깔려 죽으면서, 그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는 당장 다음 학기에 등록할 학비가 없었다. 재무국에 들어가려면 중학교 졸업과 고등학교 졸업을 거쳐 대학 시험까지 붙어야 했다.
“그래도 1년만 더 있으면 졸업인데…… 이대로 자퇴하기엔 너무 아깝지 않니?”
노엘을 아꼈던 담당 교사는 노엘이 학비 때문에 자퇴를 고민하고 있다고 하자, 중학교 졸업장을 따면 인생에 나쁠 것은 없다면서 근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학교 서류를 분류하고 우편물을 배달하며 기숙사 청소를 하면 학비가 면제된다는 것이었다. 노엘은 방법이 있는데 자퇴를 할 이유는 없어 근로 장학금을 받기 위해 어느 정도의 노동을 하기로 했다.
“우리 학년에 유진 유니트 알지?”
“……네.”
유진 유니트를 모르는 학생은 없었다. 그녀는 그가 속한 학년의 1등이었다.
“걔가 근로봉사 중이야. 많이 도와줄 거야.”
노엘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상당히 놀랐다. 아까 들어 보니 근로의 양이 만만치 않던데, 그 일을 모두 하면서 1등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무표정으로 조용히 수업을 듣는 작은 여자아이를 생각하며 코를 긁었다. 여자애들에겐 관심이 아예 없어서,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다시피 했지만 유진은 심지어 월반까지 했다고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선생님이 알려 준 대로 행정실에 갔을 때, 유진은 자신의 키보다도 높이 쌓인 우편물을 분류하고 있었다. 그녀는 노엘을 흘끗 보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네가 새로 왔다는 근로장학생이구나.”
“어…… 잘 부탁해.”
“잘 들어. 설명해 줄 테니까.”
학교에 근로장학생은 유진과 노엘 둘뿐이었다. 보통 평민들은 학비가 없으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만일 중학교에 왔더라도 자신이 공부에 큰 가능성이 없다고 하면 빠르게 자퇴를 하고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노엘은 조금 애매한 경우였는데, 성적이 좋은 반면 갑자기 학비가 떨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유진과 노엘은 학교가 끝나고 난 뒤, 학교의 그 많은 일들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유진이 무뚝뚝한 성격이었어도, 거의 대다수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데 친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함께 행정실에서 문서를 분류하고, 학교 곳곳을 청소했으며, 우편물을 배달했고, 가끔은 식당의 식재료 정리도 도왔다.
중학교 졸업 이후의 삶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있던 노엘과는 다르게 유진은 고등학교 진학에 대한 계획이 뚜렷했다.
“지금은 학비 마련이 어렵지만…… 내년에는 큰오빠가 어떻게든 고등학교 학비를 책임져 주겠다고 했어. 렌토에서도 1등을 하니까 밀어주고 싶은가 봐.”
“그렇게까지 해서, 고등학교에 가야 할까?”
노엘은 산더미같이 쌓인 우편물을 분류하며 물었다. 유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고향에 돌아가면 난 더 쓸모없는 인간이야. 그물을 끌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어서 못하는데 밥벌이를 어떻게 하며 사니?”
“뭐…… 여기에서 장사를 해도 되는 거고…….”
“난 그런 건 싫어.”
유진은 야무지게 고개를 저었다.
“정해진 길이 좋아. 이런 거, 우편물 분류처럼. 공부도 좋아. 그냥 정해진 걸 외우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아무 생각 없이, 하기만 하면 되는 거. 대학에 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고등학교까지만 나와도 중학교 선생님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래? 난 공부는 그렇게 쉽진 않던데.”
“너도 잘하면서.”
유진의 말에 노엘은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나 우편물을 옮겼다. 똑같이 일하면서 유진과 성적 차이가 너무 나면 부끄러울 것 같아 지난 시험 때 공부를 열심히 했더니 성적이 많이 올랐던 것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유진을 보고 있으면 문득 문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얘들아!”
학교 행정실 직원이 그들이 분류해 놓은 우편물 중 하나를 보며 손짓했다.
“이건 급히 배달해야겠다. 좀 멀긴 한데, 다녀와. 급한 거니까, 마차를 타고 가.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올 때도 잡아타고. 차비는 지금 줄게.”
유진과 노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가끔 시내에 급하게 우편물 배달을 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시내 구경도 하면서 마차도 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들은 렌토 시내 중심가에 있는 은행에 시간 맞춰 학교 서류를 배달했고, 잔뜩 설레서 시내를 한 바퀴만 돌고 학교에 돌아가기로 했다.
“유진, 저기 봐. 사람들이 엄청 많은데?”
“그러게. 구경 갈래?”
광장에 거대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렌토는 남부에서 꽤나 큰 도시였기 때문에 인구야 많았지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있는 건 처음 보았다. 유진과 노엘은 작은 체구를 이용하여 서로 손을 잡고 무대 앞까지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군중 속을 지나치면서 얻어들은 바에 따르면, 스타람 섬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대륙에까지 진출한 ‘타르안’이라는 가수가 순회공연을 왔다고 했다. 군중들은 렌토뿐만이 아닌 가까운 남쪽 지역에서 모두 몰려온 것 같았다. 유진과 노엘은 스타람 섬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타르안에 대해서도 잘 몰랐지만 그냥 사람이 많은 것이 신나서 두근대며 무대를 기다렸다.
타르안은 다섯 명의 청년들이었다. 노엘은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도 처음 봤고, 그렇게 잘생긴 사람들도 처음 봤으며, 다섯 명이 절도 있게 난생처음 보는 격한 춤을 출 때에는 사람들과 함께 격하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한참을 홀려서 무대를 바라보는데, 그들 가운데에 있던 푸른 머리의 잘생긴 청년이 말했다.
“이제 마지막 무대가 남았습니다. 여기까지 저희를 보러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관객들이 환호하고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노엘도 아쉬움에 입을 벌렸다. 그들이 생전 처음 보는 악기를 메더니,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꿈이 있다는 건 어른들의 거짓말이라서
나는 오늘도 그렇게 허락된 환상을 보고
노엘은 히죽 웃으며 혹시나 군중 속에서 놓칠까 봐 손을 꼭 잡고 있던 유진을 바라보았다. 날을 잘 잡아서 좋은 구경 한다고 말하려던 그는 유진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실 무기력도 우울도 나의 습관이야 그러니
나보고 기운 내라며 그 손을 내밀지 말아요
유진은 그야말로 정신을 잃은 것 같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유진은 항상 무심한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