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145/256)

  

55화.

“대륙 사람들은 이런 게 필요하지 않잖아요. 마법을 쓰니까.”

“마력은 사라지고 있으니까요. 수출할 수 있게 더 연구를 많이 해 봐요. 나 같은 사람들도 그럼 불편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겠죠.”

그녀는 아메탄 왕국에 돌아가서 그대로 전기공학 교수가 되었고, 몇 년이 지나 그는 총통의 자리에 올랐으며, 작은 국지전을 하나 벌였을 뿐인데 얼마 되지 않아 제국은 봉쇄령을 내렸다. 교역은 끊겼어도, 그러나 밀수는 계속되었는데 특히나 전 대륙에 인기가 많았던 타르안의 물품들은 끊임없이 밀수 수요가 있었기 때문에 스타람의 큰 돈줄이 되어 주었다. 조심스럽게 밀수를 장려하고 있던 아카날에게, 밀수업자들을 통해 체스트의 연락이 온 건 그 때였다.

[전기용품은 큰돈이 될 겁니다. 우리 한번 크게 놀아 볼까요.]

체스트는 아주 오랫동안 밀수업계를 지켜보았다. 그녀의 부모가 상인이었기 때문에 인맥과 돈을 활용하여 점조직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자 왕족이었던 루벤에게 꼬박꼬박 연락을 했는데, 그가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스타람의 기술에 대하여 설명하고, 전기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학습시켰다. 진보적인 성향의 루벤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한 것처럼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녀는 아카날에게 돈을 핑계로 접근했으나 사실 돈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체스트는 어렸을 때부터 마법을 잘 쓰지 못한다는 이유로 상당히 무시 받는 삶을 살았다. 그저 그녀는 대학 교수라는 명예를 다시 얻고 싶었으며, ‘돈은 많지만 마법을 못 써서 불쌍하게 사는 여자’라는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했다. 봉쇄령이 내리고 난 후, 그녀의 유일한 소망은 전기공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다시 학교에 복귀하는 것뿐이었다.

아카날과 연락하며 큰판을 짜는 동안, 그녀는 어떻게든 전기라는 기술이 대두될 수 있도록 마력을 아예 없애는 방안을 생각해 냈다. 스타람에서 유학할 때, ‘마력이 가장 그리울 땐 정전이 일어났을 때죠’라는 아카날의 말에 영감을 얻어서였다. 아카날은 마력을 없앨 수 있는 건 황족뿐이고, 혁명군 중 황족이 있으니 어떻게든 아메니티에 들여보내 아메니티의 마력을 사라지게 하겠다고 회신을 보냈다.

리한 카드민의 망명을 통해 일을 도모하는 동안 체스트는 아메탄의 밀수업계를 총동원하여 스타람의 전기용품을 샀고 일부러 수사국에 증거를 많이 흘렸다.

남에게 관심이 없는 유진은 하숙생으로 최고였다. 처음엔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데리고 있었는데 알아서 집에 필요한 마법을 걸어 주니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가끔 함께 사는 유진이나 리한이 그녀가 자주 집을 비우는 것에 대하여 궁금해하면 멀리까지 장을 보러 나간다고 했으며, 눈속임으로 내세운 사람은 밀수업계에서 가장 인정을 받던 상인 노엘 하이트였다.

노엘은 끝까지 자신이 킹으로 의심받는 줄도 몰랐지만, 그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흘리고 끝까지 잡히지 않도록 도왔다. 물론 리한이 그녀의 하숙집으로 들어온 것이나, 노엘이 유진의 친구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였다.

그랬던 그녀가 단 한 번, 꼬리를 잡힐 뻔한 적이 있었는데 조금 무리를 하여 ‘배터리’를 만들어 보겠다고 커다란 재료들을 밀수했을 때였다. 수사국 직원들이 찾아왔을 때,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으나 지레 제 발이 저린 유진이 타르안의 밀수품을 먼저 꺼내 놓으면서 상황이 기적적으로 넘어갔다. 노엘은 유진이 절대 걸리지 않도록 유진에게 가는 밀수품들은 철저하게 관리했는데, 체스트가 전혀 모를 정도였으니 아마 유진이 자백하지 않았더라면 수사국 직원들도 몰랐을 것이다. 한가득 밀수품의 제보를 받은 그들은 더 이상 수사를 꼼꼼하게 하지 않았는데, ‘배터리’의 재료들은 지붕 밑 아무도 모르는 다락방에 숨겨져 있었다.

다만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유진에게 나가라고 했지만, 모든 일은 성공적으로 이어졌다. 친스타람파였던 루벤은 왕이 되지 못했지만 동생인 다니엘에게 이런저런 훈수를 놓을 위치는 되었고, 그녀는 오랫동안 그에게 주입했던 사상을 국왕인 다니엘에게까지 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체스트는 다시 왕립마법대학에 복귀하는 것 정도를 꿈꿨지만 다니엘의 행보는 훨씬 더 파격적이었다. 산하기관을 신설하고 루벤이 추천한 대로 국장의 자리를 그녀에게 준 것이다. 그녀는 그길로 아카날과 연락을 끊고, 철저하게 밀수업계를 정리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마력이 없었던 자신을 국가가 제대로 인정해 주는 것, 자신의 뒤에서 수군댔던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명예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국왕과 모든 산하기관 직원들 앞에서 연설을 할 때, 그녀는 지난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명예롭게 인생을 마무리할 것이다. 거상의 딸로 태어났지만 간단한 마력 아이템조차 쓰지 못해 하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백치가 아니고, 평민으로서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자리에 서서 엘리트로 기억될 것이다. 공부는 잘했지만 마법을 쓰지 못하여 왕립마법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그녀는 열등감을 디딤돌 삼아 결국엔 여기까지 왔다.

“체스트, 다녀왔습니다. 일찍 오셨네요.”

“아, 그래.”

그리고 이렇게 평화롭게,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간직한 채로 살아갈 것이다.

“유진, 오랜만에 피자를 해 먹자. 전기 오븐도 한번 시험해 볼 겸.”

“네. 뭐라도 좀 도와드릴까요? 어머, 근데 이건 왜 이렇게 커요? 구울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안 돼요?”

“더 연구해야겠지. 이건 아무도 못 쓸 테니까. 그래도 강의할 때 말해 줘야 하니, 한 번은 써 봐야 해. 요새 기술국 경쟁률이 꽤 된단다.”

그녀는 뿌듯하게 웃었다.

* * *

“어쨌든 그래서 말이야…… 그 여자는 잘하고 있어. 이젠 왕궁 직속 기관의 사람이니 조금만 헛짓거리를 해도 목을 날려 버리려고 했지만, 스타람을 완전히 배신한 것 같더군.”

루벤은 어느 작은 무덤 앞에 앉아 석양빛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작은 묘비 위에는 붉은 장미꽃 한 다발이 가만히 놓여 있었다.

“마력이 깜짝 놀랄 정도로 훨씬 많이 줄었어. 그래도 전기용품들이 나름 자리를 잡아 가서, 다른 나라들보다는 혼란이 훨씬 덜하지. 심지어 수출도 꽤 하고 있다니까. 스타람 것들과는 달라. 발전소가 필요 없거든.”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루벤은 노을이 모두 질 때까지 르엘라 하카트의 묘 앞을 떠나지 않았다. 르엘라는 루벤이 사랑했던 단 한 명의 여인으로, 한참 전에 이미 차가운 땅 속에 묻혔지만 루벤은 그녀의 마지막 편지를 잊지 않았다. 

당신이 만드는 새로운 세상이 궁금하다는 그 말을 지키기 위해 그는 여기까지 왔다.

“네가 살아 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거야. 우리는 아직 발전소의 원리를 몰라. 대신 마력을 이용하기로 했고, 사람의 마력은 사라지고 있지만 여전히 마력을 지닌 풀은 넘치도록 많으니까…… 약제국에서 전기로 변환할 수 있도록 온갖 풀떼기들의 마력을 뽑아내고 있거든.”

루벤의 눈에 그리움이 잔뜩 쌓였다. 사람은 각자의 동기를 위해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정말 동료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배신하기도 하고, 배신하리라 결심했던 사람에게 웃으며 손을 내밀기도 한다.

그가 체스트의 추천을 받아 스타람에 여행을 다녀오고, 전기 문명에 매혹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해서까지 체스트에게 연락이 오자 루벤은 당연히 의심하기 시작했다. 왕족에게 아무 목적 없이 연락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아무 이유 없이 조언하고자 하는 사람을 피하는 것은 군주학의 기본이었다.

그는 그녀의 부름에 언제나 선량하고 멍청한 제자인 척 응하면서 아주 오랫동안 의심의 눈으로 체스트를 지켜보았다. 평민들 속에 섞여 지냈던 그는 몇 가지 정보를 모은 뒤 ‘킹’이 체스트라는 것을 눈치챈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루벤은 그녀가 제대로 활동하기 전부터 뒤를 밟았으며, 체스트가 강의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했던 말들과 킹이 하는 행동들을 비교해 보며 확신을 얻었다.

딱히 체스트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벤은 그녀가 짜는 판에 사람을 심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메니티의 마력을 중단시킬 것이라는 계획을 알면서도 다니엘에게 말하지 않고, 이단을 직접 아메탄 왕궁에 들였다. 큰 충격이 없다면 신중한 다니엘의 치세 아래에서 전기 문명은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은 되지 못했어도 르엘라에게 그의 신념대로 만드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던 그는 체스트에게 속아 넘어가는 척하며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처음엔 다니엘이 스타람과의 교역을 허가한 뒤에 체스트를 체포해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셰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오히려 ‘기술국’이라는 산하기관을 만들겠다고 했고, 루벤은 그렇다면 체스트에게 기술국장의 자리를 줘야겠다고 여겼다. 실제로 아메탄에 그녀보다 전기공학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고, 왕국의 감시하에 두면 다른 짓을 하기 시작할 때 더 처벌하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그 와중에서 밀수꾼들이 한자리 해 먹거나 말거나 별 관심은 없었다. 대의에는 언제나 파리들이 꼬이는 법이다.

아카날과 체스트, 루벤의 이해관계가 달라진 것은 그 때부터였다. 체스트는 명예 때문에 움직인 사람이니 쉽게 아카날을 배신했다. 루벤은 전기의 상용화 때문에 움직인 사람이니 체스트가 자신을 이용했던 것도 그대로 묻었다. 물론 그 와중에 미안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아메니티의 마력이 없어졌던 그 일주일간, 고뇌에 빠져 있던 다니엘을 보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더라고. 곧 돌아올 거라고 말도 못하고 말이야. 그런데 그 정도 충격이 없었다면 막 왕위에 오른 다니엘은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걸. 하지만 어쨌든 잘되었잖아, 모두? 그 시기를 놓쳤다면 이렇게 급격하게 줄어든 마력에 대비하지 못했을 거야. 게다가 내 예상대로 제국도 멸망했으니까.”

그는 히죽 웃었다.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어도, 실제로 여행을 다니며 국제 정세를 읽는 것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한다고 생각했었다.

“윌리엄처럼 끝까지 제국 편을 들었다가는 큰일 날 뻔했지. 그러니까 다니엘은 사실 나한테 조금 속았지만, 고마워해야 하는 게 맞아.”

자신의 예상이 모두 맞아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그는 뿌듯한 듯 르엘라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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