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그래서, 이건 선물이야.”
“응?”
리젠은 조심스럽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약제국은 이번 일로 대단히 큰 실적을 세울 예정이거든. 다 네가 만든 전례 때문이니까, 과장님이 특별히 챙겨 주라고 하셨어.”
“이게 뭔데?”
“약제국에서 엄청나게 수익을 올리고 있는 약. 귀족들한테는 없어서 못 팔아. 피부가 뽀얘지고 광채가 나는 미용 목적의 시약이야.”
“야, 내가 이걸 왜 먹어?”
“예쁘게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 중요한 날 먹는 거지.”
“리젠, 선물을 해도 이렇게 센스 없게 하면 어떡해.”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난 독신주의자고, 그 어떤 파티에도 안 가. 먹을 일이 뭐 있겠어? 아 잠깐, 그럼 이거 내가 다른 사람한테 팔아도 돼?”
“어머! 그렇게 성의를 무시하면 어떡해?”
리젠은 그녀를 찰싹 치며 말했다. 재빨리 상자 속에 들어 있던 앰플을 꺼내 하나 딴 그녀는 유진의 두 손을 한 팔로 제압하고 입을 벌려 억지로 부어 넣었다.
“……야!”
유진은 여전히 작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동기들 중 체술이 으뜸이었던 리젠의 날쌘 행동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럼 기분 전환으로라도 네가 먹어. 이게 얼마짜린데?”
“아이 씨…….”
앰플이 하나 빠졌으니 이제 제값 주고 팔 수도 없었다. 그녀는 짜증을 내며 입을 닦았다.
“이걸 오늘 먹어서 뭐해…… 심지어 점심도 먹었는데! 행정국 안에 처박혀 있다가 퇴근할 일밖에 없다고.”
“혹시 아니?”
리젠이 곱게 눈을 흘기며 덧붙였다.
“뽀얀 피부가 필요한 일이 생길지?”
* * *
유진은 투덜대며 리젠이 준 상자를 안고 터덜터덜 행정국 안으로 들어왔다. 점심시간을 조금 넘겼기 때문에, 아린스가 짜증을 내면 앰플 중 하나를 줄까 고민하며 문을 열었을 때였다. 예상했던 대로 아린스가 그녀를 보자마자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왜 이제 와? 비상 상황 닥쳤단 말이야.”
“우리가 비상 상황일 게 뭐 있어요.”
그녀는 이미 기분이 상해서, 앰플을 조심스럽게 책상 밑으로 숨기며 툴툴댔다. 아린스가 팔짱을 끼고 쏘아붙였다.
“얼굴이 너무 좋아 보이는데, 키탄 과장님께 갈 때에는 조금 죽상을 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 키탄 과장님 기분이 상당히 안 좋으시거든.”
“……네? 과장님께 가야 해요?”
“저기 회의실에 계시니까 얼른 가 봐. 계속 기다리셨어. 네 담당 일이란 말이야.”
“확실해요?”
유진은 제복 외투를 최대한 천천히 벗으며 말했다. 괜히 자신에게 일을 떠넘기지 말라는 듯한 어조를 눈치챘는지 아린스가 눈을 세모꼴로 떴다.
“확실해! 누가 봐도 네 일이야! 그러니까 문서를 왜 그 따위로 만들어서는…….”
“네?”
문서 이야기가 나오자 유진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가 만든 문서에 오류가 생겼다면 또 일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서랍에서 머리끈을 꺼내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펜을 챙겨서 급히 일어났다. 그녀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것을 확인한 아린스가 그제야 조금 마음이 풀리는지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리한 카드민이 돌아왔단 말이야. 너는 아예 문서를 쓸 때 그냥 제국에 뼈를 묻으라고 하지 그랬니? 괜히 돌아와서 일이 복잡해졌잖아.”
유진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녀는 아린스의 말에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의자를 박차고 나가 회의실로 달렸다.
“야, 그렇게까지 뛸 필요는 없는데…… 이미 늦었어. 그 거리를 뭘 뛰고 그래?”
아린스가 머쓱해하는 말을 뒤로하고, 그녀는 느린 달리기 실력을 원망하며 숨이 턱 끝에 찰 때까지 행정국 끝에 위치한 회의실로 달려갔다. 유진은 노크도 잊은 채 회의실 문을 벌컥 열었다. 매일 저녁 흑백 사진으로만 보던 그 남자가 거짓말처럼 앉아 있었다.
“아, 유진.”
키탄이 유진을 보고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일이 좀 복잡하게 됐어.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유진의 잔뜩 상기된 얼굴을 보고, 키탄이 미안하다는 듯이 뒤통수를 긁었다. 리한은 심지어 혁명군의 군대를 이끌던 사람이었고, 아메탄 왕국에 돌아왔을 때 어떤 대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제 수사국과의 협조 업무도 엄청나게 많이 해야 할 것이고, 왕족과의 알현도 엄청나게 준비되어 있을 것이며, 심지어 유진에게는 이 와중에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한다는 족쇄 같은 의무가 있었다.
“어쩌냐…… 당장 수사국에서만 협조 공문이 이만큼이야.”
“…….”
유진이 아무런 말도 못하는 것을, 일거리가 많아서 할 말을 잃은 것이라고 생각한 키탄이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한데, 난 일단 오후 출장이 있어서 가 봐야 돼. 그동안 알아서 좀 처리하고 있어.”
“……네.”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한은 씩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말고 가시죠. 제 담당자가 일을 잘 하더라고요.”
“……아무리 일을 잘해도 그렇지, 이게 그렇게 간단한 사안은 아닙니다.”
키탄이 울컥해서 짜증을 냈다.
“혁명군을 이끌던 사람의 망명이라니…… 그것도 근거가 되는 문서가 있고…… 하…… 이걸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그가 한숨을 쉬고, 유진만 남겨 두고 나서 회의실 문을 닫았다. 유진은 홀린 듯이 회의실 탁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치 3년 전 어느 날, 담당자가 되어 그의 앞에 앉았듯이.
“괜찮지? 저 사람이 말하는 걸 보니까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의 눈 밑에 3년 전에는 없던 흉터가 생겨 있었다.
“넌 또 내 길을 만들어 줄 테니까.”
그녀가 방울져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이 순간을 상상해 왔고, 그래서 계획했던 대로의 첫 질문을 가까스로 꺼냈다.
“……리한…… 그때…… 헤어질 때…….”
리한은 큰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안 했다는 말이…… 뭐예요?”
정말로 쿨하고 멋있게, 냉담하게, 바로 어제 만났던 사이처럼 질문을 꺼내려고 했는데 눈물이 자꾸 나와서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했다. 리한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웃었다.
“내가…… 초록색을 좋아하거든. 보육원에 있을 때 울창하던 나무들이 생각나서.”
“…….”
“그래서 널 이 회의실에서 처음 본 순간…… 눈이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어. 사실 한눈에 반했는지 가슴이 철렁하더라. 그게 내 첫인상이었는데, 네가 퉁명스러워서 꽤 실망했었어.”
그녀가 허무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가 억울하다는 듯 덧붙였다.
“이상하게 너한테는 예쁘다는 소리가 잘 안 나와서.”
그녀는 그의 팔에 자잘하게 생긴 흉터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 손등에 그어진 상처를 매만지며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리한은 그녀의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다가 물었다.
“넌?”
“네?”
“네가 하려던 말은 뭔데?”
“……하…….”
유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말이었고, 그래서 다시 만나는 날에야만 말해야겠다고 치기 어리게 생각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감격스러운 상황에 막상 그 얘기를 하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뭔데.”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게 궁금해서 사브르가 무릎을 꿇는데도 뛰쳐나왔단 말이야.”
“음…… 그게…….”
“망설이니까 더 궁금한데.”
그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유진이 후, 하고 한숨을 쉰 뒤 재빠르게 말했다.
“여기저기 귀족 영애들과 부인들이 어떻게든 하룻밤을 보내 보려고, 아메탄 사교계에서 리한 카드민이 그렇게 난리라던데…….”
리한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처음으로 가졌으니, 그 어느 귀족 영애도 부럽지 않다고요.”
그가 입을 벌리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을 호탕하게 웃었다. 그가 한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한손으로는 턱을 괸 채 탁자 건너편의 그녀를 마주 보았다.
“내가 부러웠던 사람은 딱 한 명…….”
“…….”
“국경에서 너를 업고 아메탄 왕국으로 들어가던 노엘 하이트.”
유진은 살짝 미소 지었다. 리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여기 왔을 때…… 네가 다른 사랑을 하고 있다면 당연히 보내 주려고 했는데…… 물어보고 싶지도 않아졌어. 내가 늘 그리워하던 그 얼굴이 너무…… 너무 예뻐서.”
유진은 속으로 리젠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그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메탄을 위해 노래를 하라면 노래를 하고, 춤을 추라면 춤을 출게. 네 조국이고, 너를 만나게 해 준 곳이니까. 대신 이곳에서, 네 곁에서 평화롭게 잘 살 수 있도록…….”
3년 전 처음 만난 그때처럼, 리한은 매력적으로 웃어 보였다.
“담당자님, 잘 부탁해.”
<完>
외전1. 체스트와 루벤
아카날은 짜증이 늘었다. 생각보다 제국의 내란이 장기전이 되면서 세율을 올려야 했고, 그러다 보니 점차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서 아메탄의 지하 경제를 이용해 자금을 끌어오려고 했는데 마지막에 ‘킹’이 배신하면서 모두 헛수고가 되어 버렸다.
킹과의 연락은 이미 끊긴 상태였다. 그는 도대체 언제부터 킹이 자신을 속였는지 알 수 없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맺어 왔던 인연이고, 먼저 다가온 사람도 킹이었고, 또 아주 오랜 기간 준비했던 일이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다.
대륙에 봉쇄령이 내리기 한참 전, 그는 스타람에 유학을 온 아메탄 왕국의 어느 부유한 여자를 처음 만났다. 그는 고아들을 위한 기술학교를 막 설립한 참이었는데, 그녀가 마력을 대신할 전기 기술을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그 학교로 안내된 것이었다. 아카날은 별 뜻 없이 몇 개의 전기용품을 건네주었고 영특한 그녀는 전기라는 기술에 홀딱 빠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나는 사실 마력을 잘 운용하지 못하게 태어났어요. 마력 기반인 아메탄 왕국에서 살기가 너무 힘들죠. 부모님의 유산을 물려받아 돈은 많지만, 사사건건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또 무시하는 시선을 견뎌야 해요.”
그녀는 스타람에서 전기공학을 배운 뒤, 아메탄의 왕립마법대학에서 선택 과목으로 강의를 개설하겠다고 말했다.
“마력이 사라지는 시대에, 전기 기술은 정답이라고 생각해요. 두고 보세요. 대륙이 마력에서 자유로워질 테니까.”
아카날은 그녀의 그런 말에도 딱히 관심이 없었는데, 다만 외국인이 유학을 온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가까이 지냈다. 그가 설립한 기술학교에 외국인마저 공부를 하러 온다는 것은 그의 정치적 행보를 홍보하기에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아메탄 왕국에 돌아가기 전,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이건 큰돈이 될 거예요. 난 거상의 딸로 태어나 돈의 흐름을 보는 데에는 익숙해요. 대륙엔 이런 기술이 없으니까, 시장이 활짝 열려 있는 셈이죠. 잘만 하면 스타람은 굉장히 부유하게 될 거예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