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143/256)

  

53화.

“하필 내가 대학 시절 선택 과목이 전기공학이었고…… 워낙에 날 싫어하는 교수님들이 많다 보니 체스트 교수님과 친해지게 된 거고…… 교수님의 말을 듣고 스타람에 여행을 갔다가 전기 기술에 정말 감명 받게 되고…… 어쩌다 보니 졸업 이후에도 연락이 닿아 자주 뵙고…… 그러다 보니 내가 제국 위주의 사고방식을 갖지 않게 된 거지, 뭐.”

그동안 기술국은 꽤나 많은 기술을 고안해 냈다. 아직 거대한 크기의, 절대 휴대가 불가능한 전기 소자가 필요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작동되는 전기용품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발전소가 없어 전기로 변환할 수 있는 마력이 아직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마력의 원천은 사람이 아닌 풀이었기 때문에 약제국의 협력도 필수적이었다. 마력이 다시 사라지는 일은 없었지만 불안감에 스타람 물건을 사 모으던 사람들이 밀수를 멈추고 불안감을 잠재우는 충분한 계기가 되었다. 여전히 천한 기술이라며 욕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마력은 놀랄 정도로 줄어들어 고대 마법 이외에는 잘 작동하지도 않게 되었던 것이다.

아메탄 왕국이 어쨌든 겉으로 몹시 안정되어 있었으므로, 그중에서도 새로운 일을 자진하여 절대 벌이지 않는 행정국은 3년 동안 내내 똑같았다. 그리고 그 ‘똑같음’을 미덕으로 삼는 부서기도 했다. 유진은 주임으로 승진해서 후배를 꽤 많이 받았다. 늘어난 업무도 있고, 후배에게 넘긴 업무도 꽤 있었지만 망명에 관련하여 ‘특별 관리 대상’을 받는 것은 여전히 그녀의 일이었다.

“아, 유진. 네가 보낸 보고서 검토해 봤어. 약제국에서는 완전 환영이야.”

유진도 똑같았다. 이마를 가리는 일자 앞머리,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곧은 은발 머리, 동그란 초록색 눈에 단정한 제복 차림으로, 언제나 뚱한 표정을 한 채 앉아 있었다. 그녀의 대학 동기이자 약제국에서 주임을 달고 있는 리젠이 그녀의 보고서를 보고 신나서 달려왔다.

“이런 사람을 받게 되다니,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데. 안 그래도 이번에 기술국과 협력하면서 이런 사람이 꼭 필요했어.”

“우리가 숙식 제공비를 제공하니까 특별 관리 대상으로 분류될 법한 고유한 능력으로 아메탄 왕국에 도움이 되어야 하거든. 맨 처음 ‘특별 관리 대상’ 업무가 신설될 때 만든 매뉴얼이야. 이 여자 능력은 약제국에 도움이 될까 생각해서 협조 요청한 건데 잘 됐다.”

“그 매뉴얼 끝내준다. 합리적이네.”

“넌 애가 어린데도 그렇게 일을 하고 싶어? 나 같으면 쓸 수 있는 휴가는 다 썼다.”

“음…… 그러게. 근데 네 보고서를 받으니까, 꼭 이 일은 내가 맡고 싶어지더라고. 그런 일이 하나둘 생기니까 아무리 애가 어려도 약제국에 나오고 싶은 거겠지?”

유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대륙이 혼란해지며 아메탄에 망명하겠다는 유명인이나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서, ‘특별 관리 대상’은 벌써 7명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중 한 명에 대한 문서를 작성하며 그녀가 기지개를 켰다.

“빨리 작성하고 가.”

리젠이 펜을 들자 유진은 피곤한 눈을 비비며 말했다.

“나 퇴근해야 하니까. 벌써 날이 캄캄하단 말이야.”

유진은 대학 시절부터 리젠이 너무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다. 적절히 돈 받는 만큼만 책임감 있게 일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유진은 야근하고 있는 시간에 문서를 작성하겠다고 오는 리젠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독촉해서 보내고 난 뒤, 유진은 아린스의 눈총을 받으며 벌떡 일어섰다. 단출한 짐을 싸서 나온 그녀는 몇 년 동안 똑같이 걸었던 길을 지나 체스트의 하숙집에 도착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항상 그녀를 반겨 주던 체스트가 이제 그녀보다 더한 야근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혼자 열쇠로 문을 따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녁은 먹었지만 그대로 자기 아쉬웠기 때문에 유진은 와인 한 병과 크래커를 챙겨서 방으로 향했다. 유진의 방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거대한 기계가 방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스타킹을 벗어 방구석에 던져 넣고, 크래커 하나를 문 채 제복을 벗었다.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자 목덜미에서 남에게는 보이지 않던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렸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가 능숙하게 발로 서랍을 열어 LP판을 꺼냈다. 그녀의 방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기계는 재무국에서 기술국으로 옮겨 간 그녀의 대학 동기가 연구하고 있는 전축의 실험판이었다. 너무 크고 가격이 비싸 상용화되기엔 아직은 멀었다고 말했지만, 어쨌든 체스트가 유진을 위해 선물한 것이었다. 유진은 낑낑대며 체스트가 가르쳐 준대로 무거운 전기 소자를 연결하고, LP판을 조심스럽게 끼웠다.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그녀는 후, 하고 한숨을 쉰 뒤 와인을 머그컵에 따르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하루의 피로가 모두 풀리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방 한쪽 면에 가득한 리한 카드민의 흑백 사진을 보며 예전처럼 중얼거렸다.

“그 정도 야근했으면 됐지, 또 먼저 나간다고 아린스가 눈을 흘기지 뭐예요. 아니, 내가 먼저 퇴근을 해야 내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나갈 거 아니에요.”

LP판이 돌아가며 타르안의 선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리한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으며 그녀가 와인을 꼴깍꼴깍 삼켰다.

“하긴, 난 처음에 들어왔을 때부터 일을 다 했으면 선배들 눈치 안 보고 그냥 퇴근했거든요. 그래서 아린스가 처음부터 내가 싫었나 봐요. 그래도…… 제가 제국에서 행방불명됐을 때 엄청 울었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전축에서는 몇 번이고 들었던 리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그녀가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가수였고, 내가 그 팬이었던 까닭에…… 이렇게 매일 당신을 볼 수 있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난 괜찮아요.”

사진 속의 리한이 무대 위에서 웃고 있었다.

“물론 당신이 돌아와…… 림프를 쳐 주고, 함께 술을 마셔 준다면 정말 좋겠지만…….”

아직도 이 말을 할 때에는, 살짝 눈물이 났다. 함께 살자며 속삭이던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속에서 깊은 파도가 몰아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씩씩하게 울음을 삼켰다. ‘만들어진 꿈’의 가사대로, 이런 자신이라도 결국엔 살아 내기로 했던 것이다.

“이러다 죽어도 나쁘지 않은 삶이지, 뭐. 딱 예상했던 삶이기도 하고.”

유진은 언제나 인생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쁜 일이나 생기지 않고, 소소하게 자기 자신을 위로해가며 살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주어진 일을 하고, 또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작은 행동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이 정도면 인생이 자신을 엿 먹인 건 아니라고, 그녀는 전축에서 지지직 울리는 리한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에필로그

행정국은 대륙의 소식에 상당히 느린 편이었는데, 어쨌든 그런 소식을 들으려면 외교국이나 수사국 직원들과 친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의 성격상 수사국과 행정국은 사실 서로 싫어하는 부서였기 때문에 제국의 내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행정국에 가장 늦게 소문이 퍼졌다.

“무슨 상관이야.”

아린스가 점심을 먹으며 툴툴거렸다.

“어차피 우리는 주어진 일만 하면 돼. 제국에서 누가 이기든 말든.”

처음에야 남의 나라 전쟁이 흥미로웠지만, 내전이 3년을 끌면서 지루한 소강상태에 빠져 있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비등비등하게 어디서 이기면 또 어디서 지고, 어디서 대승을 거두면 어디서 대패를 하고, 이런 식이었다. 제국은 넓었고 그만큼 전투도 많았다.

“유진! 밥 다 먹었으면 약제국으로 커피 마시러 올래?”

점심을 다 먹고 나서 식당을 나서는데, 약제국의 리젠이 밝게 아는 척을 했다. 썩 친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졸업하고 오랜 시간이 흐르니 동기가 그래도 남들보다 편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제국으로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약제국은 왕궁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행정국과 거리가 멀었다. 리젠은 밝게 웃으며 그녀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실험 기구가 요란하게 움직이며 커피를 추출하는 것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거, 특별한 손님한테만 주는 거야.”

리젠은 비커에 똑똑 떨어지는 커피를 받으며 말했다.

“우리 과장님이 꼭 감사 인사를 하라고 해서 초대했어.”

그녀는 뚱한 얼굴로 리젠이 건네는 비커를 받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마시자마자 유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놀라워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리젠이 키득대고 웃었다.

“엄청 맛있지? 이거 아무나 먹을 수 없다. 약제국 특별 제조 커피야.”

“……대단한데.”

딱히 감정 표현이 없는 유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격렬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한 모금 더 마시는데, 리젠이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네가 연결해 준 특별관리대상 외국인, 일을 너무 잘해. 우리가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그 사람이 가진 특별한 능력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정말 고마워. 역시 한스팀에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가 봐.”

“일인데, 뭐. 문서대로 처리한 거야. 내 능력이 아니고.”

유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리젠의 결혼식 때, 처음으로 리한에게 축가를 시켰었지. 숙식제공비에 걸맞은 재능을 아메탄에 기부하라고 하는 목적으로 만든 조항이었다. 그리고 그 조항에 따라, 외국에서 망명하고 있는 특별 관리 대상은 이렇게 공공적인 목적으로 아메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카이든하고 살아서 그런지…… 수사국은 항상 행정국 욕을 하니까 말이야. 쉬운 일도 어렵게 하고, 밖에서 뛰는 실정 모르고 안에서 문서만 요구한다고. 그래서 행정국은 딱히 엄청난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다들 뭐, 그렇게 생각하지.”

“정해진 매뉴얼이 있다는 게 얼마나 서로를 편하게 하는 건지 이번에 좀 알 것 같더라. 특별관리대상 외국인을 직접 담당해 보니까 알았어. 꼼꼼하게 잘 만든 전례가 도움이 많이 되었거든. 그런 매뉴얼이 없었다면 약제국은 이 훌륭한 기회를 놓쳤을 것 아냐.”

“……잘난 척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씩 웃고 빈 비커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처음 매뉴얼을 만들 때가 중요한데, 그걸 내가 만들었어. 후배들은 이제 거기에 맞춰서 일하면 되니까, 어떤 특별한 외국인이 망명해도 당황하지 않아. 가끔 뿌듯하더라고.” 

“자랑하라고 부른 거야.” 

별로 재밌는 말이 아닌데도 리젠이 깔깔대며 웃었다. 유진은 시계를 흘끔 보고 일어섰다. 약제국이 행정국과 조금 멀어서 슬슬 출발해야 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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