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모든 것이 다 예상대로였다. 체스트는 유진을 꼭 끌어안고 자신이 미안하다고 한참을 울었다. 하숙에서 나가라고 해 놓고 제국에서 행방불명되어 자신이 얼마나 마음이 안 좋았는지 한참을 말해서 유진이 결국 웃음을 터트릴 지경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네게 한 말이 나가라는 소리였다니…… 나는 나를 평생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
“한 번만 더 말씀하시면 백 번 채우겠어요. 그리고 그만 우세요.”
“나이가 많아지면 눈물도 많아져서…….”
“그러면, 저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될까요?”
유진의 말에 체스트가 당연하다며 또 그녀를 다시 끌어안았다. 유진은 난감해하며 말했다.
“물론 거절하셔도 돼요……. 이제 월급하고 강의료도 받으시는데 제 하숙비가 필요 없을 수도 있고…….”
“유진,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난 봉쇄령이 내리기 전 스타람에 유학을 떠났을 정도로 물려받은 유산이 꽤 된단다. 돈 때문에 널 받은 건 아니야.”
체스트는 유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마법을 잘 못 쓰니…… 믿을 수 있는, 마법을 잘 쓰는 동거인이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몰라. 내가 같이 살아 달라고 부탁할 판이다. 네 방도 하나도 치우지 않았어. 물론 리한의 방도 치우지 않았지만 워낙에 짐이 없어서…….”
유진은 계단을 올라 그의 방문부터 열었다. 워낙에 빈 몸으로 왔기 때문에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책상에 쌓여 있는 악보와, 방구석에 기대어 있는 초록색 림프를 천천히 챙겼다. 이 방에서 그가 림프를 즉흥적으로 연주했던 기억이 울컥 쏟아졌다. 그녀는 퇴근한 뒤 그 선율을 들으며 와인을 마시고, 작은 창으로 달을 보았다.
그녀의 작은 방도 그대로였다. 그녀는 서랍을 열어 밀수품으로 가득한 상자를 꺼냈다. 대부분이 호웰의 사진이었지만 열심히 찾아보니 단체 사진도 많았고, 리한의 사진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새 그리워진 마음에 울컥 눈물이 났다. 그는 유진의 사진이 없을 텐데, 그녀를 잊고 살면 어쩌나.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군인으로 훈련받았다는데, 결국에는 유진과의 짧은 시간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고 제국에서 군인으로 살다가 군인으로 죽으면 어쩌나.
생각보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았다. 아무리 길게 쳐도 세 달이었다. 그녀는 그 세 달이 자신에게 무엇을 남겼나 가만히 생각하다가, 거울 앞에 서서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
그녀의 하얀 목 안에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제국의 연회 날, 리한이 그녀에게 걸어 준 패물이었다.
“절대 팔지 말아야지.”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체스트만큼 나이가 들어도 날 알아볼 수 있게.”
* * *
수사국에 가서 모든 진술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노엘이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같이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산책할래? 점심시간 좀 남았으니까.”
유진은 대뜸 먼저 말했다. 노엘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천천히 산책로를 걸었다.
“노엘.”
인적이 드물어지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먼저 말을 시작했다.
“지난번에 한 얘기 말인데…… 그냥 다른 여자 만나.”
“유진.”
노엘이 한숨을 푹 쉬었다.
“너는 한결같구나. 나는 중학생 때부터 널 좋아했어. 그런데 지금 그렇게 가벼운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유진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발끝만 바라보았다.
“몰랐어…… 만일 네 마음을 알고 있었더라면, 너를 계속 보지는 않았을 거야.”
“그때랑 달라. 지난 10년과 다르다고.”
노엘은 거절을 예상했다는 듯이 차분하게 말했다.
“난 이제 수배도 다 풀리고, 밀수도 나라에서 눈감아 주는 것만 해. 네 곁에 있는다고 해서 네게 민폐가 될 일은 없어. 재산도 모두 현금화시켰어.”
“…….”
“유진, 일하기 싫어했잖아. 스트레스 받는다며. 그만둬도 돼. 만일 우리가 자식을 낳으면 절대 우리처럼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될 거야. 넌 딱히 태어난 게 행복하지 않아서 결혼도 안 하고 자식도 낳지 않겠다고 했잖아. 대물림시키지 않을 수 있어. 이 재산에 어쨌든 난 산하기관 직원이 되었고…… 앞으로 내가 아버님 빚도 다 갚아 주고, 네 조카들 공부도 다 시킬게. 그래도 될 만큼…….”
“노엘, 네 말대로 우리는 10년을 친구로 지냈어.”
유진이 그의 말을 잘랐다.
“내가 네게 그런 걸 요구할 리가 없잖아. 내 삶은 내 몫이야. 누가 너한테 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달래?”
“알고 있어. 10년간 나를 남자로 안 본 네가 갑자기 마음이 돌아서지 않을 건 예상했어. 하지만 이제 날 다시 봐 줘. 다시 또 10년을 지내면 내가 좋아질 수도 있잖아.”
“미안해.”
그녀는 팔짱을 끼고 다시 멈춰 있던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진부하지만 난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 네가 마음 접는 게 좋을 거야. 이건 널 아끼는 친구로서 하는 말이야.”
“……리한 카드민 말하는 거지?”
노엘은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국경을 넘어올 때 그녀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생각하면 금세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넌 그 사람 사랑하는 거 아니야. 오랫동안 타르안의 팬이었기 때문에 잠시 설렜던 것뿐이야. 그렇게 평생을 좋아했던,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와 붙어 있었으니 마음이 갈 만도 하지. 하지만 어쨌든 그 시간들은 끝났어.”
“…….”
“대학 시절에, 너 이아크랑 연애를 1년 했어. 그리고 지금은 아무 의미 없지. 시간이 지나면 리한 카드민도 아무 의미 없어질 거야. 인생의 짧은 흔들림 중 하나일 뿐이야. 결국…… 네 곁에 항상 있는 건 나니까…….”
“곁에 있다고 해서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 난 기다릴 거야. 혁명군이 폴라리아를 점령하면 돌아온댔어.”
“그걸 믿어?”
그가 그녀를 멈춰 세우고, 두 어깨를 짚으며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혁명군이 패배해서 영영 폴라리아를 점령할 수 없으면? 전쟁터에서 그가 죽으면? 아니면 너무 승승장구해서 널 그대로 잊으면? 임시 총독이 화가 나서 그를 죽여 버리면? 온갖 군사적 비밀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을 잘도 아메탄 왕국에 보내 주겠다. 네 알량한 문서는 힘이 없어. 그걸 믿고 있는 건 아니지? 아무런 구속력도 없는 그 공증서 하나로 지금 기다린다는 말을 하는 거야?”
“……그래도 그 사람이 헤맬 때에 길이 되어 줄 거야. 구속력이 없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내 능력이 거기까지뿐이어서 어쩔 수 없었는걸. 그리고 기다리는 건 그냥 나의 일상이야. 알겠지만, 타르안의 무대도 평생 기다리면서 살 각오를 한 내게 그쯤이야.”
“내가 정말 겁이 나는 건…….”
유진은 차마 노엘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넌 정말로 그렇게 기다리며 살 것 같아서 그래…… 가망 없는 일인 걸 알면서도 모든 걸 체념하고 그렇게 살 것 같아서…… 유진, 네 인생을 버릴 만큼 그가 가치 있다고 생각해?”
“그게 왜 가망 없는 일이야? 체스트를 봐. 봉쇄령 이후 다시 교단에 서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희망을 품었지만, 60이 넘어서도 다시 강의를 하잖아.”
그녀가 당차게 말했다. 그것은 그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난 체스트처럼 살 거야. 체스트도 독신이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인생을 버리는 게 아니야. 난 사실 체스트가 그동안 헛된 꿈을 꾼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드디어 체스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유진, 그가 정말로 특별한 것 같겠지만…… 그렇지 않아. 나는 그가 줄 수 있는 모든 걸 네게 줄 수 있어. 말했잖아. 난 이제…….”
“아니.”
유진은 그의 손을 차분히 떼어 내며 말했다.
“네 말대로 난 일하기 싫어. 끝없는 문서 작업을 하다 보면 내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해. 직장 상사들에게 치이다보면 짜증도 나. 따박따박 번 돈을 고향으로 보내려면 힘도 빠져.”
“…….”
“하지만 내 그런 하찮은 삶이 정의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었어.”
그녀는 정해진 삶을 한결같이 사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삶을 보고, 노엘은 그 짐을 모두 없애 주겠다고 말한 반면 리한은 그녀의 삶 자체가 구원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 사람 옆에 있으면 내가 정말 좋은 사람처럼 느껴지고…… 내 인생이 가치 있게 빛나는 느낌이 들더라. 그래서 노엘, 나는 내 인생을 사랑하려고 그를 기다리는 거야. 그리고 기다릴 수밖에 없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나여서 좋았어.”
노엘이 말하는 모든 것을 유진은 다 알고 있었다. 리한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보다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그녀가 만들어 준 작은 길은 종이 쪼가리 한 장에 불과하다는 것도.
하지만 만일 그를 평생 보지 못하더라도, 유진은 눈을 감을 때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기다리고 싶었거든’이라고 중얼거리며 편히 합리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를 그 누구보다도 아껴, 노엘 하이트. 넌 내 유일한 친구고, 네가 수배를 당해 쫓기고 있을 때 매일같이 잡히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어. 네가 눈물로 고백하던 그날 밤, 그동안 알아채지 못한 나를 수도 없이 자책했어. 말하지 못한 10년간의 네 마음이 안타까워서.”
유진은 작은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잡았다.
“너를 생각하는 나의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할게.”
“…….”
“나에 대한 마음을 접고, 네 삶을 살아.”
* * *
그 이후 3년 동안 정말로 대륙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아메탄 왕국은 제국의 내란에 휩쓸리지 않았는데, 어떻게든 안정을 찾아보겠다고 국왕 다니엘이 동분서주하며 바쁘게 움직인 덕분이었다. 다니엘은 제국에서 왜 공화주의 사상이 발발했는지 절대 잊지 않았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삶이 안정되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현재 지도자에 만족하면 체제의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
다니엘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아메탄 왕국의 체제 전복이었고, 그는 어린 시절 오랫동안 정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제국과 스타람의 사이에서 누군가에게 지켜야 할 의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국에게 충성을 다 바쳐야 한다는 마음이 없었고 오로지 국익이 전부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단의 보호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격동하는 대륙의 여러 상황들 속에서 다니엘은 왕권이 좀 약화되는 것을 각오하며 필사적으로 평화를 지켜 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타람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던 형, 루벤의 덕을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남들보다 빠르게 전기 기술을 국가적으로 도입하여 독자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아메탄 왕국의 역사에 남을 정도의 업적이었다.
“아, 뭐…… 다 일이 잘되려니까 그런 것이지. 나도 이렇게까지 잘될 줄은 몰랐다고. 진짜야.”
루벤은 다니엘이 감사를 표할 때면 손사래를 치곤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