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141/256)

  

51화.

“술도 좋은 걸로 사다 준다면서요.”

그녀가 서글픔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기다림에 지쳐 포기하더라도.”

결국엔 시간 앞에 모든 것이 희미해지더라도.

“그 말들을 잊을 수가 없을 거예요.”

해는 정직하게 지고 있었고, 그녀의 은발에 붉은빛을 드리웠다. 리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말들조차 잊게 될 만큼 시간이 많이 흘러…….”

가슴에 사무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보고 있으면서도 이미 그립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다른 사랑이 오면 할게요. 당신도 자유로워지세요. 하지만 알 수 있어.”

그녀는 그들이 보내고 있는 이 시간과 나누고 있는 대화 모두 아주 오랫동안 서로 잊지 못할 것을 느끼며 한마디 한마디 진심을 다해 말했다.

“한 번이야.”

노을이 지는 산골짜기는 아름다웠고,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으며, 검은 말은 얌전히 혼자 푸르릉거렸다. 둘이 이제 마지막으로 보내는 저녁 시간일지도 몰랐고, 그래서 그녀는 작은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싼 채 말을 이었다.

“사랑이 이런 거라면 유일할 테고, 이런 사랑은 한 번일 거야.”

이 순간을 얼마나 많이 기억하게 될까.

“어쩌다 다음 사랑을 한다고 해도 당신과는 아주 많이 다를 거야.”

리한은 조용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진이 하는 이 말들은 내일부터 슬픔과 그리움이 되겠지만, 또 그를 버티게 해 주는 힘이 될 것이다.

“다른 특별 관리 대상이 생길 때, 림프 소리를 들을 때, 누군가의 결혼식을 가서 축가를 들을 때, 와인을 마실 때, 제국의 내전소식이 들려올 때, 방음 마법을 치게 될 때…… 모든 일상에서 당신이 생각날 거야.”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유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 * *

유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리한은 국경 너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동그란 안경을 쓴, 나름 곱상하게 생긴 남자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계속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배가 풀렸나? 저래도 돼?”

조금 늦게 노엘을 알아본 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노엘의 표정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말을 멈췄다. 유진의 몸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유진.”

“잠시만요.”

그녀가 심호흡을 했다.

“잠깐만…… 잠깐만 있다 가요.”

“……나는 이대로 말을 달려서, 너를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둘이 살아도 돼.”

그가 한참 동안 참아 온 말을 조용히 읊조렸다.

“난 그래도 행복해.”

“……아뇨.”

유진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소년병들을 가르칠 때의 당신 표정을 보았어요. 제발 가지 말라고, 그냥 아메탄에 같이 돌아가자고 애원하고 싶은 건 나지만…… 당신의 책을 읽어 본 이상 이게 맞다는 건 알아요. 지금은 사랑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에요. 역사가 걸려 있으니까.”

그녀의 숨이 떨렸다.

“당신의 문서에 책임을 지세요. 그들은 이미 당신이 아메탄에 왕정을 지지하며 넘어왔을 때 크게 한번 실망했어요.”

“……미안해. 나 때문에 제국에 오게 되고…… 이 모든 일을 겪게 해서.”

“제가 아파서 그런 거죠. 괜히 축가 무대를 만들어서 그런 거기도 하고요. 그렇게 따지면 탄생부터 후회하겠어요.”

그녀는 눈물을 살짝 훔치고,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녀라고 그와 함께 어디에 몰래 도망가서 사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서대로 움직이는 것은 그녀의 임무였고, 그것이 정의라고 말해 준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여러 가지 부끄러움을 지니고 살지라도, 문서 앞에서만큼은 부끄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다들 이해할 수 없다며 답답하다고 욕해도, 그녀의 그런 태도가 구원이라고 말해 준 남자가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와 그에게는 각자의 정의가 있었다. 그녀가 봤을 때, 리한 역시 억지로 혁명군을 맡은 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두팜 같은 사람들을 배신하고 떠나는 것은 그에겐 또 다른 상처가 될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이 이 모든 상황에서 도망친다고 해도 행복하지 않을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는 그토록 상황 판단이 냉정한 그녀를 사랑했다.

“조금 민망해서,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어요.”

유진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장난스럽게 웃었다. 말 위에 앉은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다음에 만나면 말해 줄게요.”

“나도 있어. 민망해서 하지 못한 말.”

리한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나중에 만나면 말해 줄게.”

“건강해요. 다음에 봐요.”

유진은 최대한 담담하게 손을 흔들고 뒤를 돌았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길이 이어지고, 저 길 끝에 노엘이 있는데, 걸어가기만 하면 노엘이 어떻게든 집으로 데려다줄 텐데 그 길을 걷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유진!”

리한이 걸어가는 그녀에게 들리도록 소리 내어 말했다.

“나는 다음 생애 같은 건 믿은 적이 없어. 있다고 하더라도 생각하고 싶지조차 않았어. 또 생애가 반복되는 건 너무 지겹잖아.”

그도 지금, 이번 생애에서 만나지 못할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을까.

“그런데 다음 생애를 이제는 믿을 거야.”

유진은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꾹 참았다. 서로 울고 있을 것이 뻔하여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만일 이번 생애에서 안 되면, 다음 생애에선 반드시 너와 어떻게든 이어질 거야. 그 결심으로 살아 낼 거야. 그러니까 난 어떻게든 괜찮아.” 

그녀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도 말하고 싶었다. 다시 태어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겠다고. 이 지치고 지루한 모든 시간들을 언제까지라도 버티겠다고. 그러나 목에 걸리는 것은 울음뿐이었다.

“널 만났으니 이번 생은 만족해. 그러니까 너는 나랑 상관없이 부디 행복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특별 관리 대상이었던 리한은 이제 그녀의 손을 떠났고, 죽을 고비를 넘겼든 어쨌든 그녀는 몸을 추스른 뒤 바로 출근을 해서 또 일상을 살 것이다. 다만 이제 그 일상에 수도 없는 그리움과 슬픔, 불안함과 기다림이 자리 잡을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리한의 담당자가 되고, 이 모든 일을 겪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유진은 눈물을 닦아 내며 앞으로 걸었다.

‘이 모든 슬픔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나도 이번 생은 만족해.’

비틀거리며 걷는 유진이 국경을 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노엘이 와락 안았다. 노엘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리한과 눈이 마주쳤다. 리한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그녀를 잘 부탁한다는 뜻을 전달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알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흐느끼는 유진은 차마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못했고, 노엘은 작은 몸집의 그녀를 업고 준비해 둔 아메니티로 향하는 마차를 태웠다.

“유진, 고생했어. 다친 데는 없어?”

“……노엘, 수배는 풀렸어?”

“그럼. 할 말이 많아, 나도 이제 산하기관 직원이야…….”

유진은 슬픔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노엘의 이야기를 들으며 리한이 얘기해 주었던 아메탄의 밀수업계가 생각났다. 아카날 총통과 연계되어 있고, 이 모든 일을 꾸몄다는, 밀수업계를 조종하고 있는 비밀스러운 사람인 ‘킹’……. 노엘일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적어도 이 모든 사건들 중에서 가장 이득을 얻은 사람은 노엘인 것 같았다. 수배도 풀리고, 재산도 모두 영지로 환산했으며, 그토록 원하던 재력으로 인한 신분 상승을 이뤄낸 것이었다.

새삼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노엘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어느 길로 어떻게 올 줄 알고 바로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사람을 얼마나 심어 뒀으면……. 그런데, 아무런 특징이 없는 자신이 오는 길도 이렇게 잘 잡아냈던 노엘이 정말로 리한이 어느 국경을 넘어오는지 몰랐을까?

리한이 국경을 넘어올 때, 이단 황태자도 같이 넘어왔다고 들었다. 혹시 모를 위험한 상황 때문에 노엘은 유진을 엉뚱한 길로 이끌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노엘은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겠지. 유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노엘은 대단한 사람이었던 걸까. 그러나…… 노엘이 유진을 엉뚱한 길로 이끌었기 때문에 그녀는 리한의 담당자가 될 수 있었다.

잠시 의심의 눈으로 노엘을 보던 유진은 곧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다 무슨 상관이겠어. 자신에게 주어진 행정국의 업무가 아니라면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야?”

“우리 집.”

“뭐?”

“저택을 샀어. 네 방도 꾸며 두었어. 일단 가서 쉬어.”

“아니.”

유진은 눈을 뜨고 정색하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체스트네 집으로 가.”

“말했잖아. 체스트는 이제 국장…….”

“그러니 더 잘됐지. 내가 체스트의 하숙집을 나오려고 한 건 체스트가 혹시라도 대학에 돌아갈 때 내가 방해되어서야. 게다가 네가 체스트에게 칼을 겨눴잖아. 이제 그럴 일이 없으니 죄책감 없이 돌아가도 되지. 체스트의 집은 그대로지?”

“……그대로긴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봐.”

“일단 가. 이번 달 하숙비도 다 냈단 말이야.”

그녀는 턱을 괴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메탄의 풍경은 그대로였고 변한 것은 자신뿐이었다. 아니, 사실 그녀도 변하지 않았다.

유진은 당장 내일부터 행정국에 출근할 테고, 위험수당과 출장수당을 끌어모아 밀수품에 대한 벌금을 낼 것이며, 체스트의 집 위층에 있는 그녀의 작은 방에서 잠이 들 것이다. 돌려받은 밀수품에서 이제 리한의 사진을 골라내어 당당히 벽에 붙일 것이며, 언젠가는 타르안의 무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꾸면 된다.

“야, 네가 있는 곳이 기술국이라고?”

“어. 말이 기술국이지, 사실 스타람의 전기 기술을 알아내려고 연구하고 있는 중이야. 근데 전기를 쓰는 게 생각보다 좀 복잡하더라고. 발전소? 그런 걸 만들어야 한다던데. 체스트는 차라리 약초에서 마력을 뽑아내어 배터리부터 만들면 어떨까 고민하고 있는 중이야. 아직 마력을 이용하지 않으면 좀 힘들어. 근데 그 크기가 엄청나서…….”

“잘 좀 해 봐. 열심히 월급 모을 테니까.”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

“전축이 나오면 바로 사야지. 돌려받은 LP판이 한가득인데.”

“넌…… 아직도 타르안에 대해 미련을 못 버렸냐?”

노엘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유진이 뚱하니 대답했다.

“내 생애 한 번만이라도 교역이 풀려서 타르안의 공연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런 희망만으로도 일단 살 만한 세상이야.”

유진의 초록색 눈이 지친 듯이 감겼다.

“그것 외에는 딱히 관심 없어.”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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