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몰랐는데, 아카날은 아메탄 왕국의 밀수업계와 연결이 되어 있었어. 전쟁엔 돈이 필요하고, 자금을 아메탄에서 끌어올 계획이었지. 뭐 어쩌다 보니 그 밀수업계랑 이해관계가 맞았나 봐. 공화정의 임시 총독을 맡은 2황자가 내가 국경을 넘을 때 함께 들어왔어. 2황자는 아메니티의 마력을 없애고…… 그 이후는 그냥 아메탄 왕국에 가서 들어. 나도 확실한 정보는 잘 모르겠으니까.”
유진은 리한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노엘을 생각하고 있었다. 노엘이 어떤 일을 계획 중이고, 그게 수사국에 쫓길 만큼 거대한 일이라는 건 예상했었다. 분명 이 일에 깊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 뻔했다. 일주일간 마력이 없어져 난리가 났었다는 아메탄 왕국으로 돌아가면, 생각보다 많은 것이 바뀌어져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재밌었어?”
“네.”
그녀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르안 얘기니까요.”
“내가 타르안이었던 건 내게 고통스러운 기억이지만…… 처음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네가 흥미롭게 듣는다면.”
유진은 그의 옷깃을 풀어 단단한 가슴에 입을 맞추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의 책을 읽었다고 말했잖아요.”
리한은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유진의 작은 몸을 감싸 안았다.
“사실 난 공화주의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리한의 말마따나, 인기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사람을 팬들은 따라서 지지할 텐데. 저는 여전히 아메탄 왕국이 공화국이 되는 건 원치 않아요. 만일 평민들에게 ‘산하기관 직원들 월급을 모두 너희에게 나눠 줄게.’라고 하면 그 사람이 당선될 것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그런데 당신의 책을 읽고 나서 알았어요. 모두가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상당히 많은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걸요. 자, 투표권 줄게, 이제부터 지도자를 뽑아 봐, 한마디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수많은 문장이…… 음…… ‘정의’를 말한다고 느껴졌어요. 아주 바닥에서부터 생각하면 다 맞는 말이긴 하잖아요. 탄생이 신분을 결정한다는 것이 좀 불공평하긴 하니까.”
그녀가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난 여전히 공화주의자야. 이 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분명 나아가는 길을 위한 발걸음일 거야. 그런데 내가 걷던 길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 포함되어 있었던 거지. 내 걸음이 잘못된 건 어쩔 수 없다 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날 믿고 따라온 사람들은? 스타람은 실패한 공화국이야. 나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어. 아카날을 끌어내리기엔, 그 혼란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난 지쳤어. 너무 어린 시절부터 남을 위해 살았으니까.”
리한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예전에, 확신에 차서 그를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아카날에게 표를 주라고 언제나 말했다. 아카날을 당선시킨 데에 그의 역할은 상당히 컸고, 그 시간들은 언제나 족쇄처럼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난 처음부터 사병 생활이 싫었어. 잘하는 것과 별개로. 어쩌면 평생 이용당하다 말 인생이라는 생각을 했나 봐.”
“처음 타르안의 노래를 들었을 때, 가사가 이상하게 쓸쓸하고 공허하다고 생각했어요. 인생에 지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곡인 것 같았어요.”
유진은 천천히 말했다.
“저도 쓸쓸하고, 공허하며,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인생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언제나 몸이 비실비실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비린내가 얼마나 역했는지, 그물 하나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해 형제들에게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세상 쓸모없는 존재인 것 같았던 어린 시절이 얼마나 의기소침했는지 설명했다.
“‘만들어진 꿈’을 듣고 영혼이 울렸나 봐요.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어두움이 보여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던 거예요. 마치 날 보는 것 같아서. 근데 이제 그 어두움의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당신은 군인이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그의 머리카락을 조용히 쓸었다.
“그럼 뭐가 어울려?”
“한량.”
유진이 미소 지었다.
“밤에 림프나 치고, 남의 결혼식 축가나 부르고, 낮에는 마늘을 까고.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 보이던데요.”
“……그러게.”
“당신이 굳이 전쟁터에서 싸우지 않아도, 누군가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 거예요.”
한숨을 쉬면서도 욕망을 어쩔 수 없는지, 유진은 천천히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그를 받아들이며 미소 지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속삭였다.
“내가 말했잖아.”
“……뭘요?”
“나 같은 이상주의자 말고…….”
그가 그녀의 눈에 입을 맞췄다.
“너처럼…… 네 자리에서 자신의 일에 묵묵히 충실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만드는 거야.”
“아…….”
“나처럼 모든 걸 안다고 설치면서 앞에 서는 사람보다는…… 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걸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 나를 살린 건 너의 그 직업의식 때문이고, 나는 널 좋아할 수밖에 없었어.”
그녀는 그의 체온을 더 느끼고 싶어,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래서…… 네가 내 구원인 거야.”
* * *
노엘은 모든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이단 임시 총독이 현재 있는 곳과, 아메탄 왕국으로의 가장 합리적인 경로를 추론했다. 어차피 기술국에 출근해서 딱히 하는 일이 없었던 그는 즉시 연가를 내고 유진이 올 만한 국경으로 내달렸다. 유진은 문서를 통해 자신이 아메탄 왕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밝혔고, 그러니 반드시 공식적인 길로 올 것이 분명했다. 그는 국경 곳곳에 사람을 두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에게 소식이 들린 건 그가 국경에 도착하고 나서 3일이 지났을 때였다. 이르트 산맥의 길을 따라 달려오는 말 한 필이 보인다는 말을 듣고 노엘은 퀭한 눈으로 바로 이르트 산맥과 이어진 국경으로 이동했다.
* * *
유진과 리한은 며칠간 아메탄 왕국으로 향하는 길을 달리며 둘 다 발걸음을 늦추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삼켜야 했다. 그들은 오롯이 둘이 있는 시간을 즐기며 밤에는 별을 보고 노래를 함께 불렀으며, 말을 달리다가도 눈이 맞으면 서로의 몸을 가지곤 했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 절실하게 했다. 유진은 왜 그렇게 전쟁터에서의 연회가 향락적이고 문란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너 왜 이렇게 잘 웃어?”
리한이 말을 달리다가 불쑥 물었다. 유진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좋으니까 웃죠.”
“그동안은 안 좋았어?”
“딱히 좋을 일은 없었죠.”
이젠 말에 익숙해진 그녀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대충 묶으며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니까 좋은가 봐요.”
“……노엘이랑 있을 때도 잘 안 웃어?”
“당연하죠. 좋을 게 뭐가 있어요.”
“두팡이랑 있을 땐 좀 웃던데.”
“걘 남동생 같아서. 그리고 두팜이에요.”
그녀가 킬킬대며 다시 웃었다. 유진은 그가 다른 남자 이야기를 하며 살짝 짜증을 낼 때마다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있잖아요.”
이제 저 멀리 산맥의 끝이 보였다. 산맥의 끝 길까지 달리면 아메탄의 국경이었다.
“당신을 어떻게든 돌아오게 하려고 쓴 문서였지만…… 정말로 좋은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응?”
“제국에서 정말로 당신이 꿈꾸던 공화주의가 꽃필 수 있는 거잖아요. 비록 외국이지만. 그 시작을 돕고, 아주 멋있게 빠져나오는 거죠.”
그 와중에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마음속에 묻은 채, 유진은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당신의 책을 읽었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은 다음, 자, 이제는 제국인의 몫이다, 하고 빠지는 거예요. 정상에서 내려온다고 해야 하나. 그다음은 이단 임시 총독이 알아서 하겠죠. 엄청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던데.”
“아카날하고는 좀 달라. 독단적인 태도를 보이려고 할 때마다, 자기 아버지 얘기만 하면 사람이 좀 착해지더군. 적절히 이용하고 있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널 안전하게 보내 준 것 자체가…… 인간미 있지. 약속을 지킨 거니까. 네 말마따나 팔 한쪽씩 잘라 가며 날 붙잡아 둘 수 있었는데 말이야.”
“난…….”
유진은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처럼 중얼거렸다.
“당신의 책이 상당히 인상 깊었지만, 왕정도 공화정도 일단은 판단을 미룰래요. 내가 생각한다고 해서 결론이 나는 것도 아니고…… 아메탄 왕국이 지금처럼 평화롭고, 번영을 누리며, 오랫동안 안정된 상태가 유지되었으면 해요. 그냥 나의 일상을 살 수 있도록.”
“유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네.”
“정말로…… 이단이 기간을 쓰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었어? 그 징표 말이야.”
“아.”
유진은 머쓱한 듯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 담담히 덧붙였다.
“아뇨. 미쳤어요? 아마 건국 이래로 그걸 쓴 사람은 없을걸요.”
리한이 푸핫, 하고 크게 웃었다.
“많이 늘었네, 유진. 협박도 하고.”
“그만큼…… 제가 산하기관 직원으로서의 권리를 이용해서 실없는 소리를 할 만큼…….”
유진이 뒤를 돌아 그에게 입을 맞췄다.
“당신을 사랑했답니다.”
“……고마워.”
리한이 말을 천천히 멈췄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아메탄 국경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꾹 누르며 속삭였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고, 유진은 그의 손을 잡았다.
“다른 사랑을 해도 돼. 날 기다리지 마. 어딜 가나 장기말로 쓰이던 내 인생에 넌 유일한 빛이고 단 하나의 길잡이였지만…….”
유진은 그의 인생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어릴 때부터 군인으로 훈련받았고, 정해진 대본에 따라 가수 생활을 하고, 속아 넘어가서 남의 당선을 위해 노력했다. 무예도 출중하고, 음악도 잘하고, 글도 잘 써서 그렇겠지. 가진 것이 많아 혼란한 시대에 욕심 있는 사람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래서 평생을 이용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비하면 많은 것을 타고나지 못한 유진이 그의 빛이 되었다는 건 삶과 사랑이 주는 역설이기도 했다.
“네 인생에 난입한 것만 해도 나는…… 미안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 중 하나라고 생각해. 한때 서로 좋아했다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가 한때 유진이 했던 말을 인용하며 억지로 웃었다. 이제는 그의 눈매만 봐도 진심으로 웃는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진이 잡은 손을 살짝 놓았다.
“기다릴 가치가 있어요.”
유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이 돌아오면, 내게 밤마다 림프를 쳐 주고, 사랑 노래를 만들어 줄 테니까.”
리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예전에 그녀에게 함께 살자며 속삭인 달콤한 말들이 이상하게 슬픔으로 돌아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