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139/256)

  

49화.

“어쨌든 또 행정국 일이지, 뭐. 산하기관 하나가 늘었으니 오죽 문서상으로 개편할 게 많겠어? 하다못해 행사가 하나 열려도 서식을 다 바꿔야 돼.”

아린스는 점심을 먹으며 자신의 동기, 약제국의 지트에게 하소연을 하는 중이었다.

“하필 유진이 출장 중일 때……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지경이야. 한 명, 한 명이 아쉬운데 지금…….”

“왜 또 부려 먹을 생각부터 하냐.”

지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정상적인 동료라면, 부디 살아 있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니야? 못 부려 먹어서 투덜대는 태도보다는? 물론 걔가 좀 뚝뚝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

“야.”

아린스가 포크로 그의 접시에 있는 소시지를 콱 찍으며 눈을 흘겼다.

“걔 살아 있어.”

“엉?”

“어제저녁에 문서 왔어. 유진 유니트, 사인 딱, 찍혀서. 야근 중에 갑자기 옆자리에서 문서가 생성되길래 깜짝 놀…….”

아린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뒤쪽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갈색 머리 남자가 갑자기 그녀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동그란 안경을 쓴 청년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뭐, 뭐라고요?”

“네?”

“유진 유니트가 살아 있다고요? 문서가 왔다고요?”

“누구세요?”

아린스가 기겁을 하며 의자를 뒤로 끌었다.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안경을 쓴 남자는 나름 곱상하게 생겼고, 상당히 고가의 옷을 입고 있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면 산하기관 직원 같은데 기억이 나는 사람이 없었다. 지트가 머뭇거리다가 끼어들었다.

“어…… 기술국 연구원 아니에요?”

“아, 네.”

노엘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지만 손이 덜덜 떨렸다.

“기술국의 노엘 하이트라고 합니다.”

아린스는 아까 전까지 기술국 때문에 할 일이 늘었다고 짜증을 냈던 것이 기억나 속으로 뜨끔했다. 노엘이 다급하게 물었다.

“유진이 살아 있다는 거, 확실합니까?”

“아, 예에…….”

노엘의 표정을 보며 아린스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타국에서 문서를 생성하면 행정국으로 바로 사본이 생성되거든요. 어제저녁에 하나 문서가 생성되었더라고요. 반란군 사이에 있는 것 같던데…… 이단 임시 총독의 서명이 같이 왔거든요. 어쨌든 곧 귀환한다고 되어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노엘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바로 식당을 뛰쳐나갔다.

9. 제자리

스타람은 왕권이 예전부터 무력했기 때문에 지역 위주로 모여서 주먹구구식으로 살았다. 마력 대신 전기 기술이 발전했지만 수시로 정전이 되어서 삶의 질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유명무실했던 왕조가 끊길 무렵, 어느 산간 지방의 영주였던 한 남자가 통일된 스타람 연방국을 만들자는 주장을 하며 혜성처럼 나타났다. 

아카날 페이림은 스타람의 발전을 위해 모든 지역이 연합해야 하며, 그 지도자는 누구나 만족할 수 있도록 투표로 뽑아야 한다고 연설했는데 그 형태가 바로 공화정이었다. 모두에게 권리를 주고, 유효 기간이 있는 지도자를 뽑자는 주장은 점차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힘을 얻게 되었다.

아카날은 사실 애초부터 야망이 상당히 큰 사람이었는데, 공화정 통일 정부를 수립한 이후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전략가이기도 했다. 그는 스타람이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잊지 않았고, 결국엔 대륙에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영주 시절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며 비밀리에 재능이 있는 소년들을 모아 사병을 키웠는데, 리한은 보육원에서 자라다가 우연히 그의 눈에 들어 어릴 적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고 그 사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아카날이 세력을 키워 가면서 시간은 흘렀고, 리한은 비밀리에 훈련을 받다가 마음 맞는 다른 소년들과 함께 취미로 남는 시간에 음악을 시작했다. 음악에 재능이 있는 다섯 명의 소년들이 모여 주변 술집에서 취미 삼아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인기를 끌었고,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아카날은 그들을 혼내는 대신 대놓고 지원해 주었다. 그들은 그대로 가수가 되어 전 스타람 섬에 인기를 떨치게 되었다. 그렇게 결성된 타르안은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성공하여, 대륙에까지 명성이 미쳤고 순회공연을 할 정도로 팬이 늘었다.

좋다고 노래를 부르며 공연을 다니던 그들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 와중에 아카날은 리한에게 작사를 잘하니 공화주의에 대해 공부하고 그것에 대한 글을 써 보라고 권했다. 리한은 아카날이 여기저기서 짜깁기한 공화주의 사상을 좀 다듬어 보다가, 그러다 보니 그의 생각이 담기고, 또 생각을 담다 보니 더 체계적으로 변해, 수많은 과정을 거쳐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을 탄생시켰다. 

타르안의 인기에 더불어 그 책은 스타람 전체에서 굉장히 히트 쳤고, 자연스럽게 리한은 공화정을 주장하던 아카날을 대놓고 지지하게 되었다. 리한이 생각의 끝에 논리적으로 집필한 공화주의는 매력적이고 공평한 사상이었고 자신도 그 글에 함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어리고, 세상이 쉬웠지.”

“세상에. 저는 전혀 몰랐던 얘기예요…….”

이동하는 동안, 리한은 밤마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하게 늘어놓았다. 혁명군의 모두가 리한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아메탄 왕국까지 가는 길은 상당히 환대를 받으며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리한은 주목받는 것도 싫고, 조금이라도 유진과 단둘이 있고 싶어서 어지간하면 혁명군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동굴에 잠자리를 마련하며 그가 상당히 미안해했다.

“아메탄은 지금 어쨌든 제국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데…… 혁명군과 너무 많이 마주치면 네가 난감할 수도 있어. 불편하더라도 이게 나을 거야.”

“안 불편해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두팜한테 자주 하던 말인데…… 태풍이 와서 집이 다 잠기면, 훨씬 더 열악한 곳에서 잠들었어요.”

유진은 리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타르안에 대해 정말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들의 자세한 이야기는 하나도 몰랐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는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쓸었다. 밤하늘의 별은 반짝이고, 이렇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녀는 타르안의 팬 중 자신이 가장 성공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모든 사실을 아는 팬은 자신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카날은 총선거 끝에 총통이 되었고, 공화정의 위험성을 눈치챈 제국의 봉쇄령이 시작됐지. 타르안은 아카날의 선거 유세에 항상 함께 다녔었어. 사실 아카날의 목적이기도 했겠지. 굉장히 유명한 대중적인 예술가를 만들고, 그 예술가의 지지를 얻는다…… 애초부터 타르안은 그렇게 만들어진 거니까. 그는 우리의 재능을 발견했다며 지원해 주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인기를 위해 우리를 이용한 거지. 그때 우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들은 모두 사병 출신이었기 때문에, 제국을 치게 될 때 대중 앞에 요란하게 입대하여 선봉에 설 예정이었다. 폭풍 같은 인기를 끌고 있던 그들이 군대에 들어가 공을 세우면 국민들의 지지도 더 높아지고 반대 의견도 잠재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한은 어린 시절부터 특출 났으므로 홍보의 목적까지 더해져 지원군의 부대장 위치에 비밀리에 배정받아 훈련을 했다. 스타람은 섬이기 때문에 대륙을 쳐야만 번성할 수 있다…… 그리고 제국은 우리에게 마력을 빼앗은 숙적이다…… 아카날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말했다.

“근데 예상외로…… 제국에서 일반 국민들의 삶이 힘들어지자 내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이 퍼지기 시작한 거야. 사람들은 배가 고프면 어쨌든 들고일어나기 마련인데, 거기에 내 책이 엄청난 기폭제가 된 거지. 아카날은 제국의 혁명군을 돕기로 했는데, 우리 힘으로 그 커다란 제국을 혼자 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과 마력이 사라지면 우리의 기술이 그대로 시장성을 가지게 된다는 분석 때문이었어. 하지만 그 시기에 나와 아카날은 대립이 심했지.”

“왜요?”

리한이 아카날을 의심하게 된 건, 타르안의 멤버들 중 자신만 지원군으로 차출되고 나머지 멤버들은 그대로 남아 아카날의 사병으로 더 거대한 군대를 이끌도록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규칙을 바꿨는데, 총통의 기한은 5년에서 10년으로 늘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사병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했다. 게다가 그가 그의 아들을 위원장에 앉히고, 공공연한 세습을 언급했을 때 리한은 그동안 자신이 속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카날이 처음부터 권력의 세습을 노린 것은 아닐 것이라고 리한은 설명했다. 젊은 시절의 그는 확실히 정의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얘기했고 10대의 리한은 그 모습을 보며 그에게 충성을 다짐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책을 써 보기를 권했을 때 망설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권력을 잡고, 또 욕심이 늘다 보니 사람이 변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나는 늘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어. ‘나의 공화주의’에 보면 나오지. 제대로 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모든 국민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아카날은 내 주장을 늘 못 들은 척했어. 국민들이 똑똑해지면 자꾸 따지고 든다는 이유였는데…… 그냥 아카날은 우리가 노래하고 춤추면 환호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투표하기를 원했던 거야.”

“아…….”

유진은 아주 옛날, 루벤과 다니엘이 왕위 쟁탈전을 할 때 스타람과의 교역을 주장하던 루벤에게 아무 생각 없이 표를 주려던 자신이 생각나 귀가 달아올랐다. 그때, 루벤에게 표를 주면 타르안의 무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 때문에 사실 깊은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아카날은 내 인기가 너무 많아지자 날 경계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계획으로는 제국의 혁명군에게 지원군을 보낼 때 내가 대중들 앞에서 자원입대하는 거였어. 하지만 제국에서 승리라도 하고 돌아오면 내 인지도는 더 높아질 테고, 과연 아카날이 나를 살려 둘까 싶었지. 내가 정치라도 하겠다고 나서면 그의 세습에 방해가 될 테니까.”

이전에 이단에게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유진은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아직 내가 입대하겠다는 것과 지원군의 부대장이라는 걸 대중에게 밝히기 이전, 난 아카날에게 떠나겠다고 했어. 제국의 공화정을 마음속으로 응원하니 어깃장은 놓지 않겠다, 하지만 다 버리고 떠나겠다. 그랬더니 아카날은 내게 조건을 걸었지.”

“조건이요?”

“최대한 시간을 끌며, 요란하게 제국을 거쳐 아메탄 왕국으로 가라.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했고, 그다음 너를 만난 거야.”

그가 유진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그녀에게 애초부터 이 모든 말을 하지 않은 건, 아카날과 스타람은 등을 지고 왔지만 제국의 공화주의는 속으로 응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아카날의 이해관계가 맞는다면 아카날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