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138/256)

  

48화.

“과, 과, 과장님!”

아린스가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조용하던 행정국 직원들이 모두 아린스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옆자리에 생성된 문서를 집어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키탄에게 달려갔다.

“유진 유니트가, 살아 있나 봐요!”

“……지금 생성된 거야?”

키탄은 잠긴 목소리로 아린스가 건넨 문서를 건네받았다. 행정국의 서식을 완벽하게 지킨 문서는 타국에서 작성될 경우 바로 지정된 행정국의 자리로 복사본이 형성된다는 고대 마법에 따라 얌전히 유진의 자리에서 새롭게 생성된 것이었다. 즉, 지금 유진이 문서 하나를 생성했다는 뜻이었다.

그가 문서를 찬찬히 읽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 다행이다…….”

아린스 역시 그렁그렁한 눈물을 닦았다. 키탄이 웃기다는 듯 그녀를 보며 한마디 했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때는 언제고, 눈물까지?”

“걔가 사근사근한 맛은 없는데…… 그래도 죽기엔 아까운 인재란 말이에요.”

“아깝지.”

키탄이 허허, 하는 웃음과 함께 공증서를 함께 훑었다.

“반란군 임시 총독과 함께 있는 와중에도 추가 위험수당을 요청하는 직원인데, 전쟁터에 휩쓸려 개죽음당하기엔 너무 아깝지.”

* * *

유진은 막사에 돌아와 가만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아까 서명한 문서를 들고 몇 번이나 살펴보았다. 기간, 폴라리아 점령 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내일이면 떠나는데, 그 지긋지긋하면서도 그리웠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데, 오늘 밤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유진, 들어가도 돼?”

“……네.”

리한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문서를 쳐다보다가 조금 늦게 고개를 들었는데, 그가 들고 온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군의관이, 이제 마셔도 괜찮을 거래. 그래도 내일 출발할 거니까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아.”

매일 그녀가 마시던 약사발에 보랏빛 포도주가 찰랑거렸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본 그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마시고 싶어할 것 같아서.”

“당연하죠. 고마워요.”

그녀가 싱긋 웃으며 나무로 된 약사발을 받아 들었다.

“힘든 일이 끝나면 퇴근하고 술 한잔하는 게 낙이었는데…… 오늘은 정말 힘든 문서 하나를 받아 냈으니 자축하는 의미에서 마실게요.”

“할 말은 많지만…… 가는 길에 해.”

그가 등에 메고 온 나무로 된 악기를 고쳐 들었다. 유진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그 웃음을 보며 리한이 멋쩍은 듯 말했다.

“군악대에서 잠시 빌려왔어. 제국 악기라 이름은 모르는데, 대충 칠 수 있을 것 같아서.”

“방음 마법 좀 쳐야겠군요. 그때 황제가 있던 지역은 마력이 하나도 없었는데, 여기는 꽤 쓸 만해서 다행이에요.”

그녀가 방음 마법을 칠 동안, 리한은 몇 번 난생처음 본 악기의 줄을 튕기며 계이름을 익혔다. 그가 의자에 앉아 악기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퇴근하면…… 술을 마시며 내 림프 연주를 듣곤 했잖아. 엄청 호사스러운 기분이 든다고.”

“……네.”

생각해 보니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일상이었다. 방음 마법을 치고 온 유진은 다시 침대에 앉아 자신도 모르게 쿡쿡 웃었다. 두팜이 거의 신격화하고 있는 리한이 퇴근하고 온 그녀를 위해서 연주하던 시절이 있었다. 오랜만에 방음 마법을 치고 나니, 자신이 그 시절을 정말로 그리워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악기의 줄을 튕겼다. 그녀가 가장 좋아한다고 했었던 2집의 노래 멜로디를 천천히 변형한 곡이었다. 그녀는 향이 좋은 포도주를 아껴 가며 홀짝였다. 그의 음악을 들으며 술을 홀짝이고, 되는 대로 그날 있었던 일을 주절거리던 것이 생각났다. 리한이 알아듣든 말든, 키탄이나 아린스의 욕을 하기도 하고 문서 작업에 대한 고민들에 대해 중얼거리곤 했었다.

리한의 연주를 들으면서, 포도주 한 모금을 삼키고 그녀가 예전처럼 다리를 까닥이며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내 한계라서…… 그냥 내가 줄 수 있는 전부라서 미안해요.”

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멜로디를 멈추지는 않았다.

“나는 힘이 없어서 당신을 전쟁에서 빼 줄 수도, 강제로 아메탄 왕국으로 데려올 수도, 내 자신이 스스로 대가를 치를 수도 없지만…… 그냥 당신에게 돌아올 곳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유진은 악기의 줄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연주를 들으며 술을 마시는 이 평온한 밤이, 오늘로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어쨌든 이곳은 누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전쟁터였고, 폴라리아라는 곳이 대체 어떤 곳인지는 모르지만 이단이 쉽게 동의한 것을 보면 쉽게 점령할 수 있는 지역은 아닌 듯했다.

“어떻게 할지 몰라 길을 잃고 방황하며 헤매고 있을 때…… 제가 당신에게는 등불 같았다고.”

그녀가 천천히 독백을 이었다.

“내게 당신이 그런 말을 한 거 기억해요?”

그와 이곳에 오기 전, 어느 폐가에서 그가 했던 말이었다. 그녀는 한 모금 홀짝 또 술을 아껴 마셨다.

“당신이 또다시 길을 잃은 것 같아서…… 이곳에 계속 있을 수도, 그렇다고 버리고 나오지도 못하는 상태 같아서…… 헤매고 있다면 또다시 내게 오라고.”

“……유진, 그게 무슨 말이야?”

리한은 손가락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껏 당연히 그녀가 문서를 완성하기 위해 여기까지 일을 벌인 줄 알았다. 그녀가 담담하게 그와 눈을 마주쳤다.

“기다릴게요.”

“뭐?”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순히 문서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단과 협상을 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자신마저 속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당신이 내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많겠지요. 얘기하고 싶을 때 얘기해요. 기다릴 테니까.”

“……그러지 마. 대체 뭘 기다려? 폴라리아가 점령된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변수는 너무 많아서…….”

“그냥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유진은 결국 술을 모두 들이켜고, 살짝 웃어 보였다.

“나는 독신주의자고, 평생 타르안의 무대를 보는 것을 꿈꾸며 살아가는 행정국 직원이에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어요. 하루하루 그냥 또 그렇게 살아가고, 뭐, 어영부영 승진도 하고, 아버지가 진 빚도 차곡차곡 갚고, 조카들 공부도 시키고, 가끔은 짜증나는 날도 생기겠지만…… 그러다 보면…….”

“…….”

“어느 날 리한 카드민이 아메탄에 돌아올 수도 있겠죠. 타르안의 무대는 일단 리한 카드민이 어쨌든 살아 있어야 볼 수 있는 거니까. 타르안의 무대도 기다리는데, 당신을 다시 만나는 날을 못 기다리겠어요?”

리한은 새삼, 그녀가 오늘따라 정말 잘 웃는다고 생각했다. 유진의 웃음을 이렇게 오랫동안 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가 홀린 듯 그녀의 인형 같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기다림이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그녀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술기운을 빌어서만 할 수 있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을 사랑해요.”

담당자라는 관계를 벗어나, 정말 극한의 상황에 몰린 이후에야 직면하게 된 마음이지만 유진은 전달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밀수품을 다 뺏기고 초라한 성적표 같았던 내 방에 찾아와…… 노래를 불러 주었던 그 순간…… 내가 또 이 순간 때문에 많은 날들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예감했어요. 마치, 중학생 때 타르안의 공연을 보고 그 순간 덕분에 견딘 많은 시간들이 있었던 것처럼.”

“유진…….”

“문서에 죽고 문서에 사는 일개 담당자지만…… 내 힘이 닿는 한 당신을 지키고 싶었어요. 수사국 직원들에게도, 황제의 앞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게 사랑이겠죠.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저 당신이 돌아올 길을 명시하는 것밖에 없었거든요. 문서는 힘이 없지만, 그래도 애매한 상황에서 길과 근거가 되어 주는…….”

그가 악기를 떨어트리고 다가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유진은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머리를 묻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유진, 정말 고마워.”

“…….”

“웃기지만…… 누군가가 나를 지켜 준다는 생각이 든 것도 처음이고…… 그래서 나는 평생을, 정말 평생을 널 못 잊을 거야.”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끌어안는 그의 체온이 좋아 유진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너는…… 날 기다리지 마. 좋은 남자가 생기면 만나고, 부디 행복하게 살아. 나는 너와 함께한 시간만으로도 언제까지나 버틸 수 있어. 네게 돌아가려고 네가 만들어 준 길을 따라 무던히 노력하겠지만, 그건 그냥 나의 자유의지일 뿐이야.”

“돌아올 곳이 나라면, 그거면 충분해요. 그렇다면 나의 자유의지로 오늘 밤…….”

그녀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휙 몸을 돌렸다. 리한의 몸이 거부감 없이 그대로 그녀의 밑에 깔렸다. 그의 가슴 위에 엎드린 자세를 취한 유진이 씩 웃었다.

“……‘자빠트려도’ 될까요?”

“뭐?”

“아니에요. 갑자기 이브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그러고 보니 이브의 일행은 모두 무사하게 도착했을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쿡쿡대며 웃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이브의 인격은 모두 다 꾸며진 것이었지만, 리한을 자빠트리겠다고 씩씩대던 철없는 귀족 아가씨의 추억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유진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강렬한 기억을 남긴 이브에게 속으로 ‘내가 이겼어’라고 중얼거렸다.

“이브? 그 여자?”

리한이 미간을 찌푸릴 새도 없이, 유진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입을 맞췄다. 어쩌면 이제 평생 못 볼 수도 있는 상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내일 죽을 수도 있는 전쟁터에서 모두가 욕망에 솔직해지듯이, 그녀도 그 욕망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당신을 온전히 가지고, 그 기억을 또 오랫동안 간직하려고.

그녀의 몸짓에 화답하듯 그가 깊게 입을 맞추며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서로의 숨결이 섞이고 그제야 그들은 새삼 아주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서로를 원했음을 깨달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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