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유진 유니트 양, 저희의 입장을 좀 말씀드리죠.”
유진의 말에 끼어든 건 사브르였다. 사브르가 조곤조곤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국지적인 반란이었다면, 이제 총독님이 표면에 나서고 공화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건 거대한 혁명의 시작을 말합니다. 그리고 공화국의 성격이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협조가 필요해요. 리한 카드민은 유능한 군인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대중적으로 굉장히 상징적인 사람입니다. 어마어마한 팬을 가지고 있었고, 그 대중들에게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으로 유명하기도 하죠.”
“…….”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사브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팔을 자른다며 목소리를 깔았던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도 이 남자는 유진을 ‘대단한 무기가 없는’ 별것 아닌 여자라고 생각하겠지. 물론 그녀는 대단한 무기가 없었고, 말도 제대로 못 타는 지경인 데다가 약소국의 평민일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얌전히 서열의 아래로 기어 들어갈 생각은 아니었다.
“리한 카드민이 혁명군에 합류해서 승전보를 울릴 때마다 사기가 높아지고 지원병들이 늘어납니다. 지금 우리는 그가 절실하게 필요해요. 우리의 계획에 애초부터 있었던 사람이고, 그가 멋대로 이탈한 것뿐이지만, 이왕 돌아온 이상 쉽게 놓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리한 본인도…… 사명감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저 외국인 용병으로 취급하면 안 돼요.”
“……그건 혁명군의 사정이지 제 사정은 아닙니다. 저는 이 문서를 완결시켜야 하고, 그렇다면 ‘제국의 멸망 시까지’라는 문구라도 넣어 주세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리한이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는 즐거운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고 있던 이단의 표정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문서 하나 완성해 달라고 하는 아메탄 왕국의 담당자와, 혁명군의 상징이 되어 가고 있는 리한은 무게가 달랐던 것이다.
“총독님, 유진 유니트의 치료와 귀환을 대가로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했지만…… 제가 정말로 총독님께 도움이 되는 존재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네?”
“지금은 저의 인기와 승전보가 상당히 좋은 소식이겠지만, 얼마 안 되어 제 명성이 부담스러워질 때가 오실 겁니다.”
이단은 신중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유진은 단정하게 손을 모으고 자세에 흐트러짐 없이 리한을 바라보았다.
“아카날 총통이 저를 보내 준 이유이기도 합니다. 공화정에는 대중의 인기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지도자를 뛰어넘는 인기가 위험한 것도 사실이죠. 적절할 때 저는 빠져야 합니다. 아니, 그 생각을 이미 하고 계실 겁니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제가 전쟁 중 죽고, 공화정의 영웅이 되는 것인데…….”
유진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제국의 공화정에 헌신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적절한 기간을 정해 주시면 저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공화국이 세워진다고 해도 그 이후 투표로 지도자를 정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제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 좋지만은 않으실 겁니다. 명분도 적절하군요. 아메탄에 망명했으니, 결국엔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제국의 일은 제국인들이 마무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사브르였다. 사브르가 황급히 리한을 바라보며 빠르게 말했다.
“당신이 공화정에 실망했다며 아메탄에 망명했을 때, 당신의 책을 읽었던 수많은 공화주의자들이 좌절했습니다. 당신은 사실 아메탄 왕국에 망명한 것 자체가 혁명군에게 피해를 준 겁니다. 또다시 저희를 배신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못 보내 드려요. 저는 제가 스타람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공화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리한, 당신도 당신을 제국인들과 분리하지 마세요.”
“잠시 끼어들겠습니다.”
유진은 그들의 대화를 막았다. 잠시 심호흡을 한 그녀가 이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담당자로서 왕명을 받아 리한 카드민의 신변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듣고 보니, 저를 대가로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리한의 자유 의지라고 해도 전투 이외의 위험이 있는 것은 확실하군요. 그렇다면 기간에 대해서 총독님께 모든 결정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네? 위험하다는 것은 누구의 판단입니까? 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도 않은데요.”
“그 판단은 담당자의 재량이라고, 행정국 문서에 명시해 놓았습니다.”
그녀가 막힘없이 말을 이었다.
“1년으로 제안하겠습니다. 임시 정부의 정치적 결정에 따라 전쟁터에서 혁명군 내부에 의해 살해당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이상 제가 개입해야 합니다.”
사브르는 그녀가 성가시다는 듯이 탁자를 한 번 치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일단 유진 유니트 양은 외국인이고, 이런 결정에 개입하기에는…….”
유진은 무표정으로 사브르의 앞에 대고 손목을 내밀었다. 그녀가 마력을 끌어 모으자 외교국의 징표가 푸르게 빛났다. 사브르는 그게 무엇인지 몰라 미간을 찌푸리며 멍하니 있을 뿐이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메탄 왕국에서 이미 보아 알고 있는 이단의 표정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유진은 찬찬히 말했다.
“저는 아메탄 국왕, 다니엘 전하의 왕명에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타국에서 제가 왕명에 따르는 것을 방해할 시, 외교적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겠지만, 제가 이 징표에 다른 마법을 시행하면…….”
‘이 징표를 통해 정해진 마법을 걸면 타국에서 너의 위험을 아메탄 왕국으로 알릴 수 있지만, 알다시피 바로 선전포고이니 서로 피곤해지는 일이니까 되도록 하지 말고.’
될 대로 되라. 유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메탄 왕국은 타국에 공적인 외교를 하러 가는 산하기관 직원의 자국민 보호를 위해 자동으로 선전포고를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브르는 물론, 이단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그는 스타람의 지원군을 대가로 아메탄의 수도 아메니티에 마력을 빼앗은 마음의 빚이 있는 상태였다.
지금은 그를 한 달 동안 보호했다는 사실을 제국에 들키기 싫어 아무 움직임도 없지만, 이렇게 작은 빌미를 제공하면 아메탄 왕국이 기회를 잡아 정말로 보복성 군대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다. 아메탄 왕국은 제국에 비하면 작은 국가였으나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발목을 잡힐 가능성은 충분했다.
“다시, 문서로 돌아갈까요.”
유진은 손목의 푸른 외교국 징표를 지우지 않은 채 다시 펜을 들었다.
“기간을 협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일단 1년은 어떤가요?”
“……정해진 시간은 우리에게 위험성이 있습니다. 리한 장군이 시간을 끌며 전투에 나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사브르의 말에 리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폴라리아. 폴라리아의 점령까지, 라고 하죠.”
“…….”
“꽤 오래 걸릴 테지만, 폴라리아를 점령하면 서부 지역이 거의 다 정리되는 거니까.”
이단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원래 리한이라는 장기말이 들어온 이상, 자신이 원 없이 이용하겠다고 생각했으나 리한의 ‘제 명성이 부담스러워질 때가 오실 겁니다’라는 말에 주춤하기는 했다. 역시 공화정 임시 정부를 처음 운영하다 보니 멀리 내다보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괜히 아카날 총통이 그와 엇나간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전투 초반이니 늘어나는 자원 입대자와 치솟는 사기가 마냥 좋았지만, 어느 순간 리한이 야망이라도 보이면 위협이 느껴질 것 같았다. 그는 영원한 권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첫 번째 통령만큼은 자신이 하고 싶었다. 그에게는 제국의 점령 이후 통령의 권위에 기대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리한의 등장은 예상하지 못했던 희소식이었다.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고, 잠시 다녀가는 행운이라고 생각하면 밑질 것은 없었다. 한 여자의 풍토병 하나 치료해 준 것으로 폴라리아까지 진군하는 데 도움을 받는다고 치면 충분히 남는 거래였다. 이단은 나름 시원스러운 성격이었기 때문에 사브르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무시하며 호기롭게 말했다.
“……그렇게 합시다.”
그의 말에 유진이 ‘기간’ 항목에 ‘혁명군이 폴라리아 지역을 점령할 때까지’라고 기록했다. 자신이 사인하고 차례대로 리한의 사인을 받은 뒤, 마지막으로 이단에게 펜을 건넸다. 이단이 사인하는 것을 본 리한이 천천히 말했다.
“총독님.”
“예.”
“그럼 유진은 언제 출발하면 됩니까? 군의관 말로는 당장 내일도 된다고 하던데.”
“그럼 내일 보내는 것으로 하지요. 이르트 산맥을 거치면 조금 돌아가기는 해도, 모두 우리 혁명군이 점령했으니 아메탄까지 별 위협 없이 갈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부탁인데…….”
유진은 서명된 문서를 챙기다가 그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데려다주는 것은 제가 하도록 해 주십시오.”
사브르는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정작 이단은 리한과 유진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다가, 푸핫, 하고 한 번 웃더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이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더라면, 보내 주지 않았을 겁니다. 그대로 도망가 버릴까 봐.”
그가 일어나 유진에게 악수를 청하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듣던 대로 행정국 직원들이 문서에 죽고 문서에 산다는 것도 사실이라는 걸 이 참에 알았습니다. 리한이 가지 않겠다 해도 아가씨가 돌려보내겠지요. 잘 다녀오십시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