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8. 길잡이
유진의 치료가 완전히 끝나고, 정말 당장 떠나도 될 정도의 몸 상태가 되자 그녀는 차분히 여행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두팜은 울먹거리면서도 그녀에게 세심하게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유진의 승마 실력은 향상 속도는 형편없어도 점점 더 나아지기는 했다. 그러나 유진은 말 타는 것에 대한 흥미를 도저히 붙일 수 없었고, 아메탄에 도착하면 다시는 말을 타지 않겠다고 이미 다짐한 상태였다.
그런 유진을 먼발치에서 보며 리한은 이젠 정말 마음을 접어야 한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자꾸만 어쩔 수 없이 가는 시선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에게 죄책감을 갖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래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버려서 서운하기도 했다. 자신이 바라던 대로 행동해 주는데도 왜 이렇게 속이 쓰린지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세가 이게 뭐야? 아직도 근육이 제대로 안 잡혔잖아.”
그는 오후에 한 시간씩 소년병 훈련을 할 때, 애꿎은 두팜에게 짜증을 내곤 했다.
“끝나고 연병장 다섯 바퀴 돌아. 근지구력도 형편없어.”
울먹울먹하는 두팜의 표정을 뒤로하고 그는 혼자 한심함에 한숨을 쉬었다. 하다 하다 10년도 더 어린 소년에게 질투를 하고 있었다. 사실 유진이 아메탄에 돌아가면 그 노엘이라는 놈을 만날 것 같아 화가 치솟다가도, 이제는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며 혼자 마음을 가라앉히곤 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결정이고, 진심으로 바라 왔던 상황인데 왜 이렇게 감정이 들쑥날쑥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행정국의 유진 유니트, 리한 카드민의 담당자입니다. 당장 멈추지 않으면 공무집행 방해로 징계 사안입니다.’
당당히 그의 앞을 막아서던 그녀의 뒷모습을 자신은 잊을 수 있을까.
‘저는 당신의 신변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요.’
말 하나도 제대로 못 타는 여자지만,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정말로 그를 지켜야 한다는 진심이 보여서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었던 기억들이 많았다. 생각해 보면 그는 살아오면서 그 누구도 믿지 않았지만, 유진만큼은 문서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정말 못 부르겠어.’
‘그럼 하지 마요.’
리한은 새삼 그가 그동안 그녀를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가 얼마나 그에게 힘이 되었는지 느꼈다.
‘내가 안 하게 해 줄게요.’
그녀가 없다면 그는 얼마나 또 방황을 해야 할까. 아카날 총통과 등을 진 채로, 그가 보낸 군대를 이끈다. 언제까지 낯선 땅에서 외국인들을 위해 이 군대를 이끌어야 하고, 또 끝이 어떻게 되든지 전쟁이 끝나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래도 유진을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보내야 하는 건 맞았다. 아카날이라면 아마 유진을 붙잡아 인질로 삼고 손가락 하나씩 잘라 가며 리한을 조종했을 것이다. 일단은 여기에 아카날이 없고, 얼마간 관찰한 이단은 확실히 아카날과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사브르와 함께 있는 이단의 앞에서 유진과 함께 앉았을 때에도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이단은 유진의 공증서 요구에 가볍게 응했는데, 아메탄 왕궁에 한 달 정도 체류하면서 산하기관 직원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주 앉은 유진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슬쩍 웃음 지었는데, 어린애처럼 조그마하고 인형처럼 귀엽게 생긴 여자가 똘망똘망한 얼굴로 종이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재미있어서였다. 피 튀기는 전쟁터에서 너무나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여리여리한 여자애가 이질적이어서 그는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행정국 직원들을 만나 본 일은 없는데…… 듣기로는 문서에 죽고 문서에 산다고 하더군요.”
“그건…… 보통 수사국 직원들이 저희를 욕할 때 쓰는 말인데…….”
“제가 거기서는 수사국 직원들하고 가장 교류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아메탄의 산하기관은 참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객관성과 전문성을 추구한다면서요.”
“네.”
유진은 짧게 대답했다. 젊은 총독, 이단은 살짝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잠시 아메탄에 머물면서…… 사실 조금 민폐를 끼치고 왔는데…… 참 면목이 없군요.”
“저랑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녀가 그 민폐가 무엇인지 묻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대꾸했다.
“제가 제국에 있을 때 벌어진 일이니 누군가가 담당하고 있겠지요. 그 사람 사정입니다.”
유진은 속으로 제발 엄청 복잡한 사안이었고, 부디 아린스가 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당당하게 말했다.
“공교롭게도 여기 앉아 있는 리한 카드민은 제 담당의 업무였고…… 그래서 저 혼자 아메탄에 돌아간다면 동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공증서가 필요합니다.”
“재미있군요. 그냥 리한이 당신을 두고 도망쳤다고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건 진실이 아니잖아요.”
그녀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말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공문서 위조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조금만 심문당해도 다 들켜요.”
“흠.”
“저 혼자 아메탄 국경까지 못 가는 건 길 가는 사람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알 겁니다. 저는 아메탄 왕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진실을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음…… 뭐 그러시다면야.”
이단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살짝 리한의 표정을 살폈는데, 리한은 유진의 고리타분하고 빡빡한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자동으로 문서 번호가 매겨져서 아메탄 왕국이 영구적으로 보관할 것이고, 기록 마법이 걸린 이상 분실 시에도 조금 복잡하긴 해도 복원이 가능합니다. 위조 불가 마법이 걸려 있고요.”
유진은 종이를 펼치고 예전에 루티와 공증서를 주고받았던 때와 마찬가지로 공증서의 효력을 갖는 마법을 걸었다. 종이에 행정국의 공문서식이 반짝이며 내려앉았다. 신기하다는 듯한 사브르와 이단의 표정을 의식하며 그녀의 펜이 정갈하게 움직였다.
“관련, 특별 관리 대상 리한 카드민.”
그녀가 형식에 맞게 차분히 글을 써내려 가는 것을 리한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그녀가 그의 앞에서 자신의 담당이라며 문서를 작성하던 순간이 기억났다. 그들이 문서로 엮이던 그 순간부터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고, 이렇게 끝이 나려고 하고 있었다.
“담당자, 행정국 유진 유니트.”
유진은 천천히 펜을 움직였다. 고요한 공기 속에서 펜이 종이를 가르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사안, 유진 유니트의 풍토병 치료와 아메탄 왕국으로의 귀환을 대가로 리한 카드민은 혁명군에 협조한다…… 동의하시지요? 더 넣어야 할 문구는 없나요?”
“네. 모두 맞는 말이군요.”
이단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쉬워 보이는 아래 칸부터 채우기 시작했다.
“금액, 유진 유니트의 추가 위험수당 요청. 이건 제가 행정국에 요구할 사안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그럼 이 밑에 제가 사인하면 되나요?”
“아, 잠시만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이단을 바라보고, 빈칸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간은 어떻게 할까요?”
“……네?”
이단은 당황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진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대가에 따른 거래라면 기간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설마 저 같은 말단 직원 하나 살려 놓고 평생 리한을 부려 먹을 건 아니시죠?”
리한은 유진이 그 모든 서식 중 하나라도 비운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리한 카드민은 일단은 제 담당이고, 현재 저는 그의 소재를 파악하고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혁명군에 협조한다고 해서 그 담당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제국은 철저히 황제 위주의 상명하달 국가였기 때문에 이단은 이러한 절차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그가 원할 때까지 아니었나? 유진은 당황한 이단의 표정을 보며 재촉했다.
“소재가 아메탄으로 등록된 사람이 혁명군과 거래를 한 거잖아요? 그렇다면 아메탄의 형식에 따라야죠. 용병 고용과 비슷한 계약인 것 같은데, 기간을 명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니, 전쟁이라는 것이 기간에 맞춰서 딱 끝나는 게 아니고…….”
이단의 눈동자에 당혹스러움 반, 흥미로움 반이 섞였다.
“설마 전쟁 끝까지 리한 카드민을 데리고 계시려는 겁니까?”
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저희는 제국에 지원군을 보낼 때도 기간을 명시합니다. 리한은 제국에서 어디까지나 외국인이고, 외국인 용병이 끝까지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요. 홍보 목적으로 입대를 장려하는 역할이라면 길어야 몇 달이라고 생각합니다.”
리한은 유진이 고집을 부리자 속으로 잠시 놀랐다. 상대는 어쨌든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황족이자, 혁명군 전체를 이끄는 임시 총독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강하게 아메탄의 형식을 주장하고 있었다. 하긴, 유진은 원래부터 권위에 눌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첫날 기선을 제압하려고 하자 그대로 튀어나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제가 결정할 바는 아니니까, 총독님께서 정해 주세요. 참고로 행정국의 문서는 이 모든 조건을 빈칸 없이 채워야 합니다.”
“……내가 협조해야 할 이유는?”
“협조하시지 않고 마음대로 하신다면…….”
그녀가 그의 모든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평온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와 공화정 총독이 다를 게 뭡니까? 제가 대단한 걸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리한 카드민이 언제까지 혁명군에 속해 있을지 기간을 명시해 달라는 건데요.”
“……하.”
“다시 말씀드리면…….”
유진은 고개를 돌려 리한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리한 카드민이 혁명군에서 나왔을 때, 소속이 아메탄 왕국임을 확인하는 문서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마음대로 망명해 놓고 아무 때나 제멋대로 떠날 수 있게 하는 건, 너무나 나쁜 전례가 됩니다. 일단 망명을 했으면 아메탄에 적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합리적이니까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