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135/256)

  

45화.

유진은 막사로 들어오는 리한을 보고 울컥 눈물이 날 뻔했지만, 입술을 꼭 깨물고 참았다. 침대에 앉아 있는 그녀의 앞으로 그가 의자를 끌고 와서 마주 앉았다. 한동안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서로가 뿜어내는 분위기가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밖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만 한동안 울리다가, 리한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몸은 괜찮아?”

“보시다시피.”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그새 리한의 인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위치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지만, 자세나 말투, 골격 등이 누가 봐도 한량처럼 사는 가수가 아니었다. 이토록 군복이 잘 어울리다니, 새삼 예전에 카이든이 그가 군인일 것이라는 추론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역시 같이 살기까지 한 행정국 직원보다는 한 번 심문한 수사국 직원의 눈이 더 날카로웠을까. 

그녀는 아주 옛날, 체스트와 셋이 모여 앉아서 마늘을 까던 기억이 나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저는 아메탄에 언제 갈 수 있나요?”

“몸이 회복되면…… 바로 보내 줄 거야.”

“확실해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유진은 오랫동안 연습해 온 말을 신중히 꺼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실은 얼마 없고, 다그쳐 봤자 리한이 혼자 이 상황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줄 리는 없었다.

껴안은 채 언제까지나 둘이 폐가에 갇혀 살자고 할 때는 언제고, 그동안 계속해서 반란군을 피해 다녔다가, 왜 순식간에 갑자기 반란군의 장군이 되어 있는지, 대체 아메탄 왕국에는 왜 온 건지, 공화주의자라면서 그동안 왜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한량처럼 굴었는지, 질문은 쌓였지만 그 모든 것들을 쏟아 내면 그가 입을 다물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많은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기 위해 그녀를 피했을 테니까.

“확실해.”

“…….”

“몸이나 회복 잘해. 아메탄으로부터 조금 멀리 왔지만…… 혁명군이 점령한 영지로 동선을 짜면 아메탄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을 거야.”

“……정말인가요.”

그녀가 표정의 변화 없이 말했다.

“내 한쪽 팔을 자르고, 다른 한쪽 팔을 인질 삼아 당신을 영원히 묶어 놓을 거라던데 나 정말로 아메탄에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것 맞아요?”

“뭐?”

감정을 눌러 담고 있는 것 같았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리한은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그가 그렇게 새파랗게 분노를 표현하는 것을 처음 봐서 잠시 멈칫했다.

“누가 그래?”

“……말도 안 되는 얘기는 아닌가 보네요. 그냥 지껄인 협박은 아니었나 봐요.”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나 때문에 여기 묶여 있는 것 맞죠?”

“……꼭 그런 건 아니야. 누가 그랬는지 말해. 확인해 볼 테니까.”

“가능성이 있는 얘기네.”

유진은 냉정함을 잃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럼 일단 대책을 세워 보죠. 내 한쪽 팔을 자르고 다른 한쪽 팔을…….”

“유진, 그만해.”

그가 그녀의 무릎에 무너지듯 얼굴을 묻었다.

“그런 얘기……하지 마. 불안해 미칠 것 같으니까.”

“불안하다고 생각을 안 하면 안 되죠. 전 팔이 잘리기 싫고, 무사히 아메탄에 돌아가고 싶으니까요.”

“가자.”

리한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의 눈에 불안함과 광기가 섞여 있었다. 유진의 손목을 그가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네?”

“완전히 회복은 안 되었지만, 거동은 할 수 있다며. 그냥 떠나자. 내가 데리고 갈게. 불안해서 안 되겠어. 네가 그런 말을 들었다면…….”

“……이 엄청난 군대를 뚫고, 지금 날 데리고 나가겠다고요?”

“총만 조심하면 돼.”

“내가 무서워요. 난 아직 말 타는 것도 익숙하지 않아요. 그리고…….”

유진이 차분하게 그의 눈을 마주했다.

“두팜 같은 소년병들에게 당신은 영웅이에요. 그 애들은 당신의 책을 읽고 인생을 걸었어요. 이미 한 번 아메탄에 망명해서 큰 실망을 줬는데…… 이대로 또다시 당신이 사라진다면, 정신적인 타격이 클 거예요.”

“그게 바로 그들이 알고 있는 거고, 원하는 거지.”

리한은 분노에 차서 중얼거렸다. 그가 유진의 손목을 놓고 다시 의자의 등받이에 신경질적으로 등을 기대려는데, 유진은 그 말을 놓치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았다.

“리한.”

“……왜?”

“나…… 때문에 여기 있는 거죠?”

“……아냐.”

“막상 있으니…… 내가 아까 말한, 그 책임감 때문에 못 떠나는 거기도 하고. 당신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인기 가수이면서, 영리한 공화주의자이고, 뛰어난 장군이기도 한 당신의 유명세를 믿고 입대한 사람들을 보면 떠날 수 없을 테니까.”

“유진.”

그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냥 문서에 필요하다는 사인만 하고 떠나려고 했는데 어느새 유진의 페이스에 말리고 있었다.

“필요한 문서나 써.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내 팔이 잘릴 수도 있다는데 나도 무슨 상황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럴 일 절대 없게 할게. 아카날 총통과 이단 총독은 달라.”

“당신이 통솔하고 있는 군대는 스타람의 지원군인데…… 당신은 일관적으로 아카날 총통에 반감을 드러내고 있어요. 그런데 아카날 총통의 명령이 아니라면, 왜 남의 나라 내란에 끼어드는 거예요? 당신의 국적은 현재 아메탄이고, 더더욱 그럴 이유가 없어요.”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책상 서랍에서 종이 한 장과 펜을 꺼냈다.

“공증서를 쓸 거예요. 왜 혼자 돌아가는지에 대해.”

“…….”

“저는 담당자로서 이 문서에 진실을 담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자꾸만 해명되지 않은 말들을 하면 저는 아메탄에 못 돌아가요.”

“무슨 얘기야? 아메탄에 왜 못 가?”

“저는 당신의 신변을 보호해야 하고, 반드시 동행해야 하는데…… 여러모로 의심쩍은 상황을 뒤로하고 저 혼자만 돌아가면 너무 좋지 않은 전례니까요. 리한의 이름은 혁명군 사이에서 점점 더 퍼질 텐데 그럼 담당자로서 제가 너무 골치 아파져요.”

“…….”

“리한이 어떤 대답을 해도 저는 아메탄에 사지 멀쩡하게 돌아갈 거예요. 여기서 당신에게 도움될 일도 없고,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걸 알아요.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으니 말해요. 내가 인질인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그 정도 알 권리는 내게 당연히 있어요.”

리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고, 차분히 말했다.

“그럼 약속해.”

“뭘요?”

“반드시 아메탄에 무사히 돌아가야 해.”

“제가 한 말이잖아요.”

“내게 죄책감 같은 것도 가지지 마.”

“…….”

“어차피 상황은 못 바꿔.”

유진은 그 한마디에, 오래 전부터 혼자 세워 온 가설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 가장 노련한 군의관이 붙은 것도, 좋은 막사를 쓰게 해 주는 것도, 그녀의 회복을 후발대가 모두 기다린 것도, 그녀의 건강을 사브르가 걱정한 것도 모두 말이 되는 어떤 가설 하나.

그녀는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네 병이 생각보다 심각했고…….”

“네.”

“나는…… 널 고칠 능력이 없었고…… 의원을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 혁명군이었고.”

“네.”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던 아카날 총통과 반목하고, 모든 게 다 싫어서 아메탄 왕국에 온 건 사실이야. 아카날 총통이 날 보내 주는 대신 목적지를 정해 주긴 했지만.”

그가 눈을 문질렀다.

“이단 총독이 내가 아메탄에 입국할 때 함께 들어왔다고 해서 그 빚으로 네 치료와 협상해 보려고 했는데 실패했고…… 사실 혁명군에서 날 받아 줄 건 알고 있었어…… 아카날이 오랫동안 혁명군의 스타로 날 준비해 왔으니까. 원래 나는 가수가 아니라 군인으로 컸어. 널 치료해 주고 안전하게 아메탄에 보내는 조건으로…… 다시 돌아온 것뿐이야.”

“……네.”

“막상 또 돌아오니…… 사실 나는 뼛속까지 공화주의자가 맞기 때문에…… 또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걸 사브르는 알고 있는 거지. 사브르는 오랫동안 날 봐 왔으니까. 아카날과는 대립해도 혁명군에게는 승리를 주고 싶어. 물론 이건 외국의 일이지. 이단 임시 총독의 일이고, 그냥 제국의 일일 뿐이지만, 네 말대로 대다수가 내 책을 읽은 사람들이라 막상 마주치니…… 글쎄, 유진.”

그의 눈이 흔들렸다.

“……나도 모르겠어. 신뢰, 불신, 의무, 자의, 포기, 신념, 공허 이런 단어들이 하루에 몇 번씩도 머리를 맴도니까. 옛날처럼.”

“이해했어요. 저도 그 책을 읽었거든요.”

유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표정의 변화 없이 길게 늘어진 은발 머리를 넘겼다. 

“그리고…….” 

말을 잇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당신은 또 길을 잃었군요.”

정적이 흘렀다. 리한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웃었다. 그녀는 이제 그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표정 뒤에 있는 위태함과 불안함, 쓸쓸하고 스산해 보이기까지 하는 분위기를 완벽히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을 가진 듯한 그가 왜 그렇게 우울하고 침잠하는 가사를 썼는지까지도 알 것 같았다. 유진의 눈에 슬픔이 내려앉았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 이게 내 인생의 본질이겠지.”

리한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유진, 그냥 날 잊고 돌아가. 네가 내 곁에 있어서 좋을 게 없어. 그걸…… 내가 또 너무 오만해서, 이제야 안 거야. 돌아가서 평온한 네 삶을 살아. 어차피 넌 담당자라는 위치 때문에 나를 부담스러워하기도 했잖아.”

“저는 돌아가서 저의 평온한 삶을 살 거예요. 당신처럼 대단한 능력이나 명성은 없지만, 제게는 지켜야 할 인생이니까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그녀는 빈 종이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참조 문서는 완벽해야 해요. 사안이 복잡해서 우리 둘이 사인하고 말 건 아닌 것 같아요. 상황을 이해했으니 이제 어떻게 공증서를 받아야 할지 감이 잡히네요.”

리한은 그녀의 익숙한 무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걱정하던 것은, 그녀가 자신이 아픈 것 때문에 그의 발이 묶였다며 떠날 수 없다고 우기는 상황이었는데 역시 그녀는 전혀 그런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유진은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있었구나 싶어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말도 안 된다며, 나 때문에 희생하지 말라며, 나 혼자 떠나지 않겠다며 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유진은 철저하게 ‘문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만일 그렇다고 해도 리한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모두 해 주고 싶었다. 특히나 문서와 기록에 대한 그녀의 집착을 아는 터라, 그저 이제 언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눈 속에 담아 두고만 있었다.

“당신의 새로운 소속이 혁명군이라면 책임 소재는 임시 총독님께 있겠죠. 임시 총독님을 뵙고 싶어요. 이 모든 사실에 대한 공증서를 쓰려면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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