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또 엿들은 거 없어?”
“음, 사브르 부단장님이 ‘얼른 보내 버려야겠네.’라고 했어요.”
“……그렇구나.”
“아메탄 왕국으로 가시는 거예요?”
유진은 잠시 고개를 모로 돌리고 나서, 빠르게 자신의 막사로 들어갔다. 지금까지는 바짝 엎드려 지냈지만, 이제는 행동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험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사브르를 잊지 않았다. 그의 험악한 협박에 겁을 집어먹고 약자의 자리에 있는 것은 그녀의 성깔머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죽으면 죽었지 그 인간이 보낸다고 얌전히 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따라 들어온 두팜에게,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팜.”
“네?”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
“뭘요?”
어리둥절한 눈을 한 소년에게, 유진은 ‘나의 공화주의’ 책을 건네며 말했다.
“훈련이 끝나면, 여기에 사인을 해 달라고 해.”
“어, 어, 어떻게 그래요! 장군님은 높으신 분…….”
“아니, 기꺼이 해 줄 거야. 그 사람은 널 알고 있으니까.”
근거는 없었지만, 유진은 자신을 바라보던 그 시선을 믿으며 확신에 차 말했다.
“그러면서 남들 몰래 내 말 좀 전해 줘.”
“음…… 직접 말 안 하시고요?”
“응. 난 전쟁터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서, 적절한 시기를 잘 모르겠거든.”
두팜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의 공화주의’에 사인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나름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유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행정국에서 담당자가 혼자 돌아갈 때 징계 안 받으려면 참조 문서가 필요하다고, 사인해 줄 때까지 떠날 수 없으니 오늘 저녁 편할 때 내게 오라고 해.”
* * *
리한은 유진을 앞으로 다시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건강해진 그녀를 다시 만나면 그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테고, 그러다 보면 자신이 그녀를 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떠나는 데에 자신이 방해가 되기만 할 것 같아서였다. 이왕 각자의 인생을 살기로 결정한 것, 더 이상 질질 끌어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유진은 분명 갑자기 상황이 이상해진 것에 대해 의아함을 느끼겠지만, ‘더 알 필요가 없는 것들에 대해는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는 그녀의 성향상 그냥 주어진 대로 아메탄 왕국에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한번 의심이 싹튼 마음은 추하게 꼬리를 물었다. 언젠가, 그녀는 뚱한 얼굴로 일 년 월급을 주고서라도 호웰에게 안길 수 있다면 안기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그녀는, 잘생긴 남자가 다가오니 막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를 거부하지 않은 걸까. 아메탄 사교계에 공연을 다닐 때 추파를 던지던 그 수많은 여자들처럼.
그녀의 마음에 있는 사람은, 아플 때 이름을 중얼거리던 그 노엘이라는 남자일까. 아주 오랜 친구 사이라고 들었는데 결국 유진의 옆자리는 그만이 채울 수 있고, 자신은 그저 지나가는 설렘뿐이었을까. 그렇다면 유진의 옆에서 평생 조용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자신의 진심은 얼마나 웃긴 것이었는지. 그는 또다시 자신의 모든 생각이 허무해졌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완벽히 낫게 되면 딱히 작별 인사 없이 알아서 보내라고 사브르에게 지시해 놓은 상태였고, 사브르도 그가 그녀에게 정을 떼려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리한은 어디까지나 ‘임시’라며 부대장을 맡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지만, 원래 그의 자리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카날과 틀어지고, 그에겐 어떤 신념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공화정을 수립하겠다고 모인 군대를 보니 마음이 또 싱숭생숭하기도 했다. 그가 스타람의 공화정에 등을 돌리게 된 계기인 아카날은 어쨌든 지금 눈에 보이지 않았고, 공화주의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소년병들을 보고 그들의 사연을 듣다 보면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두 다 그의 책을 읽고 야학에서 공부를 했다며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사브르는 이미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장군님, 아카날 총통님과 왜 틀어지고, 왜 우리를 떠났는지 저도 이제야 짐작을 할 뿐입니다. 말만 공화정이지, 그게 독재와 다를 게 뭐겠습니까. 저도 스타람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사브르는 그에게 여러 번 말했다.
“하지만 이 제국 땅에 공화주의의 씨를 뿌리고, 스타람의 오랜 숙원을 푸는 데에 아카날 총통님은 상관없지 않습니까. 스타람에서 우리의 공화정이 실패했다면 더더욱 그 실패를 발판 삼아 제국에서는 성공해야 합니다.”
리한은 사브르의 계속된 설득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장 내일을 생각하는 것도 벅찼는데, 그는 그의 방황이 다시 시작된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결국엔 아카날의 뜻대로 행동해 주는 것을 알면서도 운명은 그를 이곳으로 데려오고 말았다. 다만 이곳이 그의 자리라면, 일단 유진은 다시 그녀의 자리로 돌려주고 싶었다. 이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그녀에 향한 자신의 마음은 더도 덜도 아닌 욕심이었다는 결론까지 내려진 상태였다.
애초부터 그녀의 인생에 끼어든 것이 그는 너무나 미안했다. 군대는 그에게 너무나 익숙했고, 불과 며칠 만에 이곳이 자신의 자리인 듯 적응했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이곳에 오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면, 이 전쟁통에 주스 뚜껑 하나 자신의 손힘으로 따지 못하는 여자를 데려온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에게 주목하지 않고 있을 때 조용히 보내려고 마음먹었던 그는 그녀의 곁에 붙어 있던 통통한 소년이 몰래 전한 말에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행정국? 뭐, 거기서 징계를 안 받으려면…… 문서를…… 사인을 받아야 한다는데…… 오늘 저녁 편할 때 오시라고…….”
그는 그녀 때문에 혁명군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고, 분명 자신의 말과 행동에 모순이 있다는 점을 알아챘으리라 생각해서, 유진이 그에게 만나자고 하더라도 만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대화가 돌고 돌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유진이 그에게 이 상황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성에 도착해서도 그에게 아는 척도 하지 않았으며, 마주쳤을 때 그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목례를 할 뿐이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가 빗속에서 그녀를 업고 들어왔던 것을 보았던 군사들 사이에서도 ‘아메탄에서 보조해 줬던 여자래.’라고만 할 뿐 아무도 그와 그녀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유진이 항상 곁에 붙어 다니는 통통한 소년과 편하게 장난치고 웃음 짓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부아가 나곤 했다.
‘별 의미 없어요. 이젠 남보다도 못한 사이인걸.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 중 하나지, 뭐. 한때 서로 좋아했다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가 대학 시절에 사귀었다던 그 재수 없는 전 남자 친구와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이미 그녀는 그에게 어떤 마음도 없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두팜이 전한 말로 더욱 확고해졌다.
‘아메탄에 돌아갈 때, 혼자 돌아가니 문서가 필요하다 이거지…….’
지난번 그 전쟁통에서도 담당자를 찾아 문서에 서명을 받으며 옥신각신했던 그녀를 떠올리며 리한은 한숨을 쉬었다. 유진은 이미 아메탄에 혼자 돌아갈 생각을 함과 동시에 그와의 관계를 문서로 정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럴 거면…….’
리한은 그날 저녁, 군사 회의를 하면서도 속으로 짜증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었다.
‘왜 입을 맞추고…….’
아메탄의 군악대가 머무를 때 공격을 개시한 다른 혁명군이 황제의 발을 묶고 있을 때, 어렵더라도 서부 지역의 요충지인 폴라리아를 점령해야 한다는 결정에 동의하는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던 유진의 얼굴과 그때 불어오던 바람의 냄새가 떠나가지 않았다.
‘당신과 꼭 행복하겠다, 당신이 내 인생을 구원할 거다, 이런 마음으로 당신을 받아들인 게 아니에요. 물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쩔 수 없었지만…….’
왜 그런 말들로 자신을 정신 못 차리게 했는지. 리한은 군사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면서도 유진의 말과 표정,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던 작은 손을 떠올리며 속이 쓰렸다. 그녀가 지금까지만의 행적으로도 그에게 몹시 소중하고, 그의 인생에 남은 유일한 그리움이라 할지라도 당장에 서운한 마음이 솟구치는 건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다. 리한은 자신이 사랑 앞에서 이렇게 작고 초라하며 속까지 좁아질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옆에서 걷던 사브르가 그의 굳은 표정을 보며 허허 웃었다.
“폴라리아가…… 어렵긴 하겠죠, 아무래도?”
“…….”
“그래도…… 지금 장군님 덕분에 사기가 높고, 자원입대도 늘어 가고, 이 기세를 몰아가고 싶은 총독님의 판단이 저는 맞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싸움이 되겠지만요.”
“…….”
리한의 침묵이 폴라리아 침공의 결정에 대한 부담이라고 생각한 사브르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리한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찰대 한 번만 보고 들어갈 테니, 먼저 가.”
“네. 알겠습니다.”
사브르와 헤어진 뒤 혼자 남은 리한은 저벅저벅 정찰대를 향해서 한참을 걸어가다가, 반쯤은 오기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래…… 사인해 주지, 뭐.’
저 멀리 유진의 막사가 보였다. 그동안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언제나 시선의 끝에 두고 있던 곳이었다. 그가 정확히 원하던 결말이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홀로 무사히 돌아가는 것. 이보다 더 잘 해결될 수 없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공허한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